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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책으로 보고, 말로 들어도 나쁘지 않지만, 몸을 움직여서 우리 두 발로 땅을 디디며 맛보는 골목길 삶터는 사뭇 다르리라 느끼면서 '우리 동네 마실'을 합니다.
▲ 동네 마실 다닐 사람들 책으로 보고, 말로 들어도 나쁘지 않지만, 몸을 움직여서 우리 두 발로 땅을 디디며 맛보는 골목길 삶터는 사뭇 다르리라 느끼면서 '우리 동네 마실'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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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 몇 사람이 뚤레뚤레 모입니다.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아오는 인천 배다리 한켠이지만,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 발자취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돌아보면 깜깜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가 아는 만큼이라도 서로 나누어 보자는 뜻에서 ‘우리 동네 마실’을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2월 20일 낮, 올해 들어 두 번째 나들이를 합니다. 먼저, 배다리 헌책방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시 다락방〉에서 언손과 언몸을 녹입니다.

신포시장에서 떡집을 하고 있는 이씨 아저씨가 동네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줍니다. 떡집 아저씨(떡집 사장님이라고 해야 좋아하지만, 그냥 아저씨라고 하고 싶습니다)는 이 골목이 예전에는 어떤 저잣거리였는가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 동구청 자리가 60년대까지 짐승잡는 곳(도축장)이었다는 이야기, 일제강점기 때 소 한 마리 잡는 값이 얼마였는가 당신 부모님한테 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우리한테 건네줍니다.

그런 뒤 요사이 떡집 바쁜 일이 몰려서 당신 일터로 돌아가시고, 우리들은 영화여상 국어교사인 또다른 이씨 아저씨가 앞장서는 걸음에 맞추어 골목길을 걷습니다.

걷는 길에 ‘인천시 정부가 밀어붙이려 하는 산업도로 예정터’ 옆을 지납니다. 과일집이지만 가게 앞에 온갖 꽃그릇을 잔뜩 내어놓고 있는 할머니 과일집 옆을 지납니다. 지금 같은 아스팔트 길이 나기 앞서는 조그마한 골목길이었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석축을 봅니다.

동구청 안으로 들어갑니다. 안쪽에는 ‘옛 도축장에서 죽은 짐승들 넋을 기리는 돌’이 조그맣게 서 있습니다. 기림돌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눕니다. 동구청 옆 새로 지은 청사 건물을 보며 금곡동 안쪽을 걷습니다.

맨션 사이에 버티고 있는 옛 서민집 옆을 지납니다. 이 집 앞에는 크고작은 꽃그릇이 스물쯤 놓여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곧 봄인데, 봄날을 맞이하면 이 꽃그릇에 얼마나 싱그러움이 묻어날까 궁금합니다.

창문이 조금만 더 크면, 이 창문으로 해서 학교를 다닐 수도 있겠습니다.
▲ 학교 옆 골목집 창문이 조금만 더 크면, 이 창문으로 해서 학교를 다닐 수도 있겠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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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초등학교로 들어갑니다. 초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골목집이 한 채 두 채 세 채 …… 잇달아 붙어 있습니다. 운동장 끄트머리 수도가 옆에 있는 집.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어? 담벼락이 없네. 담벼락 없이 그냥 골목집이 바싹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날 이 골목집에 살던 아이는 이 학교로도 다녔을까?

제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그때 학교 울타리를 따라 붙어 있던 집에 살던 아이는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습니다. 낮밥 때가 되면 쪼르르 학교 울타리로 달려가 울타리 너머 자기 집 창문으로 어머니를 부르고, 따끈따끈한 밥을 냉큼 받아서 교실로 돌어와서 먹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녀석은 가방이 가볍지만, 이 녀석네는 하루 내내 시끄러움에 시달립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며 노는가요. 조잘조잘 재잘재잘 왁자지껄.

지난번 ‘우리 동네 마실’ 때에는 동명초등학교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듭니다. 조금 걸으니 삼익아파트가 나옵니다. 이제 서른 해를 넘겼음직한 삼익아파트. 아파트 꽃밭 키큰나무 둥치에 ‘버려진 자전거’ 여섯 대가 쇠사슬로 묶여 있습니다. 녹슬고 먼지 소복히 앉고.

이 자전거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버려질까요.
▲ 버려진 자전거 이 자전거들은 어찌하여 이렇게 버려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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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뒤 큰길. 건널목을 건너 송림동. 우리들은 오른쪽 골목 안쪽으로 들어갑니다. 동구 청소년수련관 앞에 섭니다. 우리를 이끄는 선생님인 이씨 아저씨가 부지런히 지난날 자취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당 신부님을 비롯해서 당신들이 어릴 적 이 동네에서 무엇을 보고 어떻게 뛰어놀거나 일하며 살았는가를 풀어놓습니다.

이제는 재개발과 재생사업에 쓸려서 곧 사라질 ‘송림시장’ 빈터를 봅니다. 빈 시장길 바깥쪽, 주택가 안쪽 골목에는 1950년대에 지어진 2층짜리 집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바깥벽을 벽돌로 차곡차곡 쌓은 옛집.

우리 옆지기는 이와 같은 인천 골목집을 보면서 ‘여기는 딴 세상 같다’는 말을 곧잘 합니다. ‘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곳 같다’고도 합니다. 드문드문 간판 바뀐 집이 있지만, 퍽 많은 곳은 50년대 자취가, 60년대 자취가, 또 70년대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동구 청소년수련관 앞에 교회 하나 있습니다. 이 교회는 해방 앞뒤로 한경직 목사가 북녘에서 내려와 인천에서 터를 잡으며 세운 교회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당신은 교회 일곱 곳을 세울 꿈을 꾸었는데, 제1교회와 제2교회와 제3교회까지는 세웠지만, 더 세우지 못하고 서울로 갔다고. 왜 ‘제1’과 ‘제2’ 교회라는 이름이 붙었는가 하는 궁금함이 풀립니다.

이제는 더 극장 노릇을 안 하는 옛 현대극장 앞에 섭니다. 그래도 극장 간판은 그대로 있군요. 동인천역 뒤편 오성극장과 미림극장도 극장 노릇은 안 합니다만, 극장 간판은 아직 그대로 있어요. 이 둘레에서 머뭇머뭇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성당 신자 한 분이 신부님을 알아보더니 얼른 튀밥을 사 와서 신부님한테 안깁니다.

인천 동부시장 한켠에 서 있는 50년대 첫머리 때 건물. 그때 이만한 건물을 짓자면 제법 돈이 들었을 테고, '있는' 집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쓸어내고 더 높은 상가 건물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만.
▲ 동부시장(현대시장) 인천 동부시장 한켠에 서 있는 50년대 첫머리 때 건물. 그때 이만한 건물을 짓자면 제법 돈이 들었을 테고, '있는' 집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하루빨리 쓸어내고 더 높은 상가 건물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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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오르며 우리 동네 이야기를 합니다. 달동네 박물관은 모두들 여러 차례 찾아왔기에 지나치기로 합니다. 언덕길 계단을 밟고 솔빛주공아파트 사이를 지나서 내려옵니다. 송현시장에 닿습니다. 떡집 아저씨를 다시 만납니다. 그 사이에 일을 마치고 나오셨습니다. 이번에는 어디로 갈까?

떡집 아저씨는 “함세덕 선생 생가를 본 적 있나?” 하면서 우리들을 이끕니다. 함세덕. 누구지? 저로서는 낯선 이름이지만, 일제강점기와 1950년 한국전쟁 때까지 나라안에 이름을 드날리던 극작가라고 합니다. 1950년에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참말 그때 죽었는지 또는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고 하는데 ….

동인천역 뒤편, 예전에 나룻배가 드나들던 다리 자취가 둘 남아 있는 곳에서 안쪽 골목으로 갑니다. 골목집으로 들어온 떡집 아저씨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대면서, “자, 조용히 들어가서 보라고” 하며 파란 쇠문을 살살 밉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아직도 예전 기와집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인천시에서 이곳이 함세덕 선생 생가인 줄 알면서 시 돈으로 사들여서 문화복원을 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함세덕 선생 남은 식구가 남녘에 없기도 하다지만, 이 집은 지금 소주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집, 함세덕 선생 생가를 조용히 둘러보고 나서 골목길 한쪽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소주집 분, 또는 지금 이 집에 살고 있는 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와서 기웃기웃 우리를 쳐다보고는 다시 집안으로 들어갑니다.

'소주방' 간판이 있는 바로 옆 파란대문이 함세덕 선생 생가입니다. 지금은 소주집입니다.
▲ 함세덕 선생 생가 '소주방' 간판이 있는 바로 옆 파란대문이 함세덕 선생 생가입니다. 지금은 소주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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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을 옮깁니다. 이른바 ‘세수대야 냉면 거리’로 알려져 있는 화평동 골목길입니다. 지난날 이곳은 ‘냉면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인천시 정책에 따라서 냉면집 건너편에 있던 색시집은 모두 철거되었고, 몇 군데 냉면집이 새로 생기고, 시에서 적잖은 돈을 들여서 ‘냉면 거리 조형물’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냉면 거리로? 떡집 아저씨는 어느 냉면집 주차장으로 들어가더니, “하하, 아직도 그때(옛날) 자취가 그대로 있네. 이것 좀 봐, 이 창문을” 하면서 주차장 울타리 안쪽에 가려져 있는 빨간 벽돌집을 가리킵니다.

빨간 벽돌집 옆으로 길게 걸개천이 걸려 있습니다. 뭔 걸개천일까 하며 들여다보니, '평안수채화의 집'이라는 글월과 수채화 몇 점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밑으로는, “http://ilovegrandmother.com”이라는 인터넷방 주소도 적혀 있군요. “내 사랑 할머니”? 뭔가?

박정희 할머님이 꾸려가는 수채화 집. 이곳은 옛날에는 병원으로 쓰였습니다.
▲ 평안수채화의 집 박정희 할머님이 꾸려가는 수채화 집. 이곳은 옛날에는 병원으로 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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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합니다. 아, 그렇구나. 이 집이 그 집?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평안수채화의 집〉 주인장인 할머니 방에 찾아가 봅니다.

한글로 곱게 새겨진 이름패가 붙은 조그마한 골목집입니다.
▲ 박정희 할머님 집 한글로 곱게 새겨진 이름패가 붙은 조그마한 골목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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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인 1923년, 한글점자 창안자 송암 박두성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난 박정희 할머니. 언제나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정희 할머니는 경성 여자사범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인천 제2송림보통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1944년 평양의전 출신 내ㆍ소아과 의사 유영호와 결혼, 평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슬하에 4녀1남을 두었다.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친정이 있는 인천 율목동에서 6ㆍ25를 겪었고 1ㆍ4후퇴 때는 남쪽으로 내려온 시댁 식구들과 함께 23명의 대식구를 모시고 살았다.

남편이 1949년 현재의 자리(인천시 화평동)에 평안의원을 개업했고  1952년∼63년 사이에 아이들을 보살피는 알뜰한 마음으로 육아일기를 집필 제작했다.

박정희 할머니는 20여 년 간 유치원 원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현재도 지난해 여든셋 나이로 현역에서 은퇴한 남편과 함께 단출하게 살면서 그림 지도, 육아일기 강좌 등 바쁘고 즐거운 노년을 꾸미고 있다.

한국수채화 협회 공모전에 수차 입ㆍ특선을 할 정도로 다채로운 화가 경력을 갖고 있는 박정희 할머니는 여러 차례의 개인전을 비롯해 현역 수채화가인 큰딸 명애와 수채화 모녀전을 갖기도 했으며 현재도 붓을 놓지 않고 있다. 박정희 할머니는 지난 1997년 장애인의 날에 맹인들을 도운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도 있다 ..  (박정희 할머님 해적이)

아이고야. 저도 코앞은 볼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화평동은 국민학교 적부터 요사이까지 뻔질나게 지나가던 골목 가운데 하나인데, 그동안 이곳, 〈평안수채화의 집〉은 한 번도 못 보았으니까요. 더욱이, 박정희 할머님 이야기를 1998년에 처음 듣고서 열 해가 넘도록, 할머님 집이 이렇게 찾기 쉬운 골목 한켠에 있음을 여태 몰랐습니다.

여든다섯 나이에도 야무지게 살아가시는 박정희 할머님은, 당신 살던 옛집을 손수 추슬러서 고운 전시관으로 꾸미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여든다섯 할머님 여든다섯 나이에도 야무지게 살아가시는 박정희 할머님은, 당신 살던 옛집을 손수 추슬러서 고운 전시관으로 꾸미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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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평안수채화의 집〉 왼편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이 골목 안쪽에는 박정희 할머님이 지난 긴 세월 동안 ‘스물셋이나 되는 큰식구’가 옹기종기 모여살던 조그마한 집(참말 작습니다. 그런데 이 집에 스물셋이나 살았다니)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할머님은 말합니다.

“시에서 재개발 재개발 하는데, 난 이 집 못 팔아. 이 집을 어떻게 팔아?”
“할머니, 이 집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내가 고쳐서 이 집에다가 전시관을 꾸며야지.”

생각해 보면, 박정희 할머님이 꾸며야 할 ‘전시관’은 여럿입니다. 먼저 당신 아버님이 일제강점기 서슬퍼런 때에 꿋꿋하게 ‘한글 점글’을 만들어 낸 자국을 되짚으며 되살려 놓는 일. 다음으로 할머님 당신이 수채화를 그려 온 삶. 그리고, 아이들을 돌보고 키우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를 그러모은 육아일기. 여기에, 할머님 당신과 당신 식구들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남겼던 온갖 물건들을 그러모으는 ‘생활문화역사’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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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할머님은 당신 일터인 〈평안수채화의 집〉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들어갑니다. 수채화 집은 지난날 당신 지아비가 병원을 꾸려가던 자리. 이제는 병원은 안 하고 터만 남았습니다. 할머님은 이 터를 깨끗하게 간수하면서 어느 것 하나 함부로 건드리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예전 모습이 하나하나 살아 있습니다.

문가 ‘샷다’부터, 안쪽 ‘불을 다룰 때는 자리를 지킵시다’라는 경보단추 푯말까지. 나들간 신발장에는 옛날 꼬맹이들이 붙여놓았음직한 판박이가 여태 고이 붙어 있습니다. 문지방 둘레에는 할머님이 그린 수채화를 자르고 코팅하여 붙였네요.

지난날에는 병원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수채화 집으로 새숨을 이어받았습니다.
▲ 옛 병원, 지금은 수채화 집 지난날에는 병원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수채화 집으로 새숨을 이어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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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진료실 자리로 들어가니 두 분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창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데 난데없이 한 떼거지 손님이라니! 죄송합니다. ‘곧 갈 때가 되어서 간다’고 합니다만, 우리들 때문에 좀더 느긋하게 그림을 즐기지 못하셨습니다.

할머님이 지내는 방에 예닐곱 사람이 옹크리고 앉습니다. 할머님은 당신 예전 자취를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면서, “그런 기록들을 어떻게 없애?” 하고 말씀합니다.

“난 지금부터 할 게 많아서 일찍 죽을 수 없어 … 집이 ‘넓어서’ 안 버리고 있었지… 이걸 누가 귀중한 줄 알아. 다 버리지… 기록을 다 하려면 죽을 때까지 바쁠 거잖아… (당신 어머님 옛 사진을 보여주면서)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늙어갔어. 그 (긴)머리를 다 집어치우고(잘라버리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서….”

할머님은 문득 손가방 하나를 들더니, “난 이거 버리지 못해. 내가 만들어도 내가 감탄해.” 하고 말합니다. 이거 하랴 저거 하랴 바쁜 가운데에도 당신이 쓸 손가방을 ‘남는 천쪼가리 모아서’ 꿰매어 가방 하나 만들었다면서.

손수 꾸며 놓으신 할머님 방 천장 무늬.
▲ 천장 무늬 손수 꾸며 놓으신 할머님 방 천장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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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이 그렇게 쏟아졌어도 살아남았잖아? 그러니 오늘은 폭격이 없네 하면서 (일기를) 썼지. (그렇게 해서 여태껏 살아남았으니) 빚 진 게 많아서 (일찍 죽을 수 없어)… 도적놈이 들어와서 이 집 좀 (옛날에 잘) 살았구나 살펴보아도 돈은 없어… 꺼져가는 늙은이한테 ….”

할머님은 당신 옛이야기를 하면서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옆에서 듣는 사람 눈에도 빙그르르 눈물이 맺힙니다.

그러는 동안 옆지기가 저를 부르더니 ‘저 달력 그림 좀 보라’고 합니다.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해서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봅니다. 음, 그러네요. 달력에 붙은 그림이 ‘달력 그림이 아닙’니다. 할머님이 손수 그린 수채화를 달력에 새겨진 그림 자리에 턱 하고 붙였습니다.

옆지기가 천장도 보라고 손으로 가리킵니다. 아, 천장도 여느 천장이 아닙니다. 할머님이 온갖 빛깔 종이를 고루 붙였습니다. “내가 이거(코팅기)까지 사 놓고 손수 다 한다고” 하면서, 당신이 받은 편지, 당신이 살아오며 당신 손을 거쳤던 종이 들을 코팅으로 하나하나 해 놓았다고 합니다.

할머님이 그린 수채화 한 점을 아무 미련 없이 철썩 붙여놓은 달력.
▲ 할머님 달력 할머님이 그린 수채화 한 점을 아무 미련 없이 철썩 붙여놓은 달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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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수채화의 집〉에서 나옵니다. 너무 오래 할머님을 붙잡고 있을 수 없습니다. 동인천 먹자골목으로 가서 밥집 한 군데로 들어갑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습니다. 그러고는 헤어져서 모두 자기 길로 갑니다. 우리도 우리 길을 걸으며 집으로 갑니다. 어둠이 내린 골목을 걸어 집에 닿습니다. 잠깐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 두 권을 뽑아듭니다. 하나는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한국방송출판,2001), 하나는 《나의 수채화 인생》(미다스북스,2005).

옆지기한테 《박정희 할머니의 육아일기》를 건넵니다. 저는 《나의 수채화 인생》을 펼칩니다. 세 해 앞서 한 번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을 생각입니다. 세 해 앞서는 박정희 할머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 보지 못한 가운데 읽은 책이었지만, 이번에 다시 읽을 책은 할머님 삶과 집과 일터와 눈물을 함께 부대끼고 나서 읽을 책입니다.

여든다섯 해를 쉼없이 달려온 당신 손. "한국전쟁 폭격 때 용하게 살아남았음은, 당신이 죽어 사라진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빚"으로 여기면서 여태껏 몸과 마음 튼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 할머님 손 여든다섯 해를 쉼없이 달려온 당신 손. "한국전쟁 폭격 때 용하게 살아남았음은, 당신이 죽어 사라진 이보다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빚"으로 여기면서 여태껏 몸과 마음 튼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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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 위쪽에 붙어 있는 판박이와 스티커는 누가누가 붙였을까요. 오랜 세월 고이고이 살아가는 할머님 벗입니다.
▲ 문간 판박이와 스티커는... 문간 위쪽에 붙어 있는 판박이와 스티커는 누가누가 붙였을까요. 오랜 세월 고이고이 살아가는 할머님 벗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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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릅니다. 당신 삶을, 당신 눈물을, 또 당신 웃음을 우리한테 한 올 한 올 물려주면서 우리한테 '살아갈 희망'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 할머님 이야기 할머님 이야기는 그칠 줄 모릅니다. 당신 삶을, 당신 눈물을, 또 당신 웃음을 우리한테 한 올 한 올 물려주면서 우리한테 '살아갈 희망'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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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d.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골목길+책+헌책방+우리 말 이야기 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박정희, #수채화, #평안수채화의 집, #인천,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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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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