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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설'은 구정이 진짜 설이다. 신정에 제사 지내는 사람도 있지만, 제사는 음력설로 지내야 옳지 않을까. 예로부터 불려왔던 '설' 혹은 '설날'의 어원은, 한문으로는 근신한다는 뜻인 '신일(愼日)' '달도일'로 문헌에 적혀 있다. 삼국시대부터 정월에는 근신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몸을 사린다 하여 정초를 통틀어 '설날'이 됐다.
 
 
설날 아침에 차례를 지내는 명절 장보기는 매우 까다롭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한 달 넘게 장을 보시곤 했다. 지역마다, 가정마다 제삿상을 차리는 법도 조금씩 다르지만, 조상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사상 장보기의 공통점은 '정성'이다.
 
요즘 같이 바쁜 주부들이 하루 이틀 장을 보아서 까다로운 제삿상을 차리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찬물 한 그릇 떠 놓아도 제삿상은 정성'이라고, 가능한 한 싱싱하고, 모양이 반듯하고, 보기 좋고 상하지 않는 것으로 장을 봐야 한다. 그렇다면 새벽 바다에서 배로 싣고 온 싱싱한 어물을 곧장 받아 파는 자갈치 시장은 명절 장 보기에 제일 좋은 어시장이다.
 
 
자갈치 시장은 어물 전문 시장이지만 사실 없는 게 없다. 건어물 시장이 별관처럼 따로 있는데 자갈치 건어물 시장은 자갈치 시장 신건물에서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부산 지하철을 탈 경우, 1호선 남포동 지하철 역에서 하차하는 게 빠르다.
 
이 건어물 시장 골목은 영화 <친구> 촬영 현장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다. 영화 속에서는 셔터를 내린 한적한 늦은 오후의 골목길로 연출된다. 이 건어물 가게 건물들은 거의 오래된 적산가옥이라서 옛날 분위기의 '저자'를 느끼고 싶어하는 여행객들에게 빠질 수 없는 명소다. 근처에 방파제와 근사하게 새로 꾸민 자갈치 공원 등이 있다.  
  
 
가게 안과 앞에 보기 좋게 진열된 김·멸치·오징어·마른 명태·황태 등을 눈으로 보면 정말 안 살 수가 없다. 마트나 유명백화점과 달리 여기서는 흥정을 제대로 할 수 있고, 멸치와 김 등을 시식 등 육안으로 직접 확인해서 살 수 있어 좋다. 
 
부산 경남 지역에서 나오는 건어물뿐만 아니라 전국 건어물이 다 진열되어 있다. 명절상은 거의 기름진 음식이라, 약방의 감초처럼 준비해야 하는 명절상의 밑반찬과 친지 이웃 등의 선물로 젓갈이 인기가 좋다.
 
예쁘게 포장된 명란·창란·오징어 젓갈 등 없는 젓갈이 없다. 싸고 우수한 양질의 젓갈을 구입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장보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장보기의 맛은 역시 흥정이다. 흥정 없는 장보기는 단팥이 없는 찐빵 맛 아닐까.
 
 
예부터 고사·굿·제사 등에 북어를 사용해 왔다. 제사떡은 이웃들과 나누어 먹지만 북어는 광목으로 묶어 매달아 두는 재액 예방의 상징물이다. 특히 마른 명태와 문어를 말린 것은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항목. 어물은 모두 재액 예방의 상징물이다.
 
특히 음력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깨끗한 흰 종이에 쌀밥을 싸서 물에 던져 물고기를 먹게 함으로써 재액을 방지할 수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대합조개 오천원치 샀는데 진짜 많다. 조갯살이 너무 좋고 싱싱하다. 그래도 자갈치 아지매에게 괜히 "아줌마 이 조개는 괜찮아요?"하고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하니, 자갈치 아지매 왈, "마, 사람 의심하면 못 쓴데이…. 내가 괜찮다카면 괜찮다. 눈으로 보면 모르겠나?"
하신다.
 
근데 아줌마의 조개 까는 칼 놀림이 무척 빠르다. '명절 대목이라 많이 파셨겠네요?' 하니 예전과 경기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도 깐 조개껍데기가 안 깐 조개보다 많다. 
 
 
"맑은 술을 떠내어 땅에 부으며 붉은 빛깔 황소를 제물로 삼네. 조상의 신령 앞에 바칠 때에는 방울 달린 식칼을 한 손에 들고 깃털 뽑아 덜색을 고하고 나서 배 갈라 피와 기름 뽑아 내노라. 이렇게 삼가며 제사 드리니 향기는 그윽하게 피어오르네. 제사는 법도에 맞춰 이루어 졌네." - <시경>(詩經)에서
 
 
"모두가 변함없는데 오늘만은 무슨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새해 새 아침인가 보다."
- 차범석, '태양처럼 밝게 빛나라'에서
 
 
우리나라 명절 중 '추석'과 '설날'은 '조상의 날'. 조상을 섬기는 제사에 대해 공자는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다. 제사상을 아무리 정성껏 차려도 제사를 지낼 가족들이 다 모이지 않는다면 제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현대인에는 실천이 정말 힘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마음이 있어도 사는 일에 매달려 명절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은 정말 물 한 그릇에 마음의 정성으로 대신할 수 있겠으나 '까마귀 모르는 제사(자손이 없는 제사)'라는 옛말도 되새겨 봐야 할 것 같다.
 
아무튼, 까다롭고 힘든 명절 장 보기가 점점 가족이 함께 나들이 삼아 장을 보는 문화로 발전되어 간다. 자갈치 시장에 나와 장보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성이지만 남성들도 아이와 함께 장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정말 자갈치 시장은 진짜 눈으로 보면 안 살 수 없는 시장이다. 한두 가지 사려고 왔는데 열두 가지 이상을 사고 말았다. 그래서 더 기분이 좋다. 명절 장바구니는 무거울수록 좋다. 명절 준비에 바쁜 어머니가 잊어버리고 사오지 못한 '작은 장'을 대신 봐서 돌아가는 어린 날처럼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명절 장보기는 여느 장보기보다 확실히 즐겁다.

태그:#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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