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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세금과 삶터

 

 목요일마다 ‘배다리를지키는시민모임’에서 회의를 합니다. 도서관이 깃든 배다리를 가로지르려고 하는 ‘산업도로’ 막는 일로 동네사람과 시민모임 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책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저녁도 이 모임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애꿎은 돈으로 애꿎은 길만 자꾸 넓히기보다는, 그 돈으로 사람들 삶터를 추스르고 보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우리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정책을 꾸리는 이들은 ‘돈 놓고 돈 먹기’ 같은 데에만 마음을 기울입니다. 정책은 ‘투자’가 아니고 ‘삶’이어야 할 텐데, 예전 길로도 하나 막힐 일이 없는데, 수천 억을 들여서 2.51킬로미터짜리 새 길을 하나 낸다는 게 참. 시내 곳곳에 ‘대형화물차 진입 집중단속’ 걸개천은 걸어 놓고 교통경찰 몇이 서서 단속을 한다고는 하면서, 시내 한복판에 ‘대형화물차 씽씽 달리게 할 산업도로’를 뚫으려 하는 생각머리는 어떻게 해서 나오는지 원.

 

 앞으로 우리가 자동차를 얼마나 오래도록 쓸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천은 대한민국에서 공기가 가장 나쁜 곳입니다. 그렇다면 인천에서 행정을 맡은 이들이 정작 마음을 기울일 곳은 ‘길닦기’나 ‘재개발’이 아닌, 이곳 인천이 사람이 깃들일 수 있도록 숲을 가꾸고 쉼터를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도록 집을 옮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아늑하고 알뜰하게 가꾸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이 있어야 문화가 있을 텐데, 사람들 삶터를 깡그리 짓밟은 위에 시멘트로 51층짜리 아파트를 올려세운들 무슨 문화가 있겠습니까.

 

돈으로 떡바른 다음, 그 돈으로 축구장을 짓고 문화센터를 짓고 예술회관을 지어야 문화입니까. 신포동 재래시장이 문화입니다. 밤나무골 싸리재길이 문화입니다. 송림동과 숭의동 달동네 작은 집들이 문화입니다. 도원동과 숭의동 맞닿은 자리에 있는 오래된 공설운동장도 그곳 그대로 문화입니다.

 

 삶을 본다면 문화가 보이고, 문화를 본다면 삶을 느낍니다. 둘은 따로 떼어낼 수 없어요. 이것 하나 하고 저것 다음에 하는, 그런 억지 편가름으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자가용만 타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삶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걸어도 앞만 보며 걸음을 재촉하기만 한다면 삶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가다가 멈출 줄 알아야, 자리에 앉거나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을 내려다볼 수 있어야 삶을 살갗으로 보듬을 수 있습니다.

 

 

 (2) 책을 보며 뜨는 눈

 

 시민모임 자리에 가기 앞서 〈오래된 책집〉에 들릅니다. 책으로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추스르고 싶습니다. 책방 아저씨한테 꿉벅 인사를 합니다. 날이 조금 쌀쌀해 손을 삭삭 비비다가 주머니에 쑤셔넣습니다. 어슬렁어슬렁 골마루를 거닐며 책꽂이를 둘러봅니다.

 

 《알랭/박은수 옮김-내 생각들의 역사》(인폴리오,1995)가 보입니다. 1995년 그때에는 미처 몰랐고, 거의 2000년이 지난 뒤에 알았는데, ‘알랭’이라고 하는 분이짤막하게 적어 내려간 글을 모은 책이 예전부터 꽤 있었습니다. 인폴리오 출판사에서 내기 앞서도 손바닥책으로 띄엄띄엄 나왔습니다.

 

인폴리오 출판사는 1995년 앞뒤로 《내 생각들의 역사》를 비롯해 《행복에 과난 프로포》와 《교육에 관한 프로포》와 《종교에 관한 프로포》 네 권을 펴냅니다. 이와 같은 책은 그동안 ‘교육론’이나 ‘행복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종교론’도 나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 나는 바란다, 우리 군대들이 낱말의 모든 뜻에서 영토 안의 군대이기를 …… 살 권리가 공공연히 폐기되는 곳에 무슨 권리가 유지될 수 있는가? ..  (224쪽)

 

 긴 논문보다 짤막한 글 한 줄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나 ‘자기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생각’을 그때그때 툭툭 내뱉곤 합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낄 뿐입니다. 우리들도 자기가 얼결에 내놓게 되는 좋은 생각을 놓치지 말고 잘 잡아채어 모아 놓은 뒤 갈무리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알랭 프로포’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봅니다.

 

.. 내가 보아온 한에서는 사람은 다 스스로 자신의 명예라고 부르는 그 무엇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걸려고 든다. 그리고 명예는, 사람이 더 많은 악덕과 더 많은 죄악을 짊어질수록 더욱 강해지기 일쑤다 …… 왜냐하면 그가 위험도 무릅쓰고 분풀이를 한다면, 그것이 허용된 일인지 금지된 일인지를 스스로 물어 보지는 않으니까 ..  (324∼325쪽)

 

 가만히 보면, 알랭 님이 남긴 글은 ‘알랭이라는 사람이 걸어온 발자취’입니다. 알랭 님 삶이 고스란히 알랭 님 글로 됩니다. 세상을 어떻게 부대꼈느냐에 따라서, 세상을 얼마나 껴안았느냐에 따라서 알랭 님 글은 달라집니다.

 

《라파엘로 부조니/송재원 옮김-슬픈 얼굴의 기사》(풀빛,1981)라는 책이 보입니다. 뭘까? 책꽂이에 꽂힌 책이름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책등에 ‘풀빛 출판사 예전 무늬’가 박힌 모습을 보니, 흔해빠진(?) 책은 아니겠단 생각이 듭니다.

 

구경이나 해 볼까 하고 끄집어 냅니다. 겉에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라는 작은이름이 붙습니다. 한 장을 넘겨 책날개를 봅니다.

 

글쓴이 ‘라파엘로 부조니’는 1900년에 이탈리아 음악가 페루치오 부조니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베틀린에서 태어난 부조니라는 분은 미술 세계를 걸었고, 디자이너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다가 1930년 두 번째 세계대전이 터지자 미국으로 돌아가서 세르반테스 연구를 했다는군요.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은 부조니 님 손수 쓰고 그렸다고 합니다.

 

.. 스페인의 어느 마을에서 세르반테스가 탄생했는지 오랫동안 아무도 몰랐었다. 그의 탄생지 같은 거야 아무렇든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도 사람들은 그 위대한 작가가 어디서 태어났는가 하는 문제를 위시하여 그밖의 시시콜콜한 것은 아무도 따지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의 명성이 일취월장하여 세계적으로 퍼지고 그것이 스페인의 자랑이 되자 사람들은 다투어 그것을 캐기 시작하였고 여러 도시들은 각기 그곳이 세르반테스의 출생지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13∼14쪽)

 

 글쓴이가 어떤 사람인가 더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인터넷 찾아보기를 해 봅니다. 음, 거의 찾아볼 길이 없군요. 그래도, 이 책 《슬픈 얼굴의 기사》가 1999년에 다시 나왔다는 소식 하나 봅니다.

 

.. 미리 결론부터 꺼내지 말자. 돈 미구엘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를 쓰면서 모델로 삼은 것은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나 그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가 자신의 소설 주인공을 고향마을을 떠나 출정하게 한 것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유의 이면에는 그의 모든 가족이 그가 일곱 살이었을 적에 스페인 전국을 유랑하는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었다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  (21쪽)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송재원 님은 《마찌니 평전》을 우리 말로 옮기기도 했답니다. 《슬픈 얼굴의 기사》를 읽으면, ‘늙다구리’라든지 ‘오달지다’라든지 ‘괄다’라든지 ‘오사바사하다’라든지 ‘거늑하다’ 같은 낱말이 보입니다. 어쩌면 요새는 차츰 안 쓰는 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뾰루퉁하다’나 ‘새침하다’ 같은 낱말, ‘계집아이’와 ‘사내아이’ 같은 낱말, 이런저런 토박이말이 곳곳에 보입니다.

 

재미난 문학을 일구어 낸 세르반테스처럼 ‘세르반테스 연구’도 좀더 재미나게 적어내려가려 했던 라파엘로 부조니 님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하여 옮긴이 송재원 님도 이런 흐름에 발맞추어 느낌이 재미나면서 쏙쏙 잘 들어맞는 낱말을 골라서 옮겼을지 모르겠구나 싶어요.

 

 (3) 자가용

 

 책 두 권 값을 치릅니다. 가방에 두 권을 넣고 밖으로 나옵니다. 헌책방골목인 이곳 길가에 두 줄로 자동차가 서 있습니다. 건너편 길가는 시내버스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두찻길인 이곳은 이렇게 차를 세워 놓으면 버스가 지나갈 수 없어서, 교통경찰이 틈틈이 지나다니며 주차단속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댑니다. 두찻길에 두 줄로 차를 대니 이쪽에서든 저쪽에서든 다른 차가 지나갈 때마다 애를 먹습니다. 참고서 하나 사러 올 때에도 자가용을 몰고 오고, 소설책이나 어린이책 하나 구경하러 올 때에도 자가용을 몰고 옵니다. 이 둘레 도매상들은 하염없이 짐차를 대놓고 있습니다.

 

 전철을 타고 도원역이나 동인천역에서 내린 뒤 걸어올 수 있고, 시내버스를 타고 요 둘레에서 내린 뒤 걸어올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자가용 끌고 오는 사람보다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오는 분이 좀더 많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가용꾼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자가용 끌고 와서 책 한 무더기 장만하고 카드로 슥 긁고 짐칸에 쟁여서 가져가는 사람도 제법 늘어납니다.

 

 책도 삶이고, 책읽기도 삶이며, 책사기도 삶인데. 책방 나들이를 하는 매무새도 우리 삶이며 책 하나 장만한 뒤 어떻게 들고 집으로 돌아가느냐도 우리 삶인데. 아이들한테 좋은 책을 읽히려는 마음으로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자가용을 타고 오는 일이란, 좋은 책을 읽어 줄 아이들한테 얼마만큼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생태와 환경을 말하는 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인문사회과학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자가용을 타고 오는 일이란, 자기 생각과 삶이 얼마나 하나되는 일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꼭 자가용으로 움직여야 할 때도 있을 테지요. 그럴 때는 이곳 헌책방골목과 가까운 곳에 차대는 값 안 내도 되는 공영주차장이 두 군데 퍽 널찍하게 있습니다. 그곳에다가 차를 대 놓고 2분쯤 걸어오면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 차를 대고 걸어오는 분을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히유. 한숨을 한 번 쉬고 모임자리로 갑니다. 산업도로고 뭐고, 재개발이고 뭐고, ‘위’에서 책상물림 정책을 짜는 사람들 삶이나, ‘밑’에서 그런 책상물림 정책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되는 사람들 삶이나, 어슷비슷 닮은 꼴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오래된 책집〉 :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 한켠에 있습니다. 전화는 따로 없고, 동인천역과 도원역 사이에 있습니다. 찾아가는 길을 모르겠다면, 전철역 두 곳 가운데 아무 데나 내려서 "배다리 헌책방골목"을 물어물어 찾아가면 됩니다.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 + 책 + 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헌책방, #오래된 책집, #인천, #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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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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