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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오후 4시, 성 마가엘 성당에서는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3기 수료식이 열렸다.
 2월 13일 오후 4시, 성 마가엘 성당에서는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3기 수료식이 열렸다.
ⓒ 구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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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길아, 우리 안에 숨은 1인치를 찾기 위해 인문학을 하는 거란다. 그 1인치를 찾으면 또 다른 삶 속으로 내가 던져지기를 기대하며…." -  강영길 선생 '숨은 1인치가 나를 당당하게 하다'(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과정 3기 문집에서)

올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지만, 성당 안은 훈훈함으로 가득했다. 커튼 사이로 부서지는 햇살도 수료생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이들은 대학에서 간혹 보이는 '만학도'의 모습 그대로였다. 까만색 학사모와 학위복도 제법 잘 어울렸고 그런 모습 속에선 오만함 없는 '지성'이 풍겨나오는 듯 했다.

수료생들의 표정은 들떠 보였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봤더니 들뜬 표정들 속에는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진했다. 수료증은 애당초 중요치 않아 보였다. 왠지 모르게 평범한 '만학도'는 아닌 것 같았다.

이 곳에서 그들은 '노숙자'가 아닌 '선생'

최현우 선생이 수료생들을 대표해 감사의 연설을 하고 있다.
 최현우 선생이 수료생들을 대표해 감사의 연설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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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오후 4시, 서울 구로구 항동 성공회대 성미가엘 성당에서는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 3기 수료식이 있었다. 성 프란시스 대학은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임영인 신부가 2005년에 도입한 '클레멘트(Clemente) 코스'를 실시하고 있다.

'클레멘트 코스'란, 미국의 얼 쇼리스가 1995년에 소외계층을 위해 개설한 정규대학 수준의 인문학 강좌를 말한다. '노숙인들을 위한 경제·물질적 지원보다 더욱 절실한 것은 그들 스스로 아픔을 딛고 일어날 수 있도록 마음의 지원을 해주는 것'이라는 게 이 교육의 취지다.

성미가엘 성당에 자리한 이들은 바로 클레멘트 코스를 수료한 '노숙인 만학도' 들이다. 성당 안의 훈훈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난 몇 해 동안 추운 길바닥에서 자야 했던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기본적인 배려였다.

"문래공원과 서울역에서 노숙을 한 지 4년, 제 몸은 망가져 버렸습니다. '신장'도 '폐'도…, 안 좋은 상황이었죠. 허나, 정말로 망가졌던 건 제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3기 수료생 대표 최현우 선생은 천천히 마이크 앞에서 입을 열었다. 사회에서는 그들을 '노숙자'라 불렀지만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는 '선생'이라 부른다. 그것 또한 인문교육의 일부다. 

"교수님들의 가르침 덕분에 '꽁꽁' 얼었던 제 마음은 눈녹듯 녹았습니다. '희망의 인문학' 시간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 선생은 수료생들을 대표하여 1년간 자신들을 가르쳐 주었던 교수들께 '앞으로 잘살겠노라' 말했다. 최 선생의 말투에는 자신감과 품격이 느껴졌다. 서울역에서 힘없이 주저앉은 노숙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연설을 하면서 드는 적절한 비유와 어휘의 선택은 대학교 4학년생인 나보다 뛰어났다. 나 또한 인문학도이지만 그들 앞에서 '대학생'이라는 명함을 내보이긴 부끄러웠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50살 코흘리개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배워 남을 돕는 삶을 살겠습니다."

수료해도 배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재구 선생
 유재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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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식이 거행되는 동안, 성당 안은 조용했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노숙인 다시 서기 지원센터 직원들과 성 프란시스와 성공회대 교수, 자원봉사자들 몇 명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료식은 고된 배움의 끝을 축복하는 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자리였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란 없었죠. 1년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은 바로 마음 속에서 희망을 찾는 방법입니다.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꽃다발 증정식과 성 프란시스 대학 교가제창 시간이 있었다. 성공회대 박성희 교수는 수료생들을 위한 축하공연으로 성악 독창을 했다. 성당 안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곱게 울려퍼졌지만 왠지 수료생들의 표정은 썩 밝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수료증과 꽃다발을 받아들 때의 표정은 밝았지만 금세 섭섭함이 묻어나는 표정이 된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수료하기엔 배울 게 더 많이 남았단다. 대학생들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철학 서적과 문학작품들을 더 읽어야 되겠단다.

3기 수료생, 유재구(62) 선생은 인문학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유 선생은 수년 전 사업에 실패해 집을 잃고 종로에서 노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술로 몇날며칠을 지새우며 정신도 많이 피폐해졌단다. 그는 성 프란시스 인문학 과정을 시작하면서 "술은 아예 입에 대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다. 책 읽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됐기 때문이다.

"지금 제 신조는 '술 스톱, 알코올 스톱'입니다. 이제 정말로 모범적으로 살 것입니다. 술로 인생을 낭비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유 선생은 그간 배운 철학 서적들과 문학 서적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책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지만, 교수의 도움을 얻어 마침내 그 의미를 알게 되면 그렇게 기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루쉰의 <아큐정전>은 정말 좋은 책인 것 같아요. 읽어보세요.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은 전 국민에게 권장하고 싶은 필독 도서라고 생각하고요. 바야흐로 현대사회는 '정보의 호수'인데 그런 시대에 살면서 책을 많이 읽어야죠. 안 그래요?"

교육과정이 끝났으니 그렇게나 좋아했던 인문학을 더 이상 배우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유 선생은 역시나 아쉬운 마음을 토로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교수님들이 신경 써주셔서 정말로 고마웠어요. 배움의 틀을 닦았으니 나머지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대에 평생학습 프로그램이 있으니 계속해서 이용할 생각입니다. 어떻게든 남은 인생, 중단없이 공부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유 선생의 말에는 아쉬움도 느껴졌지만 동시에 자신감도 엿보였다.

"밥 같이 안 먹으면 안터뷰 안 해줄거야"

성공회대 지하식당에서는 푸짐한 반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공회대 지하식당에서는 푸짐한 반찬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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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식이 끝난 후, 성공회 대학식당에서는 다 같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나는 취재를 더 해야 했기에 같이 따라나서긴 했지만, 괜스레 눈치가 보여 밥은 먹지 않았다.

주위를 실없이 왔다갔다 하는데, 근처에 있던 최 모 선생이 나를 향해 "밥 먹고 해! 밥 같이 안 먹으면 나중에 인터뷰 절대로 안 해 줄거야!" 라며 대뜸 으름장을 놓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선생도 "밥 먹을땐 하던 일도 잠시 멈추는 거라구, 대한민국에서는 밥 얻어먹는 것 가지고 아무도 뭐라 안 해. 기자 양반 걱정 말고 밥 먹어"라며 설득했다.

사실 그날 저녁 식단이 괜찮았다. 감칠맛 나는 반찬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고 디저트로 케이크와 과일까지 있었다. 가뜩이나 밖에서 몸을 많이 떨어서 그런지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군침은 수도 없이 목구멍으로 타고 넘어가고 있었다.

"먹을까 말까" 하던 내 고민은 짧았다. 금세 접시를 들고 음식을 한가득 담았다. 선생들의 도움을 받아 눈치 볼 것 없이 한 끼를 공짜로 해결할 수 있었다.

고마웠고 한편으론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이제는 내가 남을 돕겠다" 던 그들이 정말로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셈이다. 나는 정작 그들에게 도움은 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살아왔는데….

인간의 마음 담긴 '인문학'이 권장되어야

식사를 마친 후에는, 나에게 식사를 적극 권했던 최 모(55) 선생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 나눴다. 최 선생은 13명의 3기 수료생 중 유일하게 여성이면서 노숙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책을 많이 접했고, 좋은 지식도 많이 쌓았지만 무엇보다 '측은지심'을 배우게 된 것을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

최 모 선생
 최 모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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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때 집안 살림이 너무나 어려워져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요. 그 후 임대아파트로 옮기고 힘들게 10년을 살았습니다. 작년 1월에는 몸이 아파 수술을 받게 되면서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어요. 할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성 프란시스 대학을 만났고, 인문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년간 교육을 받고 느낀 점은 '아무리 힘들어도 남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 이예요. 어려운 분들은 마음으로 도와드려야 하는데, 요즘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정이 메마른 사회죠. 이럴 때일수록 인간의 마음이 담긴 '인문학'이 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좋은 인문학을 배우는 과정이 모두 끝났는데 기분이 어떤지 묻자 최 선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수료를 했기 때문에 기쁜 마음이 드는 것은 10% 정도밖에 안 돼요. (웃음) 나머지 90%는 더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죠."

수료생들, 다시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할텐데...

저녁 식사를 끝으로 성 프란시스 인문학 과정 3기의 모든 일정은 끝났다. '선생'들은 모두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간 문밖에는 어느새 어둠이 몰려와 있었다. "나가면 추울텐데…"라는 걱정이 들었다.

그들은 이제 다시 저마다의 삶을 찾아 나갈 것이다. 그들의 과거가 반복되지 않을까. 또다시 차가운 거리로 내몰리지는 않을까. 내가 만난 수료생들 대부분은 일을 하기보다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인문학 공부만으로 거칠고 가난한 삶을 헤쳐 나가는 게 가능 할까. 다시 현실을 돌아보게 되고 새삼 의문이 생긴다.

텅 빈 식당 안에서 잠시 생각했다. 때마침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소장인 임영인 신부가 마지막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신부님을 붙들고 마치 '고해성사'하듯 물어보았다. 임 신부는 '현실'적인 내 질문에 여유롭고 차분한 모습으로 답변해 주었다.

"노숙인 편견, 없어져야 합니다"
[인터뷰]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 소장 임영민 신부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임영인 신부.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의 임영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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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번째 기수를 수료시키셨는데, 감회는 어떠십니까?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는 게 사실입니다. 책임감도 생기고요. 이러한 교육 과정이 단순히 '인문' 그 자체에 머문다면 슬픈 일이겠죠. 인문교육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노숙인들은 앞으로 자신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더욱 성숙해 질 것입니다."

- 수료 후에도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공부'보다 일자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우선은 현실을 봤을 때, 돈을 벌어야 하니까요.  
"공부와 일, 두 가지는 모두 무엇을 위한 것인가요? 바로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인간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일과 공부는 같은 목적이라고 봅니다. 노동을 통해서 얻는 인내와 보람, 학업을 통해 느끼는 성취감과 성찰성, 돈을 벌고 벌지 않고는 중요치 않아요. 공부도 출세를 위한 것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을 통해 인간이 한층 더 성숙해 지느냐죠. 그들이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출세'가 아닙니다. 오로지 자신을 위한 능력개발이죠. 그렇다면 저는 끝까지 도울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한층 더 성숙시킬 테니까요."

- 집 없는 노숙인들을 위해 임대아파트를 제공해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계시는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를 늘려나간다면 재정적으로 어려워 지지는 않을까요?
"앞으로 계속해서 노숙인들을 위한 지원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임대아파트는 주공에서 위탁받은 것으로 빈민들을 위한 아파트라 임대료가 싼 편입니다. 보증금은 단체와 개인이 추렴해서 조달하구요. 나머지 부족한 금액은 스폰서와 모금행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길 기대해요. 좋은 뜻을 함께 갖고 계신 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죠."

- 숭례문 화재사고의 책임이 '노숙인'들에게 잠시 돌아간 적이 있었는데. 
"숭례문 사고에서 노숙인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첫째, 노숙인들에 대한 편견, 오해들이 도가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어 노숙인들의 옷차림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요? 허름한 옷만 입으면 다 '노숙인'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가 문제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마음속에 '노숙인은 더럽고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편견이 자리 잡고 있는 거죠. 둘째, 사회 전반적으로 너무 피폐화된 사회가 돼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관심하고 적으로 만들어 버리죠.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무조건 자신과 다르니까 배척하려고만 합니다. 노숙인들은 우리와 똑같은 생각과 사고를 가진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 '인문학의 위기'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나요?
"'인문학의 위기'는 여러 가지 측면의 문제인 것 같아요. 역사, 문화적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사회가 기술적으로는 발전하고 개인의 능력도 향상되었지만, 상대적으로 인문교양은 많이 부족해 진 것 같아요. 또한 '인문학'이라는 개념 자체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간 '인문학'은 특정 집단의 소유물처럼 여겨졌죠. 골방에서 주로 다루어 졌고요. '학문'을 다루는 자들의 허위의식과 오만함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문학의 '학'자를 붙이기를 거부합니다. '인문교양' 혹은 '인문교육'이라 부르는 것을 좋아해요."

- 노숙인들을 위해 일하시면서 언제 가장 큰 보람을 느끼시나요?
"노숙인 분들이 교육을 받으시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단계가 있답니다. 처음에는 외모와 말투, 목소리가 바뀌어요, 깨끗해지고 점잖아 지시죠.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그들은 저에게 찾아와 '괴롭다'는 하소연을 합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자신의 과거도 보이게 되고, 내면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되거든요. 그러나 이내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님, 그래도 계속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노숙인이었던 분들께서 스스로 고민하고 변화하려는 시도를 하시는 모습을 볼 때 엄청난 감동을 받습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노숙인 분들을 존중해줘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고자 하는 사회에 가기 위해서는 그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자신의 삶을 희망으로 만들어 갈 수 있게끔 저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구자민 기자는 <오마이뉴스> 7기 인턴기자입니다.



태그:#노숙인, #인문학, #다시서기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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