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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두 친구 이야기
- 글쓴이 : 안케 드브리스
- 옮긴이 : 박정화
- 펴낸곳 : 양철북(2005.11.18.)
- 책값 : 8500원

 

 (1) 서울, 전철, 동무, 고향


 서울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은 고달픕니다. 가는 길이 멀어서가 아니라, 누구 하나 안 지친 사람이 없는 사람들만 가득한 대중교통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볼일 마치고 전철을 타고 수원이나 안산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고달플 테지요. 전철에 탈 때부터 자리에 앉을 꿈을 꿀 수도 없는 가운데, 적어도 한 시간, 또는 한 시간 반을 서서 가야 하는데, 그렇게 전철로만 간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 전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또 삼십 분이나 한 시간을 들어가야 하고, 버스에서 내린 뒤 또 걸어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걸어야 할 테니까요.


.. 그러나 벤 아저씨도 나중엔 유디트의 아빠처럼 떠나버렸다. 어느 목요일 밤, 아무 말도 없이. 아저씨와 엄마는 싸우지도 않았다. 처음에 엄마는 무척 초조해 하더니 나중엔 화를 냈다. 그 후 며칠 동안 유디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덕분에 엄마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어느 날 밤 엄마는 유디트를 후려갈겼고, 유디트는 쓰러지면서 옷장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  (18쪽)

 

 옆지기 고등학교 적 동무를 서울 회기동에서 만나고 헤어진 때는 저녁 열 시 반. 전철을 타니 열 시 사십육 분. 터덜터덜 달리는 전철이 동인천역에 닿으니 열두 시를 훌쩍 넘겼고, 역부터 집까지 걸어오니 거의 새벽 한 시.

 

서울사람들은 대중교통도 늦게까지 있으니, 저녁 열 시 조금 넘었을 무렵부터 집으로 돌아갈 걱정을 하는, ‘서울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 마음을 모릅니다. 서울에서 사는 회사사람들은 일곱 시나 여덟 시쯤 끝나 가볍게 술을 한잔 마신다고 하여도 겨우 한 시간 남짓 앉아 있다가 금세 자리를 떠야 하는 아쉬움을 살갗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갔어도 자기 집에 닿으면 열두 시는 우습지 않고 한 시께에 이르니, 몸이 축날 테지요. 더욱이 이튿날 새벽 다섯 시 반쯤부터 짐 챙기고 부랴부랴 새벽버스 타고 전철역에 가서 서울 가는 전철에 몸을 싣고 오징어처럼 짓눌리며 선 채로 꾸벅꾸벅 졸며 회사에 닿아도 여덟 시가 넘어가니, 날이면 날마다 몸은 고단하고, 어서 빨리 주말이 찾아와 모자란 잠 좀 자자고 재촉하게 됩니다.


.. “왜 못했니?” “저…… 또 두통이 도져서요.” 유디트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좋아. 그럼 우선 해 놓은 것만 보자꾸나.” 유디트는 초조하게 책가방을 뒤졌다. 베크만 선생님은 기다리면서 유디트의 수그린 머리를 보았다. 곧은 금발이 얼굴을 덮었다. 베크만 선생님은 문득 저런 스웨터를 입으면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디트가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힐끗 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잔뜩 겁먹은 눈이었다. 왠지 이 아이는 너무 연약해 보여. 도저히 화를 낼 수 없는 아이야 ..  (31쪽)


서울 회기동에서 인천 끝자락까지 달리는 전철에 타고 있는 고단함에 찌들고 쩐 사람들 얼굴을 봅니다. 갓 스물을 넘긴 아가씨들은 얼굴에 화장을 짙게 발랐지만, 그 화장 뒤에 감춰진 얼굴이 얼마나 힘겨워할까가 마음에 그려집니다. 젊은 사내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리가 없어 서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일이 얼마나 고단할까요. 그렇다고 자리에 앉아서 가는 사람도 아늑하지만은 않습니다. 좁아터진 전철 걸상에 옹크린 채, 더구나 겨울이라 다들 옷이 두툼하니 더욱 낀 채로 꼼짝을 못하고 한 시간 넘게, 또는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 일은 고문이에요. 아침 일곱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자율학습에 목이 매어 얼굴이 파리해졌던 중고등학교 수험생 때에도 오십 분에 십 분씩 틈을 주고 걸상에 짓물러진 엉덩이를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모두들 무엇 때문에 이리도 먼 길을, 날마다 네 시간 남짓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며 살아야 할까요. 날마다 네 시간씩 전철과 버스에서 보내면서 만나는 사람은 몇이나 되고, 이렇게 만나는 사람과 몇 시간쯤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가요.

 

 얼마나 깊은 만남과 사귐이 되는지요. 우리들 ‘서울 아닌 곳 사람’은 왜 ‘서울 아닌 우리 고향이나 터전’에서 일거리를 찾을 수 없는가요. 왜 인천에서, 왜 수원에서, 왜 안산에서, 왜 부천에서, 왜 강화에서, 왜 일산에서, 왜 용인에서, 왜 구리에서, 왜 문산에서, 왜 광명에서, 왜 안양에서, 왜 군포에서, 왜 이천에서, 왜 의정부에서, 왜 동두천에서, …… 서울까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찾아가고 돌아가고 해야 하나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우리와 어릴 적부터 같은 골목길과 놀이터와 집과 학교와 마을에서 뒹굴고 뛰놀던 동무들하고 복닥이고 부대끼면서 오붓하게 살아가지는 못하는가요.


.. 미하엘이 말을 더듬거려도 아빠는 결코 재촉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의 돌 같은 침묵 때문에 미하엘은 더욱 긴장했다. 미하엘은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등과 배의 발진과 갑작스럽게 높아지는 열에 시달렸다. 아파서 침대에 누워 있을 때조차 아빠는 읽을 책과 공부할 거리를 주었다. 당연히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다 ..  (50쪽)


 광명에서 태어나고 일산에서 자란 옆지기네 동무들한테 뿌리는 무엇일까요. 옆지기가 태어났던 들판 판자집은 모두 아파트로 바뀌어, 이제는 어디에서 태어나고 뛰놀았는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숲과 쇼핑센터로 바뀌어 가는 일산에는 새 학교를 자꾸자꾸 짓습니다. 분당도 그렇고 성남도 그렇고 용인도 그렇습니다. 인천에서도 논밭을 메우고 산을 깎아서 만든 연수동에 새 학교를 뚝딱뚝딱 지었고 예전 도심지에 있던 학교를 그리로 옮겼습니다. 서울 강북 종로에 있던 학교를 강남으로 옮겼듯이. 그러면서 요즈음은 송도 새도시에 새 학교를 짓는다고 법석입니다.

 

 우리들한테는 새로 짓는 집이 바로 고향이고 일터이며 동네가 되고 있습니다. 고향이라는 이름은 주민등록증에만 남을 뿐, 인천사람이고 서울사람이고 부산사람이고 다른 틈이 보이지 않습니다.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산속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골목길 달동네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들판에서 태어나 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멘트 병원에서 태어나고 시멘트 학교에서 배우며 시멘트 아파트에서 삽니다. 쇳덩이 자가용에 아버지 어머니가 태워서 움직이게 하며 두 다리는 흙 한 뼘 밟을 일이 없지만 십만 원도 넘는 아주 좋은 운동신을 신고 발바닥은 보송보송 말랑말랑입니다.


.. 유디트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동생을 데리러 오는구나. 한 번도 늦은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러면 네 시간이 없지 않니?” 소피가 다시 콜라를 따르며 말했다. “이,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나를 위한 시간이라……. 데니스를 데리고 집에 가면 할 일이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엄마가 하루 종일 직장에 나가 있기 때문이다 ..  (64쪽)


 늦은밤 인천으로 달리는 전철은 알맞게 이야기가 있고 알맞게 조용합니다만, 사람들 말소리는 시끄러운 전철 소리에 묻힙니다. 창밖으로는 높직한 울타리가 가득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땅위를 달리고 있어도 땅위를 달리는지 어쩐지 알 수 없습니다. 창문을 내다보아도 어느 역에 서는 줄 모릅니다. 전철 안에 마련된 자막방송을 눈이 빠져라 들여다보아야 겨우 알 수 있습니다.

 

 졸고 있는 사람, 자고 있는 사람, 주정하는 사람, 수작 거는 사람, 손전화 문자 보내는 사람, 들고다니는 텔레비전 보는 사람이 있으나 책 읽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긴요,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이 뻘쭘한 때에, 이 지친 때에. 그래도 더러더러 책 하나 손에 쥐는 사람이 보입니다. 흔한 싸구려 사랑타령 소설이든, 한 달 만에 일억을 벌었다는 재테크 놀음이든, 윗사람한테 잘 보이고 빨리 진급하는 재주를 일러주는 처세학이든, 책 하나 쥘 수 있는 매무새가 반갑습니다.

 

 아침에 서울로 들어가는 전철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양복쟁이 아저씨가 으레 두 사람, 옷 말끔히 차려입고 예수 사랑 외치는 아주머니가 으레 한두 사람 있습니다. 밤깎이 칼을 팔고, 석유 냄새 코를 찌르는 실장갑을 팔며, 주머니에 넣는 손전등을 파는 한편, 몇 장에 만 원짜리 음반을 팔고, 양말도 팔고, 허리띠도 팔고, 우산도 팔고, 선풍기덮개도 팔고, 싸구려 볼펜도 팔며, 덤 얹어 주는 반창고를 파는 한편, 하모니카 장애인 아저씨가 지나가고, 서로 꼭 붙잡은 채 걷는 장님 늙은 부부가 지나가고, 휠체어에 몸을 실은 말없는 아저씨가 둘쯤 지나가고, 한 다리를 절며 동냥을 하는 아저씨, 예수찬양 테이프를 틀어놓고 눈감은 채 동냥하는 아지매, 껌을 들이밀며 파는 할머니, 쇠돈 담긴 종이잔을 흔들며 돈 좀 넣으라는 할머니, 말없이 복사종이를 돌리며 천 원을 바라는 젊은이, …… 들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인천으로 돌아가는 밤전철에는 아무런 장사꾼이 없고 아무런 설교자가 없으며 아무런 동냥꾼이 없습니다.


.. 엄마는 유디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생크림 케이크까지 사 왔다. 하지만 그 케이크 때문에 배가 아팠다니 묘한 일이었다. 생크림은 너무 기름지고 달았다. 유디트는 위장이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오랜만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제 몫으로 준 큰 조각 하나를 억지로 입에 쑤셔넣었다. 때맞춰 화장실에 가서 먹은 것을 다 토해냈다. 다행히 엄마는 화를 내지 않았다 ..  (98쪽)


 인천에서 서울 이문동으로 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던 1994년 한 해 동안, 날마다 줄잡아서 일곱∼열쯤 되는 장사꾼과 동냥꾼과 설교자를 만났습니다. 한 해쯤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보는 사람이 있어서 나중에는 얼굴을 알아보기도 합니다. 굵직한 목소리로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던 절름발이 아저씨가 어느 날 말끔하게 머리를 깎고 옷도 깔끔하게 입은 채 그 “조금∼만, 도와, 주쎄요!” 하고 외치며 지나가는데, 제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아이구, 오늘은 머리 깔끔하게 깎고 왔네!” 하며 웃습니다. 동냥꾼 아저씨는 살짝 곁눈으로 바라보다가 지나가는데, 목소리에 살며시 더 힘이 실리며 한결 굵어집니다.


.. 유디트는 미하엘을 집에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그렇게 멍이 들었냐고 물어 볼 것이 뻔하고, 그러면 친구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너무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를 위해 일부러 찾아온 친구를 모른 척하다니. 이 학교에서는 유디트를 찾아온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  (105쪽)


 어릴 적 한동네에서 치고박고 싸우기도 하고, 골목길 술래잡기도 하고, 숭의동야구장 빈터에서 야구놀이도 하던 어릴 적 동무들 가운데 고향 동네에 그대로 눌러앉아서 살아가는 녀석들이 몇몇 있는 한편, 서울로 기나긴 전철길을 따라서 졸음과 고단함에 쩔디쩐 채로 살다가 슬그머니 서울로 집을 옮기며 떠나간 녀석들이 많이 있습니다. 혼인한다고 전화하면서 예식장을 알려줄 때면 으레 자기들 고향 동네가 아닌 서울 예식장이기 일쑤고, 새살림 얻는 집도 인천이 아닌 서울이기 마련이며, 한동안 돈이 없어 집값 싼 인천에 머물다가 어느새 서울로 훌쩍 날아가곤 합니다.

 

 집을 서울로 옮기면서, 동무 녀석들은 전철을 버립니다. 버스에서 떠납니다. 한결같이 자가용을 굴립니다. 그 옛날, 똥배 하나 없고 허벅지 단단하여 공차기를 하든 농구나 배구놀이를 하든 지치지 않고 몇 시간이고 뛰어놀던 동무들이, 이제는 오 분 달리기를 해도, 아니 일 분만 달리기를 해도 헉헉대지를 않나, 백 미터를 못 걸어가서 택시를 타자고 하지 않나, 애엄마도 아닌데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술을 마시고 밥을 사먹고 해마다 새로 나오는 손전화 기계를 장만하며 또닥또닥 누르면서 지냅니다.

 


 (2) 주먹질


 한 사람한테는 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돈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책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를 아끼는 사랑과 믿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한 사람한테는, 그이가 나누려는 뜻과 마음이 얼마나 있으면 좋을까요.


.. “게다가 싸구려도 아니지. 진열장에서 그 옷을 보자마자 생각했지. 내 딸한테 사 줘야겠다고.” 엄마는 이렇게 말하면서 유디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엄마는 찻주전자한테 말하고 있었다 ..  (122쪽)


 1994년 봄날, 대학교 선배가 된 형들이 우리들 새내기를 부르며 주먹질을 하고 머리박기를 시킵니다. 다른 동무들은 선배들 말이 무서워 따르지만, 저는 선배들 주먹질을 손으로 막고 머리박기를 하지 않습니다. “니가 뭔데? 이러는 게 선배냐? 이 따위 짓거리가 대학생이라는 선배자식들이 하는 거냐? 부끄럽지 않아?” “뭐야? 이 자식이!”

 

 1995년 11월 어느 날, 논산 훈련소에서 조교한테 발차기를 맞고 머리박기며 얼차려며 갖가지 쓰라림을 겪습니다. 1996년 1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디엠지 안쪽에 있는 소총중대로 배속을 받아 들어간 첫날이 지나고 이튿날 새벽 다섯 시께. ‘비상’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니, 싸리비 한 자루씩 나누어 주며 병장 한 사람이 이끄는 대로 어디 산속을 깊디깊이 들어갑니다. 한 시간 남짓 걷기만 해서 들어간 산속에서 길이 하나 나옵니다. 헉헉거리면서도 병장 그이 엉덩이만 보며 일 미터 거리를 지킨 채 올라가서 뒤를 돌아보니, 분대원이며 내 전입동기며 낙오를 했습니다. 병장은 나를 빼놓고 다른 분대원과 전입동기한테 머리박기를 시키고 군화발로 갈비뼈와 옆구리를 걷어찹니다. 갖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죽어야 하는구나. 그냥 있어도 죽고, 뒹굴어도 죽고. 또 죽어야 하는구나.


.. 유디트는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항상 조심해. 미하엘은 생각했다. 유디트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애를 알아야만 해. 유디트가 말을 많이 하지 않았으므로 미하엘은 종종 몸짓이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고 생각이나 감정을 짐작해야만 했다. 가끔은 상처받은 것 같은, 아주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상처받은 표정이라…….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걸까? ..  (130쪽)


 상병 계급장을 달고 6호봉이 지난 1997년 사월 어느 날, 1소대 내무반으로 들어가 김 아무개 일병 이름을 부릅니다. 침상에 앉아 고개를 살짝 들고 ‘네’ 하는 그녀석. 군화 신은 채로 침상에 올라가 그대로 김 아무개 일병 얼굴을 걷어찹니다. 잇달아 어깨며 배며 가슴이며 다리며 걷어차고 밟습니다. 그러고 나서 1소대 왕고참 병장한테 거수경례를 붙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돌아나옵니다.

 

 때리면 맞고 굴리면 구르고 죽으라 하면 죽는 시늉만 내며 살다가, 살다가, 그만 나도 때리는 사람 굴리는 사람 죽으라고 외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김 아무개 일병이라고만 말해 오다가 ‘야이 찢어죽을 종간나 아무개 새끼야’를 아무렇지도 않게 읊어대는 내 고참과 똑같은 군인이 되어 버립니다. 삽을 들었으면 삽날이고 삽자루고 몽둥이가 되고, 총을 들었으면 총부리고 개머리판이고 몽둥이가 됩니다. 빈손이면 주먹이, 군화를 신었으면 군화발이 몽둥이입니다.


.. 이모가 있는 한 주는 후닥닥 지나갔다. 유디트는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아 그 안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리아 이모가 있는 집안엔 구석구석 봄기운이 감돌았다. 엄마도 달라 보였다. 엄마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  (215쪽)


 뺨을 맞으면 뺨이 얼얼하면서도 뒷간에서 눈물을 흘렸는데, 제가 뺨을 후려갈기면 뺨맞은 그 녀석이 뒷간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요. 저는 1997년 12월 강원도 양구 눈덮인 도솔산을 군짐차에 실려 만기전역을 하며 떠났지만, 얻어맞은 뺨에 흐르는 눈물은 1998년에도 1999년에도 2000년에도 2008년인 오늘에도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채 고스란히 이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군대라는 곳이 있는 동안. 사람을 사람이 아닌 계급으로 나누고, 사람이 사람을 따스하게 껴안지 않으며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빨리 총알 적게 쓰며 죽여 없앨 수 있는가를 머리속에 집어넣고 몸에 익히도록 하는 그런 군대라는 곳이 우리 사회에 또아리를 틀며 버티고 있는 동안.


.. “그래, 뭐라던?” 할머니는 뭔가를 캐내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매맞는 것 말이다.” “트루더!” “얘기 좀 하게 입 다물어요!” 할머니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미하엘에게 몸을 돌렸다. “그 애가 늘 맞고 지낸다는 건 알고 있었니?” “한 번 맞았던 건 알아요. 그 후로 학교가 끝나고 바래다주었죠. 때린 남자애들을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남자애? 남자애라니?” “유디트를 마구 때린 애들요.” “남자애들!” 다시 한 번 할머니는 조롱하는 듯이 웃었다. “남자애들이 자기를 때렸다고 하던? 그건 엄마 짓이었어!” 미하엘은 놀란 눈으로 할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로 피가 쏠렸다. 비좁고 후덥지근한 방 안에 있으려니 점점 어지러워졌다. “엄마가?” “놀랄 줄 알았다. 그 여자는 대낮에 별이 보일 정도로 호되게 자식을 팼다. 그 애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가끔 여기까지 들렸지.” ..  (256∼257쪽)


 주먹질과 욕설과 얼차려와 괴롭힘과 따돌림 들로 ‘저마다 소중한 목숨붙이’였던 사람을, ‘누구보다도 끔찍하고 몸서리쳐지는 살인병기’로 뒤바꾸어 놓는 군대계급 소굴은, 군대를 벗어난 뒤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집안에서도, 동네에서도 어쩌는 수 없이 이어집니다. 사랑하는 아가씨를 만나도 제멋대로가 되어 쉽게 손찌검을 하고, 자기 아이한테도 이웃 아이한테도 쉬 짜증을 부리며 손이 먼저 올라가는 남정네가 되게 합니다. 스스로 못된 손목아지를 잘라버려야겠다고 다짐하며 고치고 추스르고 깎아내고 도려내는 동안에도.


.. “장볼 돈으로 인형을 샀지!” 섬뜩한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엄마의 손에 빵칼이 들려 있었다. 유디트는 숨이 멎었다. “안 돼, 엄마……. 안 돼! 인형은 안 돼!” 유디트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는 코알라 인형에 칼을 쑤셔넣었다. 네 번, 다섯 번 칼질을 반복하는 사이에 인형은 넝마조각이 되었다. 엄마는 칼을 다시 치켜올리고 유디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디트는 얼어붙은 채, 칼이 번쩍거리는 것을 보았다 ..  (282쪽)


 농약을 뿌려서 거두는 곡식에 농약이 배이고 쌓입니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넘치는 도심지에 뿌연 먼지띠가 겹겹이 쳐지고 늘어납니다. 돈 많이 벌자고 하는 곳에 돈이야 많이 들어오겠지요. 바라는 것은 돈뿐이니까요.

 


 (3) <두 친구 이야기>라는 책


 2005년 12월, <두 친구 이야기>를 눈깜짝할 사이에 읽어냈습니다. 2008년 1월, <두 친구 이야기>를 다시 집어들고 열흘에 걸쳐서 자근자근 씹어먹듯이 천천히 읽습니다. 할머니가 자기 어머니한테 모질게 했던 끔찍한 주먹질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이 어머니가 자기 딸한테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퍼붓고 있는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감돕니다.

 

 여리고 작은 아이 ‘유디트’는 날이면 날마다 어머니한테 얻어맞습니다. 이웃집 할머니한테까지 들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한테 잘못이 있어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니고, 아이가 미워서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닙니다. 할머니가 어머니한테 그랬듯이, 어머니가 딸한테 하는 주먹질과 괴롭힘과 따돌림은 아무런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 까닭 없이, 그냥 미워서, 그러면서도 제 자식이니 때린 다음에 눈물을 흘리고.


.. “유디트를 도와야 해. 유디트의 엄마도 마찬가지고. 더 손을 쓸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런데 어떻게 주소를 찾아내지?” ..  (263쪽)


 작지는 않지만 여린 아이 ‘미하엘’이 있습니다. 미하엘은 자기를 때리지는 않지만 모질게 괴롭히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홀로 외로우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다가 병까지 앓는 미하엘한테, 이웃에 살던 ‘스테피’라는 계집아이는 마음을 열어 주면서 ‘함께 나누어서 좋으니까 친구지’ 하는 깨달음을 나누어 줍니다. 이 아이 스테피는 뒷날 미하엘이 당차게 ‘아버지하고 안 살겠다’고 하면서 네덜란드에 있는 이모하고 살겠다고 자기 권리를 말하는 뒷힘이 되어 줍니다. 그리고 미하엘은 고향나라 네덜란드에서 만난 유디트를 보면서, 미국에서 지내며 아버지한테 시달리는 동안 만났던 스테피 모습을 그림자처럼 느낍니다. ‘새로운 두 친구’가 무엇을 서로 나누어야 하는가를 느낍니다.


.. 유디트는 천천히 돌아누웠다. 여전히 숨쉴 때마다 힘들었다. 엄마가 조리대에 처박을 때 갈비뼈를 다친 게 틀림없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나도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야. 내 코알라처럼 말이야. 다시 한 번, 유디트는 미하엘의 목소리를 들었다. “뭔가 해야만 해…….” ..  (284쪽)


 스테피는 미하엘한테 “텔레비전을 혼자 보면 엄마하고 같이 볼 때보다 훨씬 재미없어. 같이 있으면서 엄마가 웃으면 나도 더 많이 웃게 돼.”(52쪽) 하고 말했습니다. 미하엘은 유디트한테 “유디트, 너한테 엄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너희 집에 갔을 때 …… 넌 남자애들이 때렸다고 말했지?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난 친구잖아, 안 그래? 왜 그냥 맞고만 있어? 누군가한테 말을 해야 해. 엄마가 자기 자식을 때리는 건 정상이 아니야. 그냥 넘길 일이 아니라고! 네가 기다리기만 하면 엄마는 널 계속 때릴 거야. 뭔가 해야만 해. 계속 비밀로 할 수 없어. 우리가 도와줄게. 약속해.”(273∼279쪽) 하고 말했습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아끼는 동무이기 때문에, 몸과 몸으로도 아끼면서 함께 웃고 함께 울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내 즐거움은 네 즐거움이 되고 네 아픔은 내 아픔이 되는 동무이기 때문에, 나 혼자 걷는 두 걸음이 아닌 너와 함께 한 걸음씩 걷고 싶은 동무이기 때문에. 그런데, 유디트를 괴롭히며 때리는 어머니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동무를 만날 수 있을까요? 스스로 동무를 찾으려고 할까요?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 + 헌책방 +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두 친구 이야기

안케 드브리스 지음, 박정화 옮김, 양철북(2005)


태그:#청소년문학, #책읽기, #안케 드브리스, #두 친구 이야기, #아동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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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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