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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칼바람이구먼, 살갗에 닿는 감촉이 칼끝처럼 예리해.”

 

12일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마차산을 오르는 길은 바람결이 싸늘했다. 전철 동두천역에서 내려 하얀 입김처럼 연기를 내뿜는 공단2길을 지나쳤다.

 

“저 산이 바로 마차산이로구먼, 그러고 보니 동두천시가지를 사이에 두고 소요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산일세.”

 

안흥교를 건너 신흥고교를 지나자 마차산 골짜기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기도원과 버섯재배농장을 지나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섰다.

 

때 이른 황사로 하늘이 그리 맑지는 않았지만 양지쪽의 햇살은 따사로운 모습이다. 능선에는 낙엽이 깔려 있어서 밟는 느낌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정상을 향하여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고 힘들었다.

 

“어! 이거 500미터대 산이라고 얕봤다간 큰 코 다치겠는 걸.”

 

전날 다른 일행들에게 전화할 때 단숨에 오를 수 있는 산이라고 큰소리쳤다는 일행이 혀를 내두른다. 바짝 말라 흙먼지를 일으키는 오르막길은 마사토가 노출되어 미끄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날씨가 정말 춥긴 춥군, 이렇게 힘들여 올라오는데도 땀이 나지 않는 걸 보니.”

 

가파른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올라왔지만 땀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귀 덮게까지 내렸지만 옷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으로 땀 흘릴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정상에 올라서자 시야가 시원하다. 발아래 동두천시가지는 물론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감악산이 멀지 않아 보인다. 오목한 항아리처럼 둘러선 소요산의 연봉들도 바라보이고, 한탄강 건너 고대산이며 멀리 도봉산까지 바라보인다.

 

“히야! 저 소나무 좀 봐, 참 놀라운 생명력이야.”

 

정상이라야 나무막대기를 깎아 박아놓은 해발 588미터라는 정상표지목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수직으로 깎아지른 바위절벽에 실선처럼 좁은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가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수십 년은 자랐음 직한 소나무는 줄기가 어른 허벅지만큼이나 굵었다. 그렇게 굵은 소나무가 좁은 바위틈에 거의 수평으로 자란 모습은 마치 바위절벽에 소나무 말뚝을 박아놓은 모습 같았다.

 

“자! 그만 내려가자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구먼.”

 

그리 높은 산이 아니었지만 산꼭대기에 몰아치는 바람은 더욱 차갑고 싸늘했다. 서둘러 하산 길을 재촉했다. 하산은 북쪽능선을 타는 길이었다. 댕댕이 고개를 지나 밤골재, 그리고 양운리고개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런데 너무 허망하잖아?”

 

앞서 걷던 일행이 뜬금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뭐가 허망하다는 거야?”

 

바로 뒤를 따르던 일행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숭례문 말이야. 그 험한 격동기를 잘도 버텨온 문화재가 그렇게 허망하게 불타버리다니…. 난 그 모습 보면서 눈물이 나와 한참을 울었다니까.”

 

능선길이 단조로워서였을까? 산길에서 나누는 불탄 숭례문 이야기가 왠지 생뚱맞다는 느낌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었는지, 현실로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니까. 불을 지른 나이 든 그 사람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고.”

 

이번에는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찬바람 부는 능선길이 숙연해졌다. 숭례문의 방화로 인한 소실은 일행들 모두에게도 너무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화재현장 주변을 왜 서둘러 높은 울타리를 치는 거야?”

 

역시 앞서 걷던 일행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 한동안 그냥 놔둬야 되는 거 아냐? 귀중한 문화재를 그동안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반성도 할 겸 말이야.”

 

먼저 자성론이 대두됐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일행들은 참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언제 우리 문화재를 소홀히 대했단 말인가. 등산을 할 때마다 환경을 염려하며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는 사람들인데, 하물며 문화재라니. 평소에도 문화재라면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인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와 관계기관들은 책임회피에만 급급하더군, 불탄 숭례문 주변에 서둘러 울타리를 치는 것도 그런 맥락 아니겠어?”

 

일행들은 누구랄 것 없이 방화범은 물론 관계기관들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다. 길은 평탄하고 완만했다.

 

"여기서 잠깐 쉬어 갈까?“

 

밤골재를 지나 양운리고개로 이어지는 세 갈래 길이었다. 마침 바람이 잔잔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길가의 작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응달에는 아직 잔설이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저 벙커 말이야, 저거 요즘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네.”

 

길가에 군사용으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벙커가 눈에 띄었다. 머리에는 듬성듬성 마른 풀이 난 흙을 뒤집어쓰고, 두 눈이 뻥 뚫린 모습이었다. 벙커는 정말 오랫동안 방치된 듯 퇴락한 모습이었다.

 

“옛날 군대생활할 때 저걸 만드느라 고생 참 많이 했지. 모래며 시멘트, 자갈까지 등에 짊어지고 낑낑거리며 이런 산꼭대기까지 올랐으니까.”

 

일행은 옛날 고생스럽던 시절이 떠오르는지 먼 하늘을 쳐다본다.

 

“다 냉전시대의 산물이지 뭐, 그런데 저걸 철거하지 않고 왜 그냥 놔두지? 어차피 사용할 것도 아니고 흉물스러운데.”

 

그러고 보니 벙커 옆에 있는 작은 진지처럼 파놓은 참호도 반은 무너진 모습이었다.

 

“저런 벙커도 수백 년이 지나면 혹시 문화재가 될 수 있을까?”

 

이거야말로 정말 황당한 말이었다. 산꼭대기의 흉물스런 시멘트 벙커도 문화재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니. 하긴 벙커도 엄연한 역사의 흔적이긴 하지만,

 

“혹시 알아? 우리 민족의 비극이자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문화재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될지?”

 

비약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며 다시 바라본 콘크리트 벙커가 중세 유럽 병사의 투구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럴 수도 있겠는데. 저거 봐? 마치 중세 유럽의 병사들이 썼던 투구처럼 보이지 않아? 저만하면 문화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가 생뚱맞은 말을 했다. 그러자 일행들이 눈을 둥그렇게 뜨며 우하하하 하고 웃어젖힌다.

 

숭례문의 방화로 인한 소실 때문에 등산길에서까지 우울했던 기분을 풀어버리는 순간이었다. 산꼭대기의 볼품없는 콘크리트 벙커를 보며 먼훗날의 문화재를 연상했던 것도 사실은 불타버린 숭례문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우리 국민들에게 씻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와 충격을 안겨준 숭례문의 소실은 결코 쉽게 잊혀질 일이 아니다. 숭례문을 떠올리는 것이 어디 등산길에서 뿐이겠는가. 그러나 숭례문은 이미 불타버렸다, 이제 냉정히 생각하고 대처해야할 때이다.

 

방화범으로부터 국보1호를 지켜내지 못한 관계당국과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에게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문화재들이 더욱 안전하고 견고하게 보존될 수 있는 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숭례문은 가장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도 말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역사의 주체로서 먼훗날 후손들에게 정말 부끄럽지 않도록.

 

산을 내려와 소요산 입구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전철을 탔다. 서울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도 사람들의 화제는 여전히 불타버린 숭례문과 책임질 줄 모르는 관계당국, 그리고 방화범에 대한 이야기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문화재, #마차산, #감악산, #소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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