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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는 장식품. 저것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었을까?
▲ 아이들의 공연 발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는 장식품. 저것을 만들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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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온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
▲ 환영인파 기공식에 참여하기 위해 온 지역 주민들과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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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가탕가에서 멜리가 마을까지 포장도로 위를 두 시간, 비포장도로 위를 또 두 시간. 드디어 이번 동역자 탐방의 꽃, '첫삽 뜨기(기공식)' 행사가 있는 그 날이 왔다.

이른 아침 5시 30분. 일찌감치 조반을 먹은 탐방팀이 버스에 올랐다. 숙소에 대해 불평들이 많으리라는 염려와 달리 팀원들 얼굴엔 미소와 화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가나 북부지역 중 꽤 큰 도시인 볼가탕가지만, 딱히 이만한 숙소를 구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여기다' 싶었던 것은 숙소 앞마당에서 탐스럽게 영글어가던 소담스런 망고나무 때문이었다.

건기를 비웃는 듯한 풍성한 진초록 나뭇잎 사이에서 가지가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풍성하게 달려있는 망고열매. 그리고 마당 한 편에 흐느적거리며 흐르던 경쾌한 리듬의 '취' 부족의 노래. 나는 방문을 채 열어보지도 않고 숙소를 정했다.

그런데 멜리가 학교 운동회를 마치고 돌아온 밤늦은 숙소와의 재회는 이런 나의 들뜬 마음을 단박에 깨버리고 말았다. 숙소의 방 안에는 손으로 문지르면 한 움큼 잡힐 듯 먼지가 몇 겹이 쌓여있고, 덮을 이불도 베고 누울 베개도, 그리고 세수한 후에 물기를 걷어낼 수건도 아무 것도 없었다.

숙소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육십세를 넘기신 연세 지긋하신 분들 위주로 구성된 우리 탐방팀이었다. 무려 스무시간 가량의 장시간 비행으로 인한 체력 소모와 시차적응으로 인한 곤함이 더해져 있어 쉽지 않은 탐방임은 충분히 짐작한 대로였다.

미리 준비해간 옷가지들을 죄다 꺼내어 꼭 끌어안은 채 잠을 자며 밤새껏 근심했는데, 이른 아침 팀원들의 얼굴은 전날보다 더 평화로운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어려운 상황임을 미리 각오하고 오신 탐방 팀원들이 고마웠다. 또 한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게 하는 아프리카식 긍정의 힘을 보는 것 같아 놀라기도 했다.

우리는 이번 탐방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멜리가 학교 첫 삽 뜨기' 행사를 위해 다시 버스를 타고 멜리가 마을까지 네 시간의 긴 노정을 시작했다.

첫 삽보다 중요한 그 이후... 적어도 10~15년은 함께 해야

"학교를 다 짓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이죠?"

팀원 중 한 명이 질문을 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버스 안 대화가 시작되었다.

"학교를 짓는 것보다는 그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계획한 것은 학교건물을 새로 짓는 데에 불과한데 사실 그보다 학교 운영 면에서 필요한 세부적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학교에서 점심 급식을 하고 있는데 요리를 하기 위해 학생들이 직접 땔감을 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인도의 사업장에서 시도하고 있는 태양열 발전시설이 가능한지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과서가 없는 학생도 많습니다. 어제 만난 선생님 한 분은 세계지도나 지구본이 있으면 참 좋겠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물질 분야 이외에도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학부모들도 있고, 특히 딸을 둔 가정의 경우에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의 원인을 잘못된 문화에서만 찾으려 해서, 딸을 가진 학부모들을 설득해서 무조건 학교로 보내도록 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닐 것입니다.

딸들이 학업을 마치고 아들보다 더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현실에서 보여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사회 제반 분야의 발전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다양한 부분에서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발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열악한 시설로 인해 여성 교사의 비율이 지극히 낮은 것도 학부모들이 딸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학교 내에 여성 교사들을 위한 각종 복지시설을 개선하여 더 많은 훌륭한 여성교사들이 학교에 남아있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한 지역이 안정된 궤도에 오를 때까지 아주 긴 시간동안 이들과 함께 고민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월드비전은 바로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나라로 치면 군 단위의 규모 지역을 선정한 후, 그 지역의 보건의료와 식량, 교육, 경제발전 등을 위해 적어도 10년에서 15년 동안 지속적으로 지역 주민과 함께 사업을 실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공식에 딴 짓 하던 어린이... "얘야, 나도 지루해"

우리 탐방 팀을 대표해서 부산교육청 교육장이 첫 삽을 뜨고 있다.
▲ 첫 삽 뜨기 우리 탐방 팀을 대표해서 부산교육청 교육장이 첫 삽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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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며 앞으로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다지는 의미로 나무를 심었다.
▲ 나무심기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만남을 기념하며 앞으로의 약속에 대한 신뢰를 다지는 의미로 나무를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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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의 '대단위개발사업'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우리는 또다시 멜리가 학교에 도착했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500여 명은 족히 넘는 학생과 학부형들이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부족어와 영어, 그리고 한국어로 쓰인 인사말이 적힌 큰 종이를 들고서 우리를 환영하고 있었다.

전날 운동회를 열기 전 잠시 인사를 나누었던 바로 그 나무 그늘 밑에서 행사를 시작했다. 부족장 중 한 분이 나와서 영어와 부족어로 통역을 시작했다. 가나 측에서는 가루 템페인 지역 교육장이 서두 인사를 먼저 시작하였고, 한국 측에서 부산교육청 교육정책국장이 이에 답사를 함으로써 '첫 삽 뜨기' 공식 행사가 시작되었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하는 두 번째 만남으로 초대를 받은 학생들은, 밀가루를 뒤집어쓰고 사탕을 문 채 열심히 달리던 전날의 즐거운 운동회만 예상했던 탓인지 기공식 행사에서 조금은 지루해하는 듯 보였다. 급기야 가나 측 교육장이 사전에 준비한 길고 긴 원고를 하나도 빼지 않고 읽는 동안 아이들은 그제야 기공식 행사란 것이 이렇게 따분한 것임을 알아채는 눈치였다.

머리를 긁적거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아이들의 무료한 듯한 표정이 괘씸하게도 나의 눈에는 너무 익살스럽게 보여 찬찬히 아이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러다 흙바닥에서 뒹굴던 조그만 돌멩이를 모아 공기놀이를 하는 한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이 친구는 무슨 잘못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얼른 공기돌을 숨기듯 주먹 속으로 집어넣었다. 야단을 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친구에게 '나도 역시 지루한 것은 마찬가지'라는 신호를 표하고 대신 사진기를 내밀었다.

그러나 공기돌을 만지작거리던 친구와 잡담을 나누려는 사이 이내 지루한 연설이 끝나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교육장도 학부형도 덩실덩실 춤판

먼저 멜리가 학교의 여선생님과 학생들이 부족어로 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의 내용은 '어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부족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노래라고 했다.

경쾌한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던 교육장님들이 드디어 마당으로 뛰어들어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한 부족의 전통노래와 아리랑 장단에 맞춘 어깨춤은 꽤나 어울리는 것 같았다.

계속해서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은 학부형들의 전통춤이 이어졌다. 여성이 두명씩 짝을 이루어 서로 맞은편에서 달려오며 갑자기 허공을 향해 내달린 후 엉덩이를 부딪치며 상대를 쓰러뜨리는 모습이 춤이라기보단 꽤 우스꽝스러운 아이들의 놀이와 같았다. 그러나 공중을 향해 날아오르는 여인들의 화려한 의상은 마치 광채를 내뿜으며 하늘로 오르는 신비스러운 공작새의 자태를 보는 듯 했다.

이어서 아이들의 발목에 주렁주렁 장식품을 매달린 채 무술인 듯 춤인 듯 한 학생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체육선생님의 호각소리에 맞추어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저 장식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은 몇날 동안 밤을 샜을 것을 생각하니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공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소뿔을 머리에 단 채 갑자기 등장해 구경꾼들을 당혹케 한 어른들의 전통 공연도 매우 볼 만 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우리는 간단히 선물 교환식 순서를 가졌다. 가져간 노트와 공책·필기도구·각종 구기종목용 공·과자·시계등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장소를 이동하여, 이 날 프로그램에서 가장 절정에 해당하는 첫 삽 뜨기와 묘목심기를 시작했다. 현지 대표로 군수가 곡괭이를 들었고, 우리 측 대표로는 부산교육청 교육장이 삽을 잡았다.

마침내 학생들을 비롯하여 가나 측 교육청 인사, 각 부족대표, 교장선생님, 교사, 지역 의원 등에 쌓인 채 우리는 학교가 세워질 대상지로 이동하여 흙을 팠다. 그리고 우리가 나눈 약속에 대한 신뢰의 의미로 나무를 심었다.

겨우 손바닥 크기의 작고 어린 나무이지만 이 나무가 자라는 수십년 동안 우리는 멜리가 학교를 바라보고, 지켜보고, 함께 나누며 아이들의 아름다운 성장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학부형을 비롯한 지역사회 여성들의 화려한 공연이 이어졌다.
▲ 여성들의 공연 학부형을 비롯한 지역사회 여성들의 화려한 공연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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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씩 짝을 지어 서로 마주보며 달려가서
 둘씩 짝을 지어 서로 마주보며 달려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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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선생님의 인도로 학생들이 율동을 곁들여 합창을 부르고 있다.
▲ 합창 여선생님의 인도로 학생들이 율동을 곁들여 합창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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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 풀린 마음 공허하구나, 그런데

이제 중요한 순서를 다 마치니, 그동안 나를 조여왔던 긴장이 갑자기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 허탈과 염려가 모락모락 내 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팽팽히 나를 조였던 관념의 근육들이 이완되면서 마음 한 편에 또 그 몹쓸 공허함이 사신처럼 다시 내 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숙소로 들어가 일찍 잠을 청하는 팀원들을 보내드리고 숙소 앞마당에 나와 한참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심은령 선생이 내게로 다가왔다. 심 선생은 은행권에서 일을 하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있던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월드비전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아이보리코스트 산 커피를 내게 건네며 심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차샘. 나 지금 차샘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 한 번 알아맞추어 볼까요?"
"…"

내 표정이 너무 무거웠던 것일까? 나는 무언가 들켜버린 마음에 당황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한 마음에 어서 대답을 해보라는 시늉을 했다.

"음…. 아마 개발사업의 진정한 목적과 방향 그리고 정당성…. 이런 거 맞죠?"
"뭐 그리 어려운 말을 써요? 난 그런 학문 용어는 몰라요!"

나는 심 선생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몰고갈 지 궁금했지만 부러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쉽게 풀어 얘기하면 뭐 이런 거잖아요. 저들은 지금 너무 행복한데 뭐가 필요하지? 차샘의 고민은 아마 여기서부터 시작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심 선생의 이 말에 나는 뭔가 나의 가려운 부분을 시원스레 긁어줄 것 같아, 아무런 대답없이 한번 끝까지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나의 기력이 소진해버린 것을 이미 알아챘는지 심 선생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저개발국가 지원사업에 대한 그녀의 철학을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침묵으로 그녀의 정성스런 설명에 동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명쾌한 대답이 되기에 충분할 것 같았으니까.

"이 곳이 '오래된 미래'라고? 진심이라면 여기 살아야죠"

"차샘 잘 들어봐요. 이상주의는 너무 쉬워요. 극단주의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중심에 있는 사람은 늘 힘들어요. 어쩌면 경계인으로서의 고민이라고 해야할까요. 이런 말 들어보셨죠?

이 곳 사람들 몇 번 보고 이 곳을 '패러다이스'로 여기는 것 역시 알고 보면 정말 무책임하죠. 가난하고 외딴 지역을 몇 번 다녀와서 몽환적인 사진과 함께 그곳을 아무도 손 대면 안될 그런 무진한 희망의 땅으로 묘사하는 사람들. 차샘은 그거 어떻게 생각해요? 전 그것 역시 어쩌면 너무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가 생각해요. 아니면 자기 기만일 수도 있고요."

정말 그 곳을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왜 그 곳에 가서 평생을 살지 않는대? 그곳이 정말 희망만이 가득한 땅이고, 이상적인 나라라면. 그 곳이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진심으로 생각한다면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들을 다 설득해서 당장 그 곳으로 가서 안빈낙도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이치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도시문명으로 와서 사진을 인쇄하고 멋들어진 말을 곁들이죠. 본능적으로 어딘가 이 곳보다는 더 나은 뭔가를 바라게 되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출품한 사진집이나 여행집을 보면서 그냥 상상에만 잠기는 거고요.

전 그 사람이 그 지역에 들어가서 살면서 그 곳이 역시 '오래된 미래'라고 계속 말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수십년은 살아보면서 말이죠. 그렇지 않고 그의 삶과 괴리된 채 나오는 호사스런 말이라면 전 믿지 않아요. 그런 화려한 말들을.

은행권에서 근무를 하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 해외아동지원 사업을 하는 월드비전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 월드비전 직원 심은령 간사 은행권에서 근무를 하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 해외아동지원 사업을 하는 월드비전에 청춘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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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상주의자·극단주의자들은 정말 쉬운 인생을 사는 거예요. 이상주의적 문학가들이나 극단적인 논객들은 차라리 속 편하죠. '개발은 침략이다'고. 이렇게 말만 하면 되거든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진행하는 특정 기업가와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뭔가 해보려는 시도조차도 그냥 본질적으로 다 똑같은 침략으로 바라보면 속 편하죠! 너무 명쾌하니까.

하지만 보세요. 잘 알잖아요. 서아프리카에서 매우 안정된 나라인 가나만 해도 보세요. 말라리아가 전체 사망 원인 중 40%가 넘죠? 그들은 평생 모기장이란 것도 모르고 모기약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죽어가요. 모기! 단지 모기 때문에 죽어가요. 그리고 설사가 아동들의 주요 사망 원인이에요!

거기에 가나정부도 아직 해결하지 못해 끙끙 앓고만 있는 기니아 웜이란 기생충은 어때요? 더러운 물을 잘못 마셔서 충이 아이들 몸속으로 그것이 성충으로 자란 후 아이들의 살을 찢으면서 밖으로 튀어나오면 아이들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죽어가죠. 이런 충격적인 모습을 보면서도 이곳을 가만 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어요? 그것조차도 조화로운 자연현상으로만 보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런 이상주의자들의 아들 딸들이 그런 병에 걸린다면? 마실 물이 없어서 진흙탕물을 마시면서 그런 몹쓸 기생충에 감염되어 죽어간대도 이상을 노래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이상주의자나 극단주의자의 길은 가장 어려운 게 아니고, 되레 너무 손쉬운 선택이라는 거예요."

"이상주의자들은 과연 중간에 위태롭게 서있는 자의 괴로움을 알까요?"

가장 힘든 길은 뭔지 알아요? 아이러니하죠. 이상주의자들은 과연 중간에 위태롭게 서있는 자의 괴로움을 알까? 이것과 저것이 극단적으로 맞물리는 상황에서 둘 사이의 그 살얼음같은 긴장을 놓치지 않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경계에 서있는 사람이 사실은 제일 외로워요. 왜냐? 사람들이 별로 지지하지 않거든요. 사람들은 색깔이 확실한 사람을 원하고, 뭔가 확실한 주장, 극렬한 주장이 늘 먹히는 법이죠. 그래서 흑이든 백이든 대부분 지지자들은 그런 일방적인 주의에 귀를 기울이고, 그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은 마치 길을 몰라 서성대는 어리석은 바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전 바로 그 경계에 서있는 자가 가장 해답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반드시 경계에 서 있어야 해요. 왜냐구요? 경계에 서있는 사람은 늘 아파해야 하고, 상처받아야 하고 고민해야 하니까!

그게 정답이거든요. 그곳에 머물러 주는 것. 개발을 '한다, 안 한다', '개발이 필요하다, 안필요하다'가 아니에요. 그것은 자신이 그곳에 머무르며 그들과 삶을 공유해보면 알게 돼요. 개발 찬성론자든 반대론자든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 평생을 그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답이 보일 수밖에 없죠.

사랑이란 어설픈 문자적 고백이 아니에요. 저는 사랑이란, 자신의 인생을 던지고 책임질 수 있느냐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가난한 이들을 사랑한다고요? 자신의 인생을 걸 수 있나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나요?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그들을 책임질 수 있나요? 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이 '예'라고 대답을 못 한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건 절대 사랑이 아니예요. 왜냐하면 사랑이란 죽을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것이니까요."  

야외 수업을 받고있는 초등학교 학생들(교실부족으로 인해 야외 수업은 건기 내내 이루어진다.)
▲ 야외 수업 야외 수업을 받고있는 초등학교 학생들(교실부족으로 인해 야외 수업은 건기 내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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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받고 있는 중학교 학생들
▲ 수업 도중 수업을 받고 있는 중학교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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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긴 호흡이 필요해

개발에서 시작된 그녀의 강론은 사랑에서 매듭을 지었다. 개발과 사랑?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짧은 말 속에, 평생을 바치고 함께 있어주어야할 오랜 기다림이 내재되어 있었다니, 이제껏 안개처럼 뿌옇던 내 가슴 속에 뭔가 희미한 형체가 드디어 나타나는 듯 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강의노트에 정연하고 빽빽하게 적혀진 개발과 보존에 대한 다이어그램도 아니었고, 언어의 유희에 자족해하는 몽상가의 꿈도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희로애락과 동일한 파동을 그으며 진동하는 내 온몸 세포의 숨소리에 순종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물었을 때 나는 당당히 '예'라고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멀고 먼 그 산이 있는 방향으로 내 발걸음 하나를 또 다시 옮겨놓을 뿐이다. 정말 긴 호흡의 시작이다.

주① 지금까지 가나 노정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계속 아프리카 방문이 계획되어있습니다. 많이 추상적이던 그간의 내용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가나와 관련한 다음 번 글에서는 사회·문화·역사 등 구체적인 부분으로 좀 더 세밀하게 다루어볼까 합니다.

주② 또한 지역개발사업은 보통 10년에서 15년을 계획하여 그 지역의 보건의료·교육·식수·농업·식량·경제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개발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가나의 해당 지역이 향후 10년 동안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 천천히 보게 되실 것입니다. 사진 속에서 본 이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보시는 것도 흐믓한 시간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주③ 가나는 아프리카에서 아주 모범적인 나라에 속합니다. 정치적인 안정, 경제적인 발전 면에서도 그렇고 낮은 부패지수와 교육에 대한 정부의 높은 관심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가장 친절하고 착한 사람들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많은 긍정적인 면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조금 편안하게 가나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를 맡고 있는 동료들의 사업장을 보면 이런 관념적 여유를 누리는 것이 사치라고 할 정도로 급박하게 상황이 전개되는 곳이 아주 많습니다. 일례로 저와 비슷하게 지난 2월 수단을 방문한 동료직원의 보고에 의하면 내전이 있었던 수단 남부 지역은 지독히도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기록한 가나는 결코 전체 아프리카의 상황을 대변할 수 없음을 재차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향후 저의 기사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나의 다양한 면을 함께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서아프리카 국가에 대해서도 방문이 진행되는 대로 <오마이뉴스> 식구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돌아오기 전, 가슴속에 가득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해답은 오늘 하루의 발걸음이었습니다.
▲ 가나에서 돌아오기 전, 가슴속에 가득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해답은 오늘 하루의 발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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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가나, #볼가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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