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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 봄비 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는 강변의 모습같이 깨끗한 도시이다. 이 아름다운 빈의 구시가 중앙에 빈의 혼(魂)이라고 불리는 대형 건축물이 우뚝 솟아있다. 내 기억 속에 강렬한 첫인상으로 남아 빈의 이미지를 결정짓고 있는 이 건축물은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이었다. 나는 빈 역에 내리자마자 이 슈테판 대성당을 찾았다. 나와 내 가족의 빈 여행이 시작되었다.

 

슈테판 대성당이 없는 빈의 구시가는 상상할 수 없었다. 짙푸른 하늘 위로 대성당의 첨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상승미가 압도적인 이 고딕 양식의 거대한 건물은 날카롭게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늘로 계속 올라가 신에게로 향하고자 하는 종교인들의 신념은 너무나 강렬했고 절대적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눈앞에 보이는 거대 건축물이 이다지도 높게 솟아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성당의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슈테판 대성당은 1147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작은 성당으로 만들어졌다가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Rudolf) 4세에 의해 현재와 같은 고딕 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나는 차에서 내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슈테판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성당은 지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벽면이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검은 벽면은 슈테판 성당이 겪은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고 있다. 사암으로 만들어진 성당의 벽면은 사암의 특성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검게 변색되었고, 전쟁 등으로 훼손된 벽면은 새로운 사암으로 교체되었다. 대성당의 외부 벽은 과거의 검은 사암과 밝게 빛나는 사암이 어울려서 마치 거대한 퍼즐을 맞춰 놓은 듯 했다. 검게 버티고 있는 그 압박감이 슈테판 대성당을 더 멋지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슈테판 성당의 특이함은 검은 망토처럼 드리워진 벽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성당의 지붕을 유심히 살펴보면 다른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상당히 높고 경사가 심한 지붕에 만들어진 거대한 모자이크이다. 빈의 상징이기도 한 이 모자이크 지붕은 무려 25만개에 달하는 금색과 청색의 벽돌이 결합되어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오스트리아 전성기의 온갖 화려함이 대성당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화려함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지붕 모자이크에 새겨진 쌍두 독수리이다. 날개를 쳐들고 있는 두 마리의 독수리는 슈테판 성당의 상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상징이다. 독수리는 마치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성당을 지키듯이 자신 있고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그 뒤로는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짙푸른 하늘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가족과 함께 성당 외부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성당의 전체적인 구조물들은 조화롭게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균형을 깨뜨리고 홀로 높이 솟아있는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서 있는 북쪽을 포함하여 성당 외부의 어느 쪽에 서서 보아도 보이는 이 탑은 137m의 높이를 자랑하는 대성당의 남탑이다.

 

이 남탑은 빈을 촬영한 대부분의 엽서에 꼭 등장하는 상징적 탑이다. 고딕 양식의 이 첨탑은 '작은 스테판 성당'이라는 뜻의 '슈테플(Steffl)'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빈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남탑에 올라가면 빈 구시가 전체를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남탑을 보았을 때 남탑은 수리를 위한 거푸집을 둘러쓰고 있었다. 모든 여행에는 인연이 있는 법인데 두 번째 빈 여행에서도 나는 슈테판 성당의 남탑과 인연을 맺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슈테판 대성당의 북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남탑과 대칭되는 위치에 납탑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려고 했던 북쪽의 독수리 탑이 북탑이다. 북탑은 남탑만큼 높이가 높지 않아서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 탑을 만들려던 계획기준으로 보면 아직도 미완성 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탑을 건설하는 도중인 1529년에 오스만 투르크군의 오스트리아 1차 침공이 있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오스트리아는 북탑 건설 비용이 부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북탑은 오스만 투르크군과의 인연이 깊다. 북탑에는 오스만 투르크군의 침공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1683년, 슈테판 대성당은 오스트리아를 재차 침입한 오스만 투르크군에 의하여 많이 파괴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결국 오스만 투르크군을 물리쳤다.

 

오스트리아는 그들이 사용하던 대포 180개를 수거하였고, 이 대포들은 종을 만드는 주조틀 속으로 들어갔다. 떠도는 자들의 종이라는 북탑의 '푸메린(Pummerin)' 종이 이때에 탄생한 것이다. 무게만 해도 22톤에 이르는 종이니, 세계적으로 큰 종 중의 하나이다. 나는 계단을 빙글빙글 돌아 종탑을 올라갔다. 운동 부족인지 숨이 찼다.

 

 

성당을 계속 둘러보고 있는 나에게, 신영이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신영이는 빈 역에서부터 배가 고프다고 했고, 역에서 마땅한 식당이 없어 나의 가족은 이 슈테판 성당 앞까지 왔던 것이다. 신영이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여행 일정을 즉시 변경해서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마침 일요일, 오스트리아 최대 번화가인 케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에 문을 연 식당은 보이지 않았다.


나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눈에 바로 띄는 'M'자를 찾았고, 성당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간 곳에 위치한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섰다. 나 홀로 배낭여행 시에 배고픔을 달래주던 'M'자 식당은 꽤 깊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식당 안에는 우리나라에서 온 대학생들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나는 그들을 보며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나의 가족은 맘껏 먹은 포만감 속에서 잠시 미뤘던 슈테판 성당의 내부 기행을 재개했다. 나는 무려 65년에 걸쳐서 지어졌다는 오스트리아 최대의 성당 건물로 들어섰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5년, 독일 군대에 의하여 상처를 입었던 성당 내부는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성당의 외부도 웅장하지만, 나는 성당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성당 내부는 세밀함이 살아 숨 쉬는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순간, 가슴이 멍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성당 내부 길이는 무려 107m. 100m 달리기를 하는 운동장보다도 조금 더 길었다. 내가 발을 내딛는 성당의 바닥은 갈색의 체스판 무늬가 이어지고 있었고, 39m 높이의 천장에서부터 긴 철심으로 이어진 샹들리에가 공중에 떠 있었다. 높은 천장을 받쳐주는 초기 고딕 양식의 웅장한 기둥에는 무수히 많은 조각들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면 주제단 뒤편의 총천연색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서 아름다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성당 내부의 입구 쪽에는 동유럽의 강한 미술적 특징 중 하나인 이콘화(icon)가 걸려 있다. 이콘화는 번쩍거리는 은박의 액자 속에 들어 있고, 액자 밖으로는 햇살과 같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콘화 속에는 성모 마리아가 어린 예수를 안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이콘화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사실주의적이고 묘사가 탁월한 다른 회화들에 비해 이 이콘화는 단순하고 색상도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마음에는 이콘화가 포근하게 다가왔다. 단순함이 더 마음을 잡아끌기 때문일 것이다.

 

 

성당 내부, 주제단 왼편의 비너노이슈테터 제단. 72명의 성인이 한꺼번에 묘사된 제단의 패널은 마치 날개를 펼친 듯이 벌려져 있었다. 이는 당연히 패널 내부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조각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1447년에 프리드리히 3세가 지원하여 만들었다는 정교한 장식은 패널의 후면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바로크 양식의 슈테판 성당 내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프리드리히(Friedrich) 3세의 석관이다. 15세기 말에 르네상스양식으로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이 대리석 석관의 덮개에는 놀랍게도 당시 황제의 실제 모습이 그대로 조각되어 있다.


나는 죽은 황제의 시신 위에 생전 모습을 조각한 관을 만든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한 대리석으로 만든 관이 완전히 깨지고 없어지지 않는 한, 후세의 학자들이 이 석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프리드리히 3세는 1452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인물로서, 힘겹게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지위를 계속 차지하게 되었고, 합스부르크가는 그의 사후 그가 묻힐 곳으로 이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지정하였다.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보존하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묻힐 곳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교회였고, 빈에서 가장 큰 이 대성당에 그가 묻히게 된 것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성당 내부의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로 연결되는 문은 닫혀 있었고,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1450년에 만든 유골 안치소인 카타콤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페스트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골 약 2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자들이 입장 가능한 시간이 되자 카타콤의 문이 열렸다. 카타콤에는 역대 황제의 백골이 쌓여 있고, 내장을 담은 항아리가 있었다.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전통적으로 황제의 시신을 갈라서 심장과 내장을 분리하였는데, 황제들의 심장과 나머지 유해는 다른 성당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나는 심장과 내장, 유골을 별도로 보관하는 오스트리아 왕가의 전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성당들은 신성한 황제의 유해를 서로 안치하려고 했을 것이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죽은 황제의 신성성을 여러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한 준비된 홍보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분리된 시신은 정성껏 모아서 후하게 장례지내는 것이 상식 아닌가? 다른 문화권을 여행하다보면 겪게 되는 문화적 충격이 나의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는 황제의 시신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나는 시신이 분리되어 여러 성당에 흩어진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들이 사후에 안녕을 취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카타콤을 보고 지상 세계로 나온 내 눈 앞에 밝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다시 돌아본 대성당은 다른 느낌으로 내 뒤를 다가오고 있었다. 검게 그을린 황제가 나를 보고 손짓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오스트리아, #빈, #슈테판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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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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