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년 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다. 시드니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나는 집을 구하기 위해 '스트라스필드'라는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처음 스트라스필드 역에 내렸을 때 보았던 그 풍경을 아직도 나는 잊을 수 없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7,80년대로 돌아간다면 이런 모습일까. 개발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어느 시골 마을을 보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고려여행사'가 있는가 하면 '원조해장국', '한양식품'과 같은 한글 간판이 곳곳에 있다. 이 역시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되고 깔끔한 가게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호주인(한국인이 아닌, 호주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한국말을 하며 지나가기도 한다. 순간 '내가 시드니에 온 게 맞나'라는 생각이 든다.

시드니 한인촌 '스트라스필드', 한국어로 된 간판이 보인다
 시드니 한인촌 '스트라스필드', 한국어로 된 간판이 보인다
ⓒ 네이버 블로그

관련사진보기



알고 보니 스트라스필드는 시드니에서 유명한 한인타운이었다. 맙소사. 영어공부하러 왔는데 기껏 찾아온 곳이 한인촌이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게다가 집 주인이 러시아 사람이라고 해서 방을 구했는데, 집주인만 외국인이고 사는 사람들은 죄다 한국인이다.

처음에는 한 달만 살고 이곳에서 '탈출'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같이 사는 언니 오빠들과 너무 친해지는 바람에, 결국 시드니를 떠나 퍼스로 가는 그 날까지도 나는 스트라스필드에 살았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스트라스필드 역에 내릴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내가 '호주 속 한국'에 살려고 시드니까지 왔나'

왜일까. 2월 16일 토요일 처음으로 방문한 이태원 거리에서 나는 스트라스필드를 떠올렸다.

'한국 속 외국' 이태원, 다시 호주에 온 듯하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외국어로 된 광고물이 보인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외국어로 된 광고물이 보인다.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이태원 내 한국상가.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적혀있다.
 이태원 내 한국상가.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적혀있다.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이태원역에 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으로 된 광고물들. 지하철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가서 물어보니 "이태원에 아무래도 외국인들이 술 마시는 것과 같은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아서 그런지 길을 지나다니다 보면 절반 정도는 외국인"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역 밖으로 나와 보니 이건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외국인이 하는 가게들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하는 가게의 간판에도 한국어와 영어가 함께 적혀 있다.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DVD를 파는 좌판에 외국인들이 몰려 있기에 가보니 DVD제목이 거의 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되어 있다. 한국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DVD를 파는 상인은 "이곳에서는 한국인은 거의 DVD를 사지 않고 주 고객층이 외국인이다 보니 제목도 다 영어로 되어 있다"고 했다. 내가 "그럼 영어 잘 하시겠어요"라고 묻자 아저씨는 "제가 영어가 좀 짧아서... 그냥 간단한 말만 합니다"라며 수줍게 웃는다.

순간 스트라스필드의 한 초등학교를 지나갈 때 초등학생들이 "곤니찌와. 니하우마.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났다. 워낙 한국인이 많다보니, 호주인들도 '안녕하세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다만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을 구별하기 힘드니까 여러가지 인사말을 한 번씩 해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태원에는 외국인이 많으니 이곳에 있는 한국 사람들은 영어를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아저씨도 짧은 영어로 외국인에게 말을 건다. 이태원이 아니고서야 보기 힘든 풍경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해밀톤 호텔 근처에 있는 '퀴즈노즈서브'라는 가게에 들어가, 한국인 종업원의 유창한 영어를 들으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가게 안은 외국인들로 가득하다. 다시 호주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시드니 한인촌에 살던 호주인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이태원에 있는 한 휴대폰 대리점, 외국인이 주인이다.
 이태원에 있는 한 휴대폰 대리점, 외국인이 주인이다.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이화시장 골목. 여기가 외국이야, 한국이야
 이화시장 골목. 여기가 외국이야, 한국이야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해밀톤 호텔 근처는 잘 정돈된 시티같은 느낌인 반면에 이화시장 골목 쪽으로 들어가면 외국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는 터키 케밥집을 비롯하여 마치 재래시장처럼 다양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휴대폰 대리점도 외국인이 주인이다. 이 모든 게 다 생경하다. 스트라스필드에 살던 호주인들도 한국가게들을 보며 이런 느낌이었을까.

슈퍼에도 들어가 보았다. 호주에서는 대형 마트에 가도 '신라면', '새우깡' 같은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태원에 있는 슈퍼들 역시 꼭 외국인들을 상대로 한 슈퍼가 아니더라도 외국인들이 찾는 제품들이 조금씩은 구비되어 있었다. 각 국가로 걸 수 있는 국제전화카드도 있다.

외국인 전문 슈퍼
 외국인 전문 슈퍼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외국인 전문 슈퍼에서 파는 제품들
 외국인 전문 슈퍼에서 파는 제품들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스트라스필드에 살 때 자주 가던 '한양식품'에는 '종갓집 김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한국음식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스트라스필드에 살지 않는 한인들도 주말이 되면 이곳에 와 한국음식을 사가곤 했었다. 이태원은 특정 민족이 밀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전문 슈퍼에서 다양한 언어가 적혀 있는 제품들을 볼 수 있었다. 슈퍼를 찾은 인종 역시 다양하다.

이슬람 사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보았다. 이슬람 서점, 이슬람 음식점, 이슬람 여행사가 즐비해 있다. 이 일대는 해밀톤 호텔 근처와 비교해 볼 때, 재개발 예정 지역이라 그런지 훨씬 더 낙후되었다. '센트럴 부동산'에 들어가 물어보니 이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파키스탄 쪽 사람들이 많단다. 부동산을 이용해서 집을 구하는 외국인들이 많냐고 물어보니 "고객의 30% 정도가 외국인"이라며 "부동산을 통하지 않고는 집을 구할 수 없다"고 했다.

'외국인 상담 환영'이라고 적혀있는 이태원 내 부동산
 '외국인 상담 환영'이라고 적혀있는 이태원 내 부동산
ⓒ 홍현진

관련사진보기


내가 호주에 있을 때, 시드니야 워낙 한인사회가 발달되어 있어 인터넷을 통해서 집을 구할 수 있었지만 한인이 비교적 적은 편인 퍼스에 갔을 때는 대학 근처나 일식집에 있는 게시판에 붙어 있는 전단지 같은 것을 보고 집을 구했다. 그런데 이태원에 사는 외국인들은 부동산에 와서 집을 구한다니 신기했다. 부동산 사장님은 "여기서 영어 못하면 장사 못한다"며 "나도 미국에서 살다 왔다"고 말했다.

이슬람 사원에 들어가 보니, 무슬림들이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한국말을 잘하는 한 무슬림은 내 코트에 붙어 있는 모자를 씌워주며, "이렇게 해야 맞아"라고 말했다. "여자는 머리를 드러내면 안 되기 때문"이란다.

이태원에 있는 가게를 돌아다니며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한 가게에서 한국인 종업원에게 "여기는 주로 무슬림들이 이용하나요?"라고 물었는데 옆에 있는 무슬림이 "네"라고 대답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시드니에 있는 한 스시가게에서 일할 때 내가 영어로 말하자 화들짝 놀라던 호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년 여름, 친구가 교환학생으로 있는 일본을 방문한 적이 있다. 친구는 1년 동안 일본에 있었는데, 친구가 있던 대학교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몇 명 없어서 그 동안 한국음식은 거의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함께 오사카에 여행 갔을 때 내가 한인촌에서 재료를 사서 닭볶음탕을 해주니 친구가 너무도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스트라스필드에 살았던 5개월 동안 나를 힘들게 했던 것 중 하나는 내가 온전히 호주에 살지 못하고 '호주 속 한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나는 내가 호주에서 '이방인'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만약 친구처럼 내가 '호주 속 한국'이 아니라 '호주'에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지독한 향수병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글쎄. 이방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힘든 날이 분명히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한국 속 외국' 이태원에서 스트라스필드를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이곳에서는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도.

덧붙이는 글 | 홍현진 기자는 <오마이뉴스>7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이태원 , #스트라스필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