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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 가운데는 사진을 더 좋아하는 분도 있을 것이며, 그림을 더 좋아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진을 더 좋아하는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이 둘을 또 하나의 매체라고 볼 때, 사진이 갖는 기록에 대한 편리함과 기억이라는 사실성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과 사진의 특징을 큰 테두리 안에서 비교해보면, 그 성격이 사진은 객관적이며 그림은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과 그림의 차이를 말해주는 두 기록

다시 말하면, 사진기를 통하여 만들어진 사진이라는 결과물은 그 정확성 때문에 기록의 객관성을 보장받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눈과 마음을 통하여 손과 붓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창작물은 그 작가의 느낌과 해석에 따라 다른 기록과 결과물로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처럼 두 매체의 유사한 특성과 해석의 다른 속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합니다. 베르너 비숍(Werner Bischof, 스위스, 1916-1954)의 사진과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 프랑스, 1814-1875)의 그림을 통해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표현되는 두 매체의 차이점을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비교하여 감상할 비숍의 사진과 약력은 <사진의 역사>(보먼트 뉴홀 지음, 정진국 번역, 열화당, 2003)란 책과 '매그넘 포토'(www.magnumphotos.com), '비숍의 누리집'(www.wernerbischof.com), 밀레의 그림과 약력 등 관련 해설은  브리태니커사전과 'Claud Monet Life and Art'(www.intermonet.com), 'Monet Cyber Gallery'(www.monet.pe.kr)를 참고하였습니다. 영문은 발췌해 번역하였으며 종합하여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하급귀족의 행세(Hidalgo state), 멕시코, 1954
 하급귀족의 행세(Hidalgo state), 멕시코, 1954
ⓒ 베르너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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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비숍이란 기자의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전쟁 사진'과 '세계전쟁 사진', 그리고 '일상을 포착한 사진'으로 구별하여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오늘의 작품은 그 사진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른 서정 깊은 풍경 사진들 가운데서 고른 한 점입니다.

비숍의 자세한 약력은 앞에서 소개한 설명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위 사진과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비교하여 감상할 것입니다.

비숍은 1916년,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태어나 1932년에서 1936년까지 예술과 기술에 관련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42년에 광고사진 작업실을 열어 본격적인 사진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풍경 사진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던 비숍

1940, 스위스
▲ 비숍의 자화상 1940, 스위스
ⓒ 베르너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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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에 창간된 스위스의 미술잡지 <DU>의 일원으로도 참가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이 때는 동물과 식물을 포함한 접사 사진이나 고요하고 풍요로운 풍경 사진을 주로 찍어 발표하던 사진작가였습니다.

그러나 1945년에는 프랑스, 독일, 폴란드 등지의 피난민들을 찍어 그 참상을 알렸습니다. 또한, 1950년과 1953년 사이에는 한국전쟁에도 참여하여 그 현장과 실상을 쫓아 보도하던 종군기자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1949년에는 세계대전과 9·11 사태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의 사건들을 보도하는 사진가들의 모임인 '매그넘'(Magnum)에도 가입하여 활동합니다. 이때 발표한 전쟁 사진들이 화제가 되면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했던 보도사진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1948년에는 헝가리를 비롯하여 유럽을 여행하며 취재한 작품들이 <라이프>(LIFE) 잡지에 실리면서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 후 멕시코를 취재하고 칠레를 거쳐 페루로 여행하던 1954년, 그의 나이 38세에 안타깝게도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맙니다.

비숍이 유언처럼 남긴 그림같은 사진

위 사진은 이렇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의 생애 마지막 해인 1954년에 비숍이 유언처럼 남긴 유작입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1954년의 완성도 높은 여러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며, 현장의 분위기가 실감 나게 전해지는 걸작입니다.

이는 멕시코에서 찍은 사진으로, '스페인의 하급귀족, 또는 하급신사(Hidalgo)'란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아 하층민의 삶을 희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에 소개했던 밀레의 '경건한 그림'들과도 닮아 있는 사진입니다.

그는 세계의 전쟁터를 누비며 그 생생한 현장에서 인간의 참담한 모습과 인간의 깊은 내면에 숨쉬고 있는 실낱같은 희망을 포착한 사진들을 보도했던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위의 사진에서도 인간에 대한 비숍의 따듯한 애정과 아름다운 시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인 작품입니다. 오른쪽 앞에 위치한 양치기만 정지해 있을 뿐, 사진 속에 포함된 다른 피사체들은 모두 움직이고 있는 진행형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뒷배경으로 따라오고 있는 다른 양치기도 뒤처진 양들을 몰고 있으며, 양들의 시선이나 다리의 동작도 하나하나 모두 생생하기만 합니다. 비록 흑백이지만, 흙먼지 바람의 그림자가 뒤편의 지는 석양에 반사되어 아련한 정취를 더해주는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양치기 소녀와 양떼(Shepherdess with her flock), 캔버스에 유화, 1864, 프랑스
 양치기 소녀와 양떼(Shepherdess with her flock), 캔버스에 유화, 1864, 프랑스
ⓒ 장 프랑수아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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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 해도 밀레의 위 그림은 매우 익숙할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해에 소개했던 "노동의 신성함"을 노래한 6점의 그림으로, 그 분위기가 경건하여 흔히 종교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입니다.

밀레의 자세한 약력도 앞에서 소개한 설명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서는 위 그림과 관련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비교하여 감상하겠습니다.

바르비종파를 창시했던 사실주의 화가, 밀레

목탄 스케치, 1847, 파리
▲ 밀레의 자화상 목탄 스케치, 1847, 파리
ⓒ 장 프랑수아 밀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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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는 1814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그루치라는 작은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그림공부를 하였습니다. 1837년에는 파리로 유학하여 공부하면서 본격적인 그림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그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린 농촌 풍경이 많았습니다. 농부의 아들로 자랐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농부들의 고단한 삶과 노동의 일상을 그림으로 담아냈으며, 농촌의 풍경과 자연을 많이 그렸습니다.

1849년에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이라는 작은 마을로 거처를 옮기면서 고향 풍경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제작합니다. 그래서 그를 프랑스 회화의 한 유파인 '바르비종파'(派)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합니다.

19세기 중엽에는 쿠르베(Gustave Courbet, 프랑스, 1819-1877)와 더불어 농촌 생활과 자연 광선을 주제로 한 그림을 선보여 사실주의 화가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풍요롭고 조용한 분위기의 풍경 그림들은 인상주의 풍경화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종교화 같은 느낌의 서정성 깊은 풍경화

1960년 이후, 이런 농촌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발표한 '이삭줍기'와 '만종'은 이 시기에 제작된 대표적인 걸작입니다. 위 그림도 이때 제작한 그림 가운데 하나이며, 당시의 분위기가 실감 나는 작품입니다.

그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이 매우 고요한 정취와 경건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데, 자연을 향한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고 하여 '종교화가'로도 평가합니다. 위 그림에서도 그런 밀레 고유의 경건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옵니다.

'이삭줍기'와 '만종'으로 농민화가라는 그의 위치를 확인시켰습니다. 밭에서 일을 끝내고 저녁 종이 울리는 가운데 감사 기도를 드리던 부부의 모습처럼, 위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양떼를 몰던 양치기 소녀의 고개 숙인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의 신성한 감동이 우러납니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매우 차분하고 여유로운 느낌의 정적인 그림입니다. 마치 정지된 순간을 포착한 사진 한 장을 보고 있는 것처럼, 그림 안의 상황은 조용하고 고요해 보입니다.

오른쪽 앞에 있는 양치기 소녀는 물론, 뒤편의 양을 모는 도우미개와 많은 양들도 모두 묵묵히 풀을 뜯고 있을 뿐입니다. 뒷 배경의 구름도, 그 구름을 투과한 저녁 햇살도 숨죽인 듯 보입니다.

서정성 깊은 색채가 닮아 있는 두 기록

사진과 그림을 비교하여 감상하고 소개하기는 처음입니다. 어떻게 느껴집니까? 비숍이 멕시코에서 찍은 위 사진과 밀레가 양치기 소녀를 그린 아랫그림은 둘 다 그 서정성이 닮아 있으며, 그 감동도 같은 깊이로 전해져 옵니다.

이 두 사진과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참 많이 신기하고 놀랐습니다. 두 작가는 한 세기인 100년 정도의 차이를 두고 다른 시대를 살다간 예술가들입니다. 위 순간을 포착한 그 시간과 그 때의 분위기, 피사체인 주인공의 직업과 신분, 옷매무새 등 모든 상황이 완벽할 만큼 유사합니다.

마치 두 작가가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에 서서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낸 창작물인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화면의 구성도 어느 누가 연출을 한 것처럼 닮았는데, 양치기 소녀와 소년의 위치도, 이 두 주인공과 배경인 하늘 사이의 양들의 배치도 같은 구조입니다.

이 두 영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나 구도, 그 담백한 색감까지 무척 흡사합니다. 비숍은 빛의 역동성을 최대한 살려 화려한 흑백을 보여주며, 밀레는 빛의 부드러움을 살려 단순한 색채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두 작가 가운데 한 명이 서로의 작품을 습작했다고 주장해도 믿어줄 수 있을 만큼 닮아 있습니다.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합니다. 후대에 살았던 비숍이 과거의 어느 날, 먼저 살다간 밀레의 위 그림(1864년)을 감상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멕시코를 여행하며 만난 비슷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이 한순간이 유사하게 포착됐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 잡은 기억과 일상의 추억, 그 속에서 느끼는 삶의 아름다움에 관한 감동은 똑같은가 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서로 다른 문화와 시공, 서로 다른 도구의 사진과 그림이라는 다른 매체에도 불구하고 서로 닮은 영상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전쟁터의 참담한 상황을 투영한 비숍의 따듯한 시선과 농촌의 고단한 일상을 투영한 밀레의 아름다운 시선이 서로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던 두 작가의 내면과 사상이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정성의 깊이와 질감이 다른 두 기록

그러나 두 기록의 서정성의 깊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위 사진에서 표현한 비숍의 서정은 일상의 고단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아래 그림에서 표현한 밀레의 서정은 일상의 경건함을 강조합니다.

위 사진에서 양을 몰 도구를 들고 서 있는 어린 양치기 소년의 행색은 남루한 옷차림에 맨발입니다. 그리고 작은 키에 움직임이나 표정이 힘들고 지쳐 보입니다. 여기에 몰아치는 먼지바람이 그런 양치기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고단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아래 그림에서 양을 모는 지팡이를 두 손에 가지런히 모아들고 서 있는 양치기 소녀의 행색은 깨끗한 옷차림입니다. 머리에 두른 옷감이나 망토도 잘 갖추어 입었으며, 그녀의 자태도 단정합니다. 석양의 부드러운 빛과 색채가 양치기 소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경건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두 기록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이에서 다르며 차이가 있습니다. 위 비숍의 사진은 집으로 향하는 해 저문 들녘의 다급한 풍경이 잘 드러나 있어 아련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래 밀레의 그림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여유로운 풍경이 화면 가득 퍼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해지게 만듭니다.

이는 비숍과 밀레가 다른 시대를 살며 다른 상황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불어 그 다름의 극명함은 사진과 그림이라는 두 매체의 엄격한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순간성과 객관성이 바탕인 사진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며, 기간성과 주관성이 바탕이 되는 그림의 특징 때문일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비숍, #밀레 , #양치기 , #BISCHOF, #MIL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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