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숨겨진 생의 비의(秘意)를 생각하며 걷다
 
연화사 가는 길은 복숭아 밭과 동행하는 길이다. 연기군은 복숭아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복숭아나무는 예로부터 귀신 쫓는 나무라 했다. 그래서 무속인이 굿을 할 때 복숭아가지를 이용하기도 했고, 정신병자에 씌었다고 생각하는 귀신을 복숭아나무 가지로 때려 쫓기도 했다. 어렸을 적엔 상여 앞에다 복숭아 나무를 꽂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전래동화 '호랑이와 곶감'을 생각한다. 아이는 곶감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다. 실상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좋아하는 것과 무서워하는 것 사이엔 뗄 수 없는 인과관계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너무 좋아하면 두렵다. 그 때문에 파멸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곳의 복숭아나무 등걸은 내가 다른 지역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크다. 헐벗은 가지가 약간 에로틱하다. 봄이 돌아와 붉은 복사꽃이 피면 얼마나 화사할까.
 
연화사는 낮은 산자락 아래에 있다. 일주문 대신 사주문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법당이 바라다 보인다. 앞마당에는 신라계 석탑의 형식을 본뜬 5층 석탑이 서 있다.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새뜩하다.
 
 
 
법당은 겹처마를 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모두 잘 다듬은 두리기둥에다 약간의 배흘림을 주었다. 이 건물은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1987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절이 전통사찰로 지정된 것은 1988년이라고 한다.
 
처마에는 '연화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안에서는 스님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예불을 올리고 있다. 연만하신 보살께서 밥을 날라 오신다. 아마도 마지 공양 중인가 보다.

불단 가운데에는 석가여래를 모시고, 좌우에는 본존불을 모시고 선 관음보살좌상이 있다. 모두 최근에 조성된 불상이라서인지 번쩍번쩍하다. 본존불과 협시보살 사이에는 유리상자가 놓여 있다. 무인명석불상부대좌(戊寅銘石佛像附臺座)와 칠존석불상(七尊石佛像)을  보관한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까닭은 이 두 가지 유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연만하신 보살님께 들으니 본래는 불상 없이 이 두 유물만 모셨다고 한다. 부처님을 새긴 아름다운 석비상들이 있는데 따로 부처님을 모실 까닭이 무엇 있는가?
 
 
 
유물은 예불이 끝난 다음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하고 법당 옆에 나란히 위치한 삼성각을 둘러본다. 이 건물 역시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정면에는 산신 탱화가 걸려 있다.
 
산신은 약간 미소를 띠고 계시건만, 옆에 앉은 호랑이는 눈빛이 형형하다. 만약 하늘 나라에도 대통령 선거가 있고, 산신께서 출마하신다면  경호원인 호랑이의 눈빛이 저러하지 않을까. 허허로운 생각을 지우며 다시 법당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법당에선 여전히 예불이 진행 중이다.
 
앙증맞기도 해라, 저 천진보살들
 
 
 
법당 왼쪽으로 난 대문을 통해 '관음전'이라 써 붙인 슬라브 건물을 들여다 본다. 중앙에는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고 양쪽엔 탱화가 걸려 있다. 관음보살의 모습으로 보아 대전 여진불교미술관 이진형 관장이 조성한 게 아닌가 싶다.
 
이 관음보살 좌우에는 아주 작은 애기 보살 여덟 분이 모셔져 있다. 예불의 대상이라지만, 아주 귀엽고 앙증맞다. 큰 불상에 없는 친근감이 바라보는 이를 끌어당긴다. 이 애기부처들을 보니, 여진불교미술관 이진형 관장이 조성한 것이라는 확신이 더 굳어진다. 여진불교미술관에 가면 이곳저곳에 이런 천진불들이 놓여 있어 마음이 푸근하다.
 
연만하신 보살께서 다가오시더니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는다. "대전에서 왔다"고 대답하면서 바라보니 보살의 얼굴이 몹시 곱다. 평상에 앉아 얘기를 나눈다. 할머니께선 올해 여든여섯이라고 한다. 얼핏 보면 일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앓을 만큼 정정하시다. 참, 나이를 곱게도 잡수신 분이구나. 나이는 드셨지만, 영락없는 천진보살이시다.
 
"할아버지는 아직 살아 계세요?"라고 물었더니만 15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자식을 둘 낳으셨지만, 병으로 모두 잃고 혼자 사신다고 한다. 얘기를 듣노라니, 마음이 몹시 애잔해진다. 그나마 먼 친척 가운데서 데려다가 세운 양자와 손자들이 착하다니 다행이지만.
 
불교나 기독교나 종교의 병폐가 심하다고 비판하지만, 이런 노인분들이 의지할 곳이 된다는 한 가지만으로도 종교란 얼마나 가치가 큰 것인가를 생각한다. 예불이 다 끝났는지 법당 쪽 소리가 그쳤다. 이제 유물을 들여다 보려고 법당으로 향한다. 예불을 끝내고 나오는 주지 스님(이성종 스님)과 간단히 수인사를 나눴다. 문화재를 화두로 몇 마디 얘기를 나눈 후 법당으로 들어갔다.
 
독특한 형태의 무인명석불상부대좌와 칠존석불상
 
 
두 개의 비상은 법당 중앙 석가모니불 좌우에 있었다. 비상이란 비석 모양의 돌에 불상을 조각하거나 또는 글을 적은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유물은 생천사지(生千寺址) 터에서 발견되었다 한다. 1961년, 당시 이 사찰 소유자가 꿈에 계시를 받고 나서 땅을 파보니 두 개의 비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무인명석불상부대좌부터 들여다본다. 돌 4면에 각각 불상을 새겼으며 대좌는 다른 돌로 만들었다. 앞면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우 양쪽으로 나한상·보살상이 2구 등 모두 다섯 분 부처가 새겨져 있다. 본존불의 머리 부분에는 둥글게 연꽃이 새겨진 광배가 있고, 좌우로 구슬장식과 작은 부처가 새겼으며,  본존불의 대좌에는 연잎과 줄기를 새겼다.
 
무인(戊寅)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이 불상이 678년(신라 문무왕 18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칠존석불상은 반타원형의 곱돌로 만들었다. 연꽃무늬가 새겨진 마름모꼴의 돌 표면에 본존여래상을 중심으로 7존불이 새겨져 있다.
 
대좌 앞면에는 두툼한 연꽃 봉오리를 중심으로 좌우에서 연줄기가 피어오르고, 그 끝에는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본존불은 연줄기 위에 앉아 있다. 좌우에는 협시보살이 서 있고, 본존과 협시보살 사이에는 상체만 내민 나한상이, 밖으로는 인왕상이 사자를 탄 모습이다.

광배에 새긴 연꽃무늬나 협시보살의 가늘고 긴 신체 등에서 백제 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칠존석상 역시 불무인명석불상부대좌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무인년은 백제 멸망 2년이 지난 서기 678년이다. 만든 양식이나 시기로 보아 백제 유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문화재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50cm가 약간 넘는 크기로 보아 먼 길 가는 이가 휴대용 예불 대상으로 조성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혹은 자신을 위험에서 지켜주는 부적 같은 의미로 지니고 다녔을 수도 있겠다. 망국한 나라가 다시 수복하기를 바라는 백제 유민의 비원이 서린 유물인지도 모른다. 이 두 유물은 비암사 석상, 정안면 석상과 함께 연기 지방 고대미술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내가 법당 안에서 두 유물을 찬찬히 구경하는 동안 할머니 보살께서 문 밖에 기다리고 서 계셨다. "공양을 들고 가라"고 끌어당기시는 걸 끝내 사양하고 비암사로 발길을 옮긴다. 비암사로 가는 길 내내 할머니 보살 생각에 마음이 짠했다. 슬픔 없이 오래 사시다 가셨으면 좋겠다. 간절함 없이 어찌 이 생을 건너가겠는가.
 
誓音 深史隱 尊衣希 仰支  兩手 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 人 有如 自遣賜立 
 
서원 깊으신 부처님 우러러 바라보며 두 손 곧추 모아
원왕생 원왕생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 신라 향가 '원왕생가' 일부

태그:#연기군 , #연화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