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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정원에서 바라본 문간채와 안채
▲ 영랑생가 사랑채 정원에서 바라본 문간채와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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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시인의 체취 오롯이 간직한 생가

돌담길을 걷는다. 가장 먼저 만나는 예스러운 탑골샘이 정겹다. 이 샘은 도르래를 이용해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린다.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영랑생가다. 전남 강진에 있는 영랑생가는 지방기념물 제89호로 관리되어오다 2007년 10월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로 지정되었다. 시인 영랑 김윤식이 태어난 영랑생가는 전형적인 부농가의 생활공간으로 영랑의 체취가 오롯이 남아 있다.

한국 문단의 큰 별, 모란의 시인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이 집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둔 영랑은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는다. 1921년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같은 해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 은신하였으나 9월 28일 수복작전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영랑생가다.
▲ 사립문 대나무로 엮은 사립문을 열고 들어서면 영랑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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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고요히 고흔봄길우에> 시 전문
▲ 영랑 시비 <내마음고요히 고흔봄길우에>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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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채에서 본 안채의 모습이다.
▲ 문간채에서 본 안채 문간채에서 본 안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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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간에는 베를 짜는 베틀, 솜을 자아서 실을 만드는 물레,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틀, 탈곡기 등의 옛날 생활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 곳간 곳간에는 베를 짜는 베틀, 솜을 자아서 실을 만드는 물레,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틀, 탈곡기 등의 옛날 생활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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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주변의 소재들로 주옥같은 서정시 써

영랑은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여 '모란이 피기까지는' '가늘한 내음' 등 남도의 정서를 전통적 운율로 읊어낸 주옥같은 서정시를 남김으로써 한국 시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윤식(1903~1950) 시인이 태어나 성장한 생가는 그의 예술혼이 담겨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영랑은 80여 편의 시 중 60여 편을 이 곳 강진 생가 주변의 소재들로 썼다.

영랑 생가의 화단에는 각종 야생화가 심어져 있고 행랑채 앞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가 있다. 문간채 천정의 남포등은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머슴방 입구에는 쇠죽을 쒔던 무쇠 솥과 물지게가 걸려 있다. 문간채는 당초 건물의 흔적조차 없었던 것을 영랑선생의 가족과 친지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 복원했다. 이곳은 머슴이 거처하던 방이며 곳간과 뒷간 등이 있다.

곳간에는 베를 짜는 베틀, 솜을 자아서 실을 만드는 물레, 가마니를 짜는 가마니틀, 탈곡기 등의 옛날 생활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바로 옆의 곳간에는 디딜방아와 삼태기 멍석, 작두, 대패, 톱 등이 있다. 뒷간(화장실)에는 써레, 쟁기, 쇠스랑, 갈퀴 등의 농기구와 똥장군 등을 볼 수 있다.

마당앞 맑은 새암을
▲ 샘 마당앞 맑은 새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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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
▲ 영랑생가 안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 2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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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에는 원고를 쓰고 있는 영랑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놨다.
▲ 사랑채 사랑채에는 원고를 쓰고 있는 영랑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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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마당가에는 옛 우물이 있다. 영랑 선생의 가족이 사용했던 이 우물은 1993년에 복원됐다. 1935년에 선생이 지은 '마당 앞 맑은 새암을'이라는 시가 있다. 안채의 초가집은 여느 초가와는 달리 고풍스러운 형태로 안방에는 영랑 사진과 경대, 책이나 옷을 보관하는 반닫이가 놓여 있다.

부엌의 가마솥과 풍로, 벽에 걸린 소쿠리와 키가 그때의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 안채 오른편의 모란꽃밭과 장독대에는 정겨움이 묻어난다. 어느 날 이곳 장독대에서 누나가 장독을 열 때 단풍이 든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오메 단풍 들것네’라고 속삭이자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은행나무 고목 옆의 흙담장이 아름답다.
▲ 은행나무와 흙담장 은행나무 고목 옆의 흙담장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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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한 아픔을 간직한 동백나무의 고목이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 동백꽃 처연한 아픔을 간직한 동백나무의 고목이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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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 이룬 사랑 붉은 동백꽃으로 피어나

안채와 사랑채 뒤편의 왕대밭에서 댓잎이 속삭인다. 1년이면 6개월을 서울에서 머문 그는 최승일의 누이동생 최승희(당시 13세, 숙명여학교 2년, 나중에 조선 무용계의 여왕인 된 그녀는 좌파 문인 안막과 결혼 후 월북)와 약 1년간 목숨을 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최승희와의 사랑도 양가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실을 맺지 못한다. 이때 영랑은 실연의 충격을 못 이긴 채 생가의 동백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발각되어 목숨을 건진다. 처연한 아픔을 간직한 동백나무의 고목이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사랑채에는 원고를 쓰고 있는 영랑의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놨다. 호롱불과 화로가 곁에 놓여 있다. 사랑채 앞에 길게 드러누운 소나무와 배롱나무, 은행나무 고목의 정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시 한 수가 절로 나올 듯싶다. 영랑생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대나무 숲과 이제 갓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한 동백꽃이 유혹하는 남도의 겨울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랑생가, #서정시,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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