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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답게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행여 아기가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까. 마음까지 소심해지기 쉬운 날들입니다. 며칠 동안 집안에만 있었더니 아이도, 저도 좀이 쑤십니다.

친정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계천문화관'이 개장한 지 몇 해가 지났지만, 그동안 아이에게 4층부터 1층까지 제대로 보여준 적은 없습니다. 제 친구들이 멀리서 놀러오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청계천문화관을 보여주고, 청계천을 걷곤 했는데 그때마다 쿠하는 할머니랑 집에 있어야 했거든요.

햇볕이 남아 있던 오후, 유모차에는 아기 대신 여벌 기저귀 한 개만 달랑 태우고 청계8가부터 청계천문화관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어른들 걸음으로는 십여 분, 여유 있게 구경하며 걸어도 이십 분 안에 족히 닿을 거리였지만, 아이와 함께 걸으니 30분이나 걸립니다.

존치 교각. 역사의 한 장면을 남겨두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존치 교각. 역사의 한 장면을 남겨두겠다는 의도는 좋지만, 방치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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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8가에서 출발해 무학교와 두물다리를 지나면 청계천문화관이 나오는데, 이 구간에는 예전에 고가도로를 떠받치고 있던 교각 세 개가 남아 있습니다. 청계천에 다시 물길이 열리면서 위험스럽던 고가도로가 철거됐지만, 그 역사적 흔적을 남겨두기 위해 교각 일부를 남겨두었는데, 아무런 장식이나 설명없이 부수다 만 교각이 흉물스럽게 서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청계천 상류나 중류에 비해 동대문을 지나 청계8가 쪽으로 내려올수록 주택가가 많아집니다. 상업지구에는 관광객이 많지만, 하류에는 산책을 나온 지역 주민들과 사근동, 마장동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오면서 걷기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더 많습니다.

일부러 하류까지 관광을 오는 사람들은 대개 동대문 운동장 근처에 있는 패션 상가에 들렀다가 청계천문화관을 보러 관광버스를 타고 오기 때문에, 하류에는 거의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 지나다닙니다.

존치 교각을 남겨두려 했다면, 청계 8가와 무학교 사이에 두기보다는 '차라리 외지에서 관광을 오는 청계천문화관 근처에 남겨두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집 앞에 자르다 만 콘크리트 기둥이 세 개나 방치된 것을 좋아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요.

지팡이를 짚고 징검다리를 건너시려는 할머니가 불안해 보였던지, 쿠하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 "할머니 조심하세요~" 지팡이를 짚고 징검다리를 건너시려는 할머니가 불안해 보였던지, 쿠하가 큰 소리로 말합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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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풀들이 물길을 따라 무성한 하류는 상류나 중류에 비해 훨씬 더 자연친화적인 공간입니다. 밤에는 징검다리의 돌마다 전등에 불빛이 들어와 안전하게 건널 수 있습니다. 물길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다니며 시간에 따라 햇빛 많은 길을 찾아다니는 노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 할머니가 두 살배기 눈에도 위험스럽게 보였는지, 쿠하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할머니 조심하세요~."

다행히 뒤에서 건너려던 분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안전하게 햇빛이 더 따뜻한 쪽으로 건너가셨습니다. 물이 그리 깊어보이지는 않지만, 바람이 꽤 세게 부는 날씨여서 평소 잔잔해 보이던 물살이 유난히 빨리 흐르고 있었습니다. 

흙길 위에서 잠투정을 시작한 쿠하.
 흙길 위에서 잠투정을 시작한 쿠하.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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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걷다 보면 집에서 볼 수 없는 모습도 종종 보게 됩니다. 전라도 사투리에 '수말스럽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이가 순하고 보채지 않을 때 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쿠하는 아주 어린 아기였을 때부터 시어머니께서 "보통 수말스러운 아기가 아니다"라고 하실 정도로 크게 보채거나 칭얼거리지 않아,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기인 쿠하를 데리고 걷기 나들이를 자주 할 수 있는 것도 여간해서는 칭얼대지 않아서 가능했던 거지요.

출발한 지 25분쯤 됐을까요? 낮잠을 재우지 않고 나선 길이어서 그런지 평소 보기 힘들 정도로 보채고 징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유모차에 타겠다고(그 말은 곧 자고 싶다는 뜻이지요) 울먹이더니 아예 엉덩이를 흙길에 철퍼덕 깔고 발길질을 해댑니다. 폴라플리스 원단으로 만든 연두색 바지에 흙이 스며드는 게 신경쓰이는 엄마 마음은 아랑곳 않고 저 하고 싶은 대로 지푸라기도 집어서 던지고, 흙도 한 줌 집어서 허공에 던져버립니다.

유모차를 밀게 하면 잠도 깨고, 걷기도 유도할 수 있어 일석이조 입니다.
 유모차를 밀게 하면 잠도 깨고, 걷기도 유도할 수 있어 일석이조 입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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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할 때는 낮잠 시간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날이었습니다. 지난 2년 간 쿠하 설득용 잔꾀가 발달한 저는 기저귀가 타고 있는 유모차를 쿠하더러 밀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쿠하는 누군가, 무엇인가를 돌봐야 하는 부탁을 하면 거절하는 법이 없거든요.

청계천문화관 앞 두물다리 위로 오르는 빗면 길 끝까지 유모차를 밀고 올라갔습니다. 지나가는 어른들이 이솝 우화에 나오는 장에 당나귀를 메고 가는 귀 얇은 부자 이야기를 떠올리진 않으셨을까 모르겠습니다. 할 일이 생긴 쿠하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이후 두 시간 반 동안 칭얼대지 않고 즐거운 청계천 투어를 마쳤습니다.

청계천문화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멋진 외관 때문에 쇼핑몰 운영자들의 인기 촬영장 입니다.
 청계천문화관은 노출 콘크리트와 멋진 외관 때문에 쇼핑몰 운영자들의 인기 촬영장 입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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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과 청계천문화관은 문화시설이 거의 없던 청계9가와 마장동 주민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로 꼽히고 있습니다. 시민들에게 개방이 덜 되기도 했지만 서울문화재단은 용두동 쪽에 있어서 두물다리를 건너가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술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이나 '서울 아티스트'에 참가하려는 거리 예술가들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 거쳐야 하는 오디션 장소이기도 합니다.

동대문시장이 가까워서 그런지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부터 왕십리 인근에는 봉제 공장과 의류 쇼핑몰 업체가 많습니다. 쿠하는 쇼핑몰에 올릴 사진을 찍는 예쁜 언니들을 발견하자마자 뽈뽈뽈 달려갑니다. 일에 방해 될까 싶어 아이를 붙잡았는데, 추운 날씨에도 한참 동안 얇은 블라우스 차림으로 일하는 예쁜 모델이 애처로워 보이기도 합니다.

항공사진이 바닥에 장식된 곳에 물길을 따라 과거를 볼 수 있는 영상물이 준비돼 있습니다.
 항공사진이 바닥에 장식된 곳에 물길을 따라 과거를 볼 수 있는 영상물이 준비돼 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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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문화관은 4층에서부터 1층으로 내려오는 형식입니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맨 윗층까지 올라가서 비스듬히 설계된 길을 따라 한 층 한 층 내려오기 때문에 어린이나 장애인, 노인들에게도 힘들지 않은 전시공간 입니다.

조선시대와 해방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며 청계천이 앓던 시기와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게 되는 청계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아이는 한복을 입은 작은 인형들이 있는 조선시대와 청계천 주변 항공사진이 전시장 바닥을 장식한 곳을 유독 좋아했습니다. 아이가 서 있는 곳 아래에는 화면이 계속 바뀌면서 철거 전 고가도로 주변 풍경을 보여줍니다.

삼척동자 수준은 벗어났습니다.^^
 삼척동자 수준은 벗어났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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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물높이를 알 수 있게 만든 수표교의 교각 하나를 발견한 아이는 돌기둥이 신기한 지 "엄마 이게 뭐야?"하고 묻습니다. 수표교라는 이름과 물이 얼마나 높이 차올라오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기둥에 숫자로 표시를 해 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눈치였습니다. 쿠하 키도 잴 수 있다고 덧붙여 설명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뜹니다. 두 돌이 지나 삼척동자 신세는 면했고, 모자를 벗겨도 사척이 넘을 것 같네요.

판잣집 뒤로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판잣집 뒤로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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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문화관 바로 앞에는 전에 없던 판자촌이 생겼습니다. 얼마 전 뭔가 공사를 시작하는 것을 지나가다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60-70년 대 판자촌을 재현해 두었네요. 한쪽에서는 높이, 더 높이 아파트 공사장의 타워 크레인이 서 있고, 잃어버린 풍경을 되살려 놓은 판자촌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청계천의 오늘'을 말하는 듯합니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만드는 주전자들.
 에스프레소 커피를 만드는 주전자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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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쌀한 겨울날 저녁 무렵까지 길어진 산책은 청계9가 무학교 근처의 작은 카페에서 끝이 났습니다. 간판도 없는 이 가게의 이름은 꽤 길고 어렵습니다, '라 꼴린 드 파스타'. 우리 말로 파스타 언덕이라는 뜻이라네요. 프랑스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만들어 먹는 스파게티와 도리아가 주 메뉴지만, 꽁꽁 언 몸을 녹이기에는 작은 유리 차주전자에 나오는 허브 차들이 좋습니다.

여러가지 허브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이 카페는 인테리어부터 식기로 쓰는 접시와 컵까지 모두 주인장의 손길을 거친 수제품들입니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하는 아저씨가 만든 그릇에, 취미 수준을 넘어선 목공 솜씨로 테이블과 의자도 전부 아저씨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차와 음식을 담당하는 주인 아주머니는 오랜 시간 취미 삼아 해 온 그림 그리기와 종이 공예, 퀼트 솜씨를 발휘해 카페 구석구석을 애정어린 소품들로 장식해 두었습니다.

주인이 직접 만드는 도자 그릇들. 주인 아저씨가 만든 테이블 위에 아저씨의 도자기와 아주머니의 퀼트 인형이 사이좋게 앉아 있습니다.
 주인이 직접 만드는 도자 그릇들. 주인 아저씨가 만든 테이블 위에 아저씨의 도자기와 아주머니의 퀼트 인형이 사이좋게 앉아 있습니다.
ⓒ 정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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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멋내지 않은 듯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멋이 나는 공간에는 1800년 대에 제작한 골동품 피아노도 있습니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던 촛불을 꽂을 수 있는 프랑스 피아노는 이 곳을 찾는 꼬마 손님들에게 인기 있는 터줏대감입니다.

쿠하도 신이 나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아무 건반이나 두드리며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다른 손님에게 방해된다고 손사래를 치며 말려보지만,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배려로 아이들은 특별 대접을 받습니다. 그 맛에 쿠하는 청계천에만 오면 '볶음밥 집'에 가자고 조릅니다.

자동차가 없는 뚜벅이라면 허기와 한기를 달랠 겸 한산한 청계천 데이트 코스에 숨은 맛집을 끼워넣어 보세요. 예쁜 걸 좋아하는 연인이라면, 허브 차 중에서도 긴 잔에 꽃이 피어나는 '티잔'과 투명한 잔에 담긴 빨간색 '히비거스'를 추천합니다.

청계천 하류에는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상류의 화려함이나 동대문이 있는 중류의 시끌벅적한 맛은 없지만, 청계천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청계천문화관(이 건물의 백미는 해가 진 다음에 드러납니다. 밤에 주변에 큰 건물이 없고, 불 밝힌 간판이 별로 없어서 어두운 하늘에 하얀 물길이 흐르는 것처럼 외관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과 서울문화재단이 있습니다.

게다가 용두동을 지나 마장동까지 이어지는 수풀이 무성한 산책로가 있어 청계천다운 청계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마장동을 지나 계속 물길을 따라내려가면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길이어서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태그:#청계천, #쿠하, #허브 , #청계천문화관, #시티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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