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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에서 마락리까지 내리막길에서 만난 마을의 흔적들

고치령 아래 약수터: 해발 750m 높이에 있다.
 고치령 아래 약수터: 해발 750m 높이에 있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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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령을 넘어 마락리 방향으로 향하니 바닥의 눈을 밟는 느낌이 다르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다. 이곳 길은 포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흙 특유의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것이다. 약 50m쯤 내려가 왼쪽으로 샘이 하나 있다.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그 사이로 시원한 물을 내뿜고 있다. 추운 겨울인데도 한 모금 마시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한 여름에는 지나는 과객의 목을 축여주던 감로수였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마락리를 지나 영춘면 의풍리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옛날 한때는 순흥과 영춘을 이어주던 버스가 다니기도 했다니 그때 오히려 이곳은 더 번성하던 동네였을 것 같다. 한 30분쯤 걸어내려 가자 왼쪽으로 새목이라는 마을이 나온다. 길옆에는 주막으로 쓰였던 폐가만이 남아 옛 일을 생각나게 하고, 마을은 안으로 좀 들어가 자리 잡고 있다. 추운 겨울이라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큰터 마을 입구에 있는 글자없는 표석
 큰터 마을 입구에 있는 글자없는 표석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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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분을 내려가니 왼쪽으로 큰터라는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입구에 글자가 없는 표석이 서 있는데 조만간 글자가 쓰여질 것 같다.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자 비닐하우스가 7-8동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주로 곰취를 재배하는 곳이란다. 산골마을을 다니며 확인한 바로는 사람들이 논농사보다 과수나 약초, 곤드래나 취같은 산나물을 재배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게 오히려 소득이 높다는 것이다. 쌀값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곳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으로 다리가 하나 놓여있다. 이름을 확인해보니 마락교이다. 겨울인데도 다리 밑으로 물이 콸콸거리며 힘차게 흐른다. 수량이 많기 때문이다. 소백산 자락에서 내려온 물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내려오는 산좋고 물좋은 동네이다. 그런데 농사가 돈이 되지 않고 교통이 나빠 사람들이 떠나면서 정말 궁벽한 산골 마을들이 되고 말았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오던 길을 똑바로 내려가면 마락리의 중심마을 마즈바우에 이르고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정말 첩첩산중에 있는 도화동에 이르게 된다.
 
마즈바우 사람들의 삶

마락 청소년 야영장: 옛날 마락국민학교를 야영장으로 쓰고 있다.
 마락 청소년 야영장: 옛날 마락국민학교를 야영장으로 쓰고 있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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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2-3분 걷자 제대로 된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바로 마락리의 중심마을 마즈바우이다. 먼저 제법 큰 건물이 보여 현장을 확인하니 마락 청소년야영장이다. 건물 모양으로 보아 옛날 학교였을 것 같다. 건물과 운동장을 한 바퀴 둘러보다 보니 경상북도 교육청에서 세운 교적비가 하나 나타난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옥대초등학교 마락분교장: 1964년 11월29일 개교하여 졸업생 147명을 배출하고 1991년 3월1일 폐교되었음.”

졸업생이 총 147명인 학교, 초등학교 중 가장 적은 졸업생을 배출한 학교일지도 모르겠다.

동네는 겨울의 적막 속에 조용하고 한적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 일행은 여기저기 사람을 찾아다닌다. 길에는 가시가 촘촘하게 달린 엄나무가 겨울과 싸우고 있다. 그래도 가장 먼저 눈에 띈 집이 마락산장이다. 부산에서 살다가 말년에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70대의 어른이 우리에게 따뜻한 칡차를 내놓는다. 동네 어른들이 다 어디가셨느냐고 물어보니 경로당에 한 번 가보란다. 통나무로 새로 지은 경로당에를 가보니 역시 아무도 없다. 여기저기 확인해보니 오늘 성황당을 짓느라고 사람들이 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임병천씨네 집에 모였다는 것이다.

마락리의 겨울을 지키고 있는 엄나무
 마락리의 겨울을 지키고 있는 엄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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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있는 집으로 옛날에는 꽤 넓었을 집이지만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 눈에는 좀 좁게 보인다. 방으로 들어가니 7-8명의 어른들이 계신다. 다들 칠십이 넘은 분들이다. 그리고 대부분 홀로 되신 분들이다. 그 중 74세의 임복규씨와 44세의 최종근씨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임복규씨는 원래 강원도 정선에 살면서 광산 일도 좀 하고 그랬는데 지금부터 한 30년 전쯤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마을 이장을 보고 있단다. 최종근씨는 이곳 마즈마우 토박이로 마락초등학교를 나왔다고 한다. 중학교는 고치령과 마구령 사이에 있는 미내재를 넘어 부석중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동네를 떠나 경기도 안산에 살다가 몇 년 전 다시 고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최종근씨가 이곳에 사는 가장 젊은 사람이 된다. 앞으로 마락리를 이끌어갈 젊은이인 셈이다. 사십대 중반이 젊은이인 것이 요즘 시골 마을의 세태이다.

마락리의 집 1: 벽에 나무껍질을 붙였다.
 마락리의 집 1: 벽에 나무껍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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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락리의 집 2: 재료를 모두 나무로 썼다.
 마락리의 집 2: 재료를 모두 나무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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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겨울에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고 한다. 지난 여름동안 일해서 수확한 작물들을 갈무리하거나 팔아 겨울을 지낸다는 것이다. 또 가끔 단산이나 영춘으로 나가는데 길이 막혀 그 일도 쉽지 않다고 한다. 겨울이 되면 소백의 산줄기에 푹 파묻혀 자연과 하나된다고 말한다. 요즘은 그나마 단산면에서 성황당 지을 돈이 좀 나와 이렇게 성황당을 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임복규씨가 한마디 한다. “그래도 고치령 산신님과 마락리 서낭님이 우리를 지켜주어 이나마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산골사람들의 순수함이 느껴지는 표현이다. 우리가 이것 저것 꼬치꼬치 캐묻자 이상한 듯 “왜 그래요? 경찰서에서 나왔어요?”하고 물어본다. 그것 역시 산골사람들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경계심과 순박함이다.
  
도화동에서 만난 서낙홍씨 부부

마을을 나와 우리는 정말로 더 산골인 도화동을 찾아나선다. 최종근씨가 우리와 동행해 주겠단다. 우리가 왔던 길을 되돌아 고치령 방향으로 가다 마락교를 지나 왼쪽으로 가면된다. 이 길은 옛날 마락리 사람들이 부석으로 넘어가는 길로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미내재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곳에서 한 30분 정도 가면 도화동에 이를 수 있다고 최종근씨가 말한다. 도화동이라면 말 그대로 복숭아 꽃이 피는 무릉도원이다. 올라가는 길은 정말 속세를 떠나는 느낌이다. 왼쪽으로 졸졸 흐르는 시내를 따라 눈 덮인 하얀 산길을 오르기 때문이다.

도화동 가는 길에 만난 석문
 도화동 가는 길에 만난 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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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다 보니 바위로 이루어진 석문(석門)도 보이고 나무가 넘어져 길을 막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나무문(木門)도 보인다. 또 작지만 폭포도 보인다. 한쪽으로는 60년대 조림한 낙엽송 군락이 빽빽하게 서 있다. 한 30분이 안되어 사람들이 산 흔적들이 보이고 집이 두어 채 나타난다. 옛날에는 한 5-6호 살았지만 이제는 모두 떠나고 80세의 서낙홍씨 부부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최종근씨가 집에 들어서면서 인사를 하니 서낙홍씨 부인이 나온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산골에 살아 고생을 많이 한 모습이다. 약간은 경계도 하는 듯하고 사람을 만나 반가운 듯도 하다. 집안을 한번 둘러본다. 안채 옆에 농기구를 넣어놓는 공간이 있고, 집 뒤에 김치꽝이 있다. 집 앞에는 변소가 있고, 그 오른쪽에 창고 같은 것이 있다.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이다.

서낙홍씨 집: 부인이 빨래를 걷고 있다.
 서낙홍씨 집: 부인이 빨래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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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서낙홍씨 모습
 방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서낙홍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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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마루 위에는 씨앗용으로 쓰기 위해 옥수수와 스슥이라고 불리는 조를 매달아 놓았다. 또 햇볕이 잘 들어서인지 빨래도 널어놓았다. 우리가 잠시 마루에 앉자 방에서 서낙홍씨가 얼굴을 내민다. 몸이 아파 하루 종일 방안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얼굴이 하얗다. “하루 종일 방구들만 지고 산대요. 너무 밖으로 나다니문 위험하대요. 내가 밖에 나가질 못해 미안해요”라고 말을 건넨다.

우리가 그에게 살아온 이력에 대해 물으니, 처음에는 제천군 덕산면에 살았는데 보은군으로 이사를 했다가 이곳 마락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영주와 부석에 사는데 가끔 들른다는 것이다. 중요 수입원이라야 밭에서 기르는 약초하고 가을에 산에서 채취하는 송이버섯이 전부라고 한다. 자신들이 해온 일이니 그 일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부부가 살아있으니 이곳에 살지, 두 분 중 누가 하나 세상을 떠나면 도화동도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 될 것 같았다.

김치꽝과 장독
 김치꽝과 장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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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을뿐더러 큰 길까지 사람의 왕래만 가능하니 사실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사는 모습이 60년대 우리 농촌 그대로다. 변소도 그렇고 농기구도 그렇고, 뒤에 김치꽝 해놓은 모습도 그렇다. 지개나 싸리로 만든 삼태기도 이제는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 서낙홍씨가 몸져누워 있으니 부인이 모든 살림을 꾸려나가고 있다.

요즘은 산골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사연이 이렇게나 많다. 씨족을 이뤄 농사를 짓고 살던 전통적인 집성촌은 거의 사라지고 이곳저곳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함께 사는 퇴락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50여 가구쯤 모여 북적이던 마을들이 이제는 크게는 10가구, 작게는 한두 가구가 모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마을이 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산업화니 민주화니 해서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가 큰 변화를 겪었지만 이곳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이방의 지역이었던 것이다.

도화동을 떠나는 마을조사 대원들
 도화동을 떠나는 마을조사 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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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를 추구한다는 21세기에는 뭔가 달라지려나? 현장을 다니면서 답사하고 조사한 바로는 역시 꿈같은 이야기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나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학교도 없어지고 버스도 없어지고 사람도 없어지고, 이제 남는 것은 아주 먼 옛날처럼 산과 물 그리고 자연 뿐일 테니까. 그러면 오히려 그것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들어올까? 마락산장을 차린 70대의 노인처럼.    

덧붙이는 글 | 지난 번 ①회가 고치령 산신각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번 ②회는 마락리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이다.



태그:#마락리, #마즈바우, #마락국민학교, #도화동, #미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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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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