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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하나 쓰러져 있었다. 나무의 색깔이 선명하지 않다. 주변의 모습 또한 무겁다. 겨울이란 사실을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넘어져 있는 나무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어도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덩그러니 나뒹굴고 있는 나무에선 그런 기색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버섯들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무의 끝에서는 버섯들이 자라고 있었다. 결코 보기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버섯은 색깔부터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버섯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나무가 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버섯이 죽은 나무에서 자라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있는 나무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은 있다. 초록의 얼굴을 하고 숲을 이루던 화려하였던 시절이 있었다. 뜨거운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하여 포효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의 나무가 지금처럼 속절없이 썩어가며 버섯들의 양분이 되어 질 것이란 것을 꿈에서라도 생각하였을까?

 

세월 앞에 무기력해지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버섯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나무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다. 그 것은 생각만 하여도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생명을 가진 이들 모두의 운명인 것을. 피해가고 싶다고 하여 비켜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쩌란 말인가?

 

나만은 예외일 것이란 생각으로 살아간다. 다른 이들은 모두 다 죽을 것이지만 나만큼은 그렇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장은 즐거운 일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장기적인 안목으로 바라보면 더 큰 고통이요, 고해의 늪에서 헤매는 결과일 뿐이다.

 

 

유한한 생명의 숙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 무한한 삶을 추구하고 있으니, 모순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면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고통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근원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욕심을 내는 삶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열심히 가졌다고 생각하고 돌아보면 허탈해질 수밖에 없다.

 

버섯을 본다.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버섯은 무심하다. 세월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욕심이 허망한 이유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돌아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채워간다고 하여도 결국은 바람이기 때문이다. 초록으로 눈부셨던 나무도 결국은 속절없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사람도 비켜갈 수 없는 길이다.

 

가을은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 밀려서 사라지는 것은 더욱 아니다. 가을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미련 없이 떠나가는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순리다. 억지를 부리고 욕심을 낸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더 초라해질 뿐이다.

 

제자리로 돌아가기. 버섯은 나무를 제자리로 돌아가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아닌가? 서러워할 이유도 없고 슬퍼할 까닭도 없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욕심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가을이 제자리로 돌아갔기에 겨울이 올 수 있고 나무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에 자연은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 것은 재앙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버섯을 바라보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春城>


태그:#버섯, #제자리,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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