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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에게 '일본은 물가가 비싸다'는 선입견이 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특히 여행자에게는 대중교통비가 다소 비싸게 느껴지고, 공부하는 이에게는 책값이 부담스럽다. 일본에서 읽어야 할 책이 많은 내게도 책값은 적잖은 부담이 된다. 그런데 책을 사고 값을 지불하면서도 뿌듯할 때가 있는데, 바로 중고서점에서이다.

 

남들 손에 머물렀던 것이기는 하지만 거의 새 것이나 다름없는 책을 정가의 십분의 일 이하로 살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일본에 온 지 두 달여 만에 읽고 싶은 책을 백여 권 남짓 샀다. 일본 책 백여 권이라니, 정상적인 가격대로였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인데, 중고책방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세히 계산해보지는 않았지만, 전체 금액은 아마도 한국 돈 이십만 원을 한참 밑돌았던 것 같다.

 

중고서점에도 몇 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곳들은 대학가 근처나 시내에 한국의 옛 청계천변에 있던 소규모 중고서점 같은 곳들이다. 하지만 그런 데서는 아무래도 책 찾기가 여의치 않고 또 규모도 크지 않아 구경만 했지 직접 살 기회는 없었다. 그런 곳과는 달리, 중고서점이지만 제법 많은 서적들을 주제별로 또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 전문서점들도 있다.

 

중형급 서점의 형식을 갖추고서 약간 철지났거나 남들 손에 있던 책 - 물론 보기에 문제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은 거의 새 책이나 다름없다 - 을 한 권에 105엔(800원 가량) 정도에 파는 곳이 있다. 내가 종종 들르는 북오프(Book·Off)라는 서점이다. 105엔짜리 책도 팔고, 정가의 절반 가격 되는 책이나 잡지도 팔고, 영화 DVD나 음악 CD도 판다.

 

잠깐 서서 책만 읽다 가는 사람들도 많다. 중간 중간 50권 이상이면 직접 매입하러 가겠다는 안내문구도 붙여놓았다. 이 서점은 프랜차이즈 형태로 운영되어 일본 전역에서 만날 수 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자전거로 5~10분 정도면 갈 거리에 세 군데가 있다.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자전거로 씽씽 이 서점까지 한 바퀴 돌아오는 게 나의 소박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에서 읽고 싶은 책을 거의 헐값에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중고서점이니만큼 원하던 제목의 책을 쏙 뽑아들긴 힘들지만, 그와 비슷한 종류의 책들을 우연히 만나는 기분은 썩 괜찮다. 이곳에서 책을 제일 많이 샀다.

 

동경에 최근 북뱅크클럽(Book Bank Club)이라는 서점이 생겼는데, 깨끗하고 잔잔한 음악도 흘러나온다. 여기서는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책들을 반값 정도에 살 수 있다. 여기서도 대여섯 권정도 샀나 보다. 이와 비슷한 서점은 물론 더 있다. 그리고 약간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내가 머무는 숙소 근처에 구세군교회가 있는데, 그곳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2시까지 바자회를 연다. 주로 의류, 가전제품, 식기류, 가구류 등 중고 생활용품들이 주종을 이룬다. 물건도 제법 많다.

 

나도 여기서 방석과 전기장판 등 생필품을 헐값에 사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주로 찾는 것은 역시 책이다. 전형적인 중고 책들인데, 그 대신 정가의 십분의 일 이하로 살 수 있다. 전문 서점이 아니라 규모는 작지만, 여기서도 괜찮은 책들을 모두 서른 권 가량 샀다.

 

내가 이 책들의 새 주인이다 싶어 뿌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서른 권 가량 사고도 한국 돈 이만 원 약간 넘는 정도로 해결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교회에서 바자회의 수익금으로는 사회사업을 한다니, 경제적 여유는 별로 없어도, 책을 사면서 생겨나는 마음의 여유는 그보다 훨씬 더 크다.

 

한가했던 책꽂이가 이렇게 값싸고 좋은 책들로 채워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제목만 보고 다 넘겨보지 않아도 제목 속에서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것 못지않은 상상력도 생겨난다. 그것도 좋은 경험이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것이 있다. 한국의 중고서점은 다 어디로 갔을까. 매년 쏟아져 나오는 그 엄청난 책들이 사람의 손에 다 들어가는 것도 아닐 테고, 또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쓸모없어지는 책도 부지기수일 텐데, 그 많은 책들이 그냥 폐지가 되고 만단 말인가. 하긴 나도 오래된 책들을 그저 폐지함에 버린 적도 있다. 재활용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기도 했지만, 달리 처분 방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일본 중고서점을 보면서 더 안타까워진다.

 

책들의 활자가 인쇄되기까지 들어간 모든 자원과 노력들을 생각해보니 제대로 읽히지도 않은 채 쓰레기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한국 책의 소모적인 현실이 안타까웠다. 책한테도 미안했다. 나도 책을 몇 권 썼지만, 내 책도 저렇게 버려질지 모른다 생각하니, 내가 버렸던 책의 저자한테도 미안했다. 지구한테도 몹쓸 짓을 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책한테 미안하지 않고, 저자한테 미안하지 않고, 지구한테 미안하지 않으려면 역시 필요한 여러 사람 손에 책이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을 일본 중고서점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돈 없어도 책을 거저, 적어도 싸게라도 사볼 수 있어야 좋은 사회 아닌가. 그만큼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인간에게도 권리가 있지만, 책에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일본 중고서점에서 느꼈다. 여러 사람에게 오랫동안 두루두루 읽힐 권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찬수씨는 종교다양성을 가르치다 부당하게 해직된 전 강남대 교수로 현재 종교문화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중고서점, #헌책방,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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