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2월 18일 오후 5시 30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쿠바의 아바나 혁명광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마감하고 있다. 중앙에 높게 치솟은 깃대에 매달려 종일 나부끼던 국기가 내려오고, 내무성 벽면에 장식된 체 게바라의 베레모 별을 시작으로 혁명탑과 국가영웅 호세 마르티 석상에 하나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제와 동일하다. 그러나 혁명탑 뒤편에 자리잡은 국가평의회 건물을 둘러싼 군인들의 경계 태세만은 평소와 사뭇 다르다. 건물을 멀찍이 두고 그려진 경계선으로 조금만 다가가도 호각을 불고, 물러나라고 손짓을 한다. 국가평의회 건물은 최고사령관 피델 카스트로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다. 근처에서 얼쩡거리면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기대를 오늘도 접어야만 했다.

CNN 뉴스로 접한 피델 사임 발표

그 시각 세계를 놀라게 만든 핫뉴스가 바로 그 광장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늦은 저녁 숙소에서 CNN뉴스를 접하면서다. '피델의 사임발표'. 피델의 발표시각에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아무런 귀띔을 해주지 않고 매몰차게 몰아친 경비병에게 괜한 아쉬움과 섭섭함이 남는다. 그러나 뒤에 안 사실이지만, 이번 발표는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작스레 이뤄진 것이라 웬만한 고위 공직자들도 뉴스를 통해서야 소식을 접했다고 하니 경비병을 탓할 것은 못 된다.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피델의 발표 요지는 간단하다. 병들고 노쇠하여 더 이상 국가수반의 역할을 할 수 없으니 2월 24일에 있을 최고사령관, 국가평의회 의장 선임 때 자신을 재신임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특별할 것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쿠바인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충분히 예상하던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번 발표가 특별하게 취급되고 세계적인 빅 뉴스가 되는 것은 내용보다 그 의미, 쿠바를 둘러싼 변화의 기대 때문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강철보다 강한 신념으로 미국과 40년이 넘도록 격렬하게 대립했던 고집불통 영감의 은퇴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임기가 불과 몇 개월 남지 않은 부시 대통령은 '피델이 물러나더라도 쿠바에 대한 봉쇄정책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완고한 태도를 거듭 밝혔고, 본격 대선전에 돌입한 유력 후보 힐러리와 오바마 등의 견해 발표도 뒤를 이었다.

CNN은 피델 발표와 관련하여 런던 대학의 전문가 등의 입을 통해 향후 전망을 반복 방송하고 있다. 직접 언급은 않더라도 대부분의 내용은 피델 한 사람의 지도력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나라이므로 2인자인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이어받더라도 조만간 국민적 욕구 폭발로 붕괴되거나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될 것이라는, 다분히 희망 섞인 기대가 바탕에 깔려있다.

사실 이런 해석이 전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미국의 강력한 봉쇄정책이 50년 가까이 유지되었고, 소련 붕괴 이후 1990년대부터 급격한 경제적 쇠락으로 고통을 받아온 것이 십수년이다.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국민적 불만에 대한 가장 강력한 컨트롤러가 피델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피델의 발표 다음날 만난 20대 중반의 시가공장 노동자 곤잘레스는 "쿠바 시스템도, 피델도 미친 상태"라고 분노에 찬 비난을 퍼부었다. 그래도 라울이 뒤를 이으면 실용적인 정책을 펴서 사정이 훨씬 나아지지 않겠냐는 대꾸에 "라울도 피델과 함께 혁명을 이룬 1세대이고, 지금까지 피델과 함께 똑같이 권력을 행사한 사람"이라며 그에게도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차갑게 말꼬리를 자른다.

쿠바 동부 끝에 있는 제2도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 초등학교 교사와 디스코텍 디제이 일을 하는 카를로스(33)도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직장이 있어도 쿠바의 이중화폐(CUC라는 화폐를 사용하는 달러경제와 달러가치의 1/24에 이르는 페소시장 분할경제체제, 페소로 급여를 받는 쿠바인들은 급여만으로는 충분한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 체제 때문에 생필품을 구입할 수가 없다"고 생활고를 토로했었다.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하나의 직업으로는 웬만한 소비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며 3가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지방도시 카마구웨이의 화가 베니(35)도 몇 년째 고장난 컴퓨터를 수리할 수 없어서 곤란을 겪고 있다고 했다. 3개 직업에서 받는 급여를 몇 년 동안 한 푼 쓰지 않고 모아야 100만원대 컴퓨터를 살 수 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나 자신이 그린 그림을 정부 몰래 관광객에게 고가의 달러를 받고 팔 수 있다면 컴퓨터를 살 수 있는 것이 쿠바경제라며 불합리를 지적한다.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더라도 자본주의가 좋은 사회'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로 쿠바에 대한 그의 불신은 이미 깊을 대로 깊어졌다. 1990년 이후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거의 보수공사와 개량을 하지 못해 부서지거나 철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아바나의 모습은 궁핍한 쿠바인의 현재를 상징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럼 쿠바인의 불만을 억누르던 피델이라는 제방이 무너지면 쿠바는 곧바로 폭발할 운명일까.

카스트로 사임, 쿠바인들에게 물었더니

피델의 발표가 있은 다음날 시민들의 반응이 궁금하여 아침 일찍 거리로 나섰다. 아바나의 상징 말레콘 해변에는 이미 미국 NBC 뉴스팀이 방송차량을 동원하여 여기저기를 촬영하고 있었다. 카메라 주위에 '내 귀에 도청장치가 되어있다'고 하루 종일 소리치는 사람이 맴돌고 있는데 졸지에 대표시민이 되어 화면에 등장할까 괜히 불안하다.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언제 어느 때나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아바나 중심의 센트럴 파크로 가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피델의 게릴라군이 처음 쿠바에 상륙할 때 탄 보트 이름)'를 하나 사서 1면 전면에 나온 피델의 발표 내용을 확인했다.

발표 말미에 평소와 달리 'Comandante(사령관)'이란 직책을 생략한 채 '피델 카스트로 루즈'라고만 서명된 것을 보는 순간, 피델 발표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직접 당사자인 쿠바인들에게 피델의 은퇴는 어떤 의미일까.

벤치 곳곳에선 굳은 얼굴로 신문과 그란마를 읽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로 옆에선 일군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며 격한 언쟁을 하고 있었다. 평소에 주의깊게 살펴보지 않은 때문일까? 지금까지 쿠바에서 이렇게 서로 삿대질까지 하면서 논쟁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옆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에게 무슨 일로 싸우는 건지 물어보았다. 전날 있었던 야구경기 때문이라고 한다. 약간은 허탈했지만 그것이 쿠바인의 솔직한 모습이다. 그들에게 피델의 은퇴는 당연한 것이고 자기가 응원하는 야구팀의 선수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보다 특별한 것이 전혀 아니다. 미국 언론의 전망과 달리 당분간 피델의 은퇴를 이유로 급격하게 국민들이 불만을 폭발시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공산당원이면서 전직 외교관 출신으로서 쿠바의 현실과 세계정세에 밝은 앙헬(52)의 설명은 쿠바 국민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쿠바인들 중에 피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회주의와 피델의 기본적인 정신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피델을 아버지처럼 존경한다. 하지만 피델의 은퇴는 쿠바의 미래를 위해 좋은 일이다. 그가 병고로 은퇴한다는 사실은 가슴 아프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피델의 정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의 은퇴가 잘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되는 논리가 아닌가? 그가 얘기하는 피델의 정신과 정책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옳다. 그것이 피델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회주의에 따라 세계혁명을 이루고 국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은 당연히 옳은 일이다. 그러나 쿠바가 굶으면서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것은 현실에 맞는 것이 아니다."

그는 쿠바국민에게 보급하려고 중국으로부터 값싸게 지원받은 컬러TV를 베네주엘라의 문맹퇴치 운동 지원을 위해 베네주엘라로 보낸 것, 쿠바 에너지 혁명 시기에 중국으로부터 형광등을 지원받아 놓고는 전력난에 허덕이는 북한으로 상당수를 보내준 것, 쿠바 의료인력이 모라자면서도 외국에 쿠바 의사를 수천명 파견하는 것 등을 그 예로 들었다.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피델의 이상은 옳지만 쿠바의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 말의 요지이다. 그러면서 피델의 뒤를 이을 라울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크다.

"라울에겐 피델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라울은 피델처럼 독단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쿠바의 현실, 쿠바인의 불만을 읽고 정책을 결정한다. 수십년 동안 쿠바는 혁명을 하면서 너무 지쳤다. 국민들이 느끼는 혁명 피로감을 정책결정자가 알아야 한다. 쿠바의 현실을 바로 보고 쿠바인의 생활을 나아지게 하는 정책을 핀다면 쿠바는 새로운 사회의 이상형이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생각을 쿠바인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앙헬과 같은 당원이나 공직자들만의 생각은 아닐까? 그는 지난 1월 중순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를 예로 들면서 쿠바국민들 대다수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선거에서 라울은 99%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피델을 비난하더라도 그를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도 했다.

낮에는 중학교 교사, 저녁에는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는 펠리피토(20)의 말에서 앙헬의 설명이 상당히 타당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침에 친구가 보낸 메시지로 피델의 은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중학생들에게 피델의 발표문을 읽어주고 서로 얘기를 나눴다. 건강문제 때문에 어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고사령관직은 유지해야 한다는 얘기들이 많았다."

ⓒ 송호창

관련사진보기


입시문제 외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한국 중학생으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얘기들이 오간 모양이다. 그저 연애나 놀이에만 전념하는 줄 알았더니 사회문제, 정치문제에 대한 뚜렷한 자기 관점이 있었다. 펠리피토와 동거 중인 여자친구 브렌다도 동일한 주장을 편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피델이 국가수반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이상하고 불안할 것 같다. 그러나 쿠바가 변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금 큰 변화를 만들지 못하면 쿠바는 끝장날 수도 있다. 그 변화를 위해서라면 피델이 은퇴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이 쿠바 젊은이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특히 밤거리를 술과 시가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관광객을 상대로 달러를 벌려고 혈안이 된 젊은이들을 떠올리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 펠리피토가 확답을 주었다.

"젊은 세대가 정치에 대해 많이 관심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쿠바가 라틴 아메리카의 혁명을 선도하고 있고, 다른 나라를 지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없다. 그 혁명에 젊은 세대가 함께하고 있고, 뒤를 이어 계속할 것이란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카스트로 사임은 당연"... 라울 개혁에 주목하는 쿠바인

쿠바는 현재 급격한 변화의 요구 앞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피델의 은퇴를 계기로 한 쿠바인들의 반응을 통해 그 변화의 방향을 점쳐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다양한 직업, 나이, 지역의 사람들을 접했지만, 이들이 쿠바인을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제한된 인터뷰어들의 이야기를 일반화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 속에 들어있는 공통점으로 최소한 미국 언론이 희망하는 결과로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피델이 쿠바인들에겐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그의 은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은퇴를 이유로 폭동이 일어나거나 급격하게 불만이 터져 나올 가능성은 낮다. 오히려 라울로 대변되는 개혁에 대한 기대가 높다. 쿠바의 미래는 라울을 중심으로 하는 후계자들의 정책 방향에 따라 상당히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태그:#카스트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