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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후 결혼을 준비하며 행복해하는 핀란드 연인.
 동거 후 결혼을 준비하며 행복해하는 핀란드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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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에 아무도 모르게 동거부터 해라."

최근 한국의 한 성공한 여성이 쓴 책에 나오는 젊은 여성에게 주는 충고의 내용이다. '아무도 모르게'라는 은근한 말로 젊은이들을 동거로 '유혹'하는 이 문장이 우리에게 그다지 충격적으로 들리지 않는 것은 한국에서도 '동거'라는 단어가 점차 사회적 금기를 벗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얼마 전부터 '동거'가 부쩍 방송 드라마나 영화에서 소재로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 동거는 금기를 넘어서 젊은이들의 트렌드로까지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많은 커플이 동거하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는 아직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동거가 늘어나고 있으며 동거에 대한 의식도 많이 바뀐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2007년 가정법률상담소무소 발표에 의하면, 성인 10명 중 7명이 '동거가 가능하다'며 동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늑대 커플'에서 '동거의 천국'으로

핀란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는 유독 세계에서 성의식이 자유롭고 동거 커플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동거에 대한 이러한 자연스런 의식이 유럽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스페인 등 일부 남부 유럽에서는 동거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한다.

최근 한 스페인 여성과 결혼식을 올린 핀란드 남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이들은 핀란드에서 이미 동거를 몇년 했음에도 처가에서 결혼을 치를 때는 결혼식 직전까지 서로 다른 거처에서 머물러야 했다고 한다. 물론 스페인 처가에는 이전 동거사실을 속이고 말이다. 그는 스페인에서는 아직 동거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 연극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결혼 전 동거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혼인이 목적이 아닌 '사실혼' 커플까지 합하면 핀란드 가구의 20% 이상이 동거 커플이다. 스웨덴에서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동거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녀 거주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니, 스웨덴이 이 부분에서 북유럽의 선두주자라 하겠다.

핀란드는 스웨덴보다 좀 늦어서 1960년대가 돼서야 동거가 일반화되었다. 1926년 이전에는 결혼하지 않은 남녀가 같은 지붕 아래서 거주하는 것이 불법으로 간주되기도 했는데, 동거가 합법화되고 나서도 사회적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것은 이보다 훨씬 시간이 지난 뒤라고 한다.

당시 동거커플은 '늑대(susi)'라는 부정적 의미가 붙은 '늑대커플(susipari)'로 불리며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까지 했다니 동거가 핀란드에서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이처럼 초기에 거부반응은 많았지만, 동거커플은 1960년대 이후 급속도로 늘어나서 이제 동거는 핀란드 커플들의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이 되었다.

핀란드에 와서 정착하던 초기에 문화 충격을 몇 번 겪은 적이 있는데 그 중 한 번이 동거와 관련된 '사건'이다. 핀란드 어느 친지의 여자친구 졸업 축하파티에 초대받아서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그 커플이 이미 3년 정도 동거를 해왔고 여자친구도 나름 성숙해보였기 때문에 그 졸업식이 대학졸업식임을 의심치 않았었다. 그런데 파티에서 얘기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그 졸업식은 놀랍게도 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그 여성, 아니 소녀는 20세도 채 안 된 10대였던 것이다. 북유럽의 동거와 관련된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 연령이 낮은 것에, 그리고 모든 가족들이 그 관계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데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섣부르게 동거해서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최근 한국 젊은이들이 동거에 한 발짝 다가가는 동안, 동거의 천국으로 불렸던 핀란드에서는 젊은이들이 오히려 동거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핀란드의 한 일간지 <Iltasanomat>는 '동거를 연기하는 젊은이들'이라는 흥미로운 기사를 게재해서 눈길을 모았다.

기사에 따르면, 헬싱키에 거주하고 있는 마이야 란테리(22)와 파누 아우티오(22)는 데이트한 지 4년이나 되는 공인된 커플이지만 놀랍게도(?) 아직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 마이야는 현재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고, 파누는 남자 룸메이트 두 명과 함께 살고 있다.

"전 항상 혼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아파트에 처음 이사 와서 인테리어를 할 때도 다른 사람 의견과 절충할 필요 없이 혼자서 결정할 수 있어서 참 좋았어요." (마이야)
"저는 사교적인 타입으로 남자 룸메이트들과 함께 자취하는 것이 성격에 맞고 좋습니다." (파누)

마이야는 남자친구가 동성 친구들과 자취생활을 먼저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긍정적이다.

"친구들이 부모님 밑에서 살다가 곧바로 파트너와 동거를 시작한 경우 쉽게 헤어지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독립적인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파트너와 더 잘 헤어지더라고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섣부르게 동거해서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4년이나 데이트했지만 아직 동거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때로는 파누와 같은 집에서 저녁 늦게까지 같이 있고 싶을 때가 있지만, 현재 우리 둘의 라이프스타일도 많이 다르고 또 여러 가지 이유로 동거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빠르면 2년 후에나 동거를 할 수 있을까요? …(중략)…이전에 파누가 축구 훈련을 위해 칠레에 3개월 동안 가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 때 3개월 동거를 해본 적이 있어요. 참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서로 더 잘 알게 되었지요. 그 때 경험이 도움이 되어 앞으로 본격적으로 같이 살게 되더라도 서로 (부정적으로) 깜짝 놀랄 일은 없을 것 않습니다."

마이야 란테리(왼쪽)와 파누 아우티오.
 마이야 란테리(왼쪽)와 파누 아우티오.
ⓒ < Iltasanoma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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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동거'... 데이트만 하는 쪽이 관계 오래 간다?

핀란드 심리학자 케이요 마르코바(Keijo Markova)씨는 이처럼 젊은이들이 동거 결정에 신중해지는 것이 대세라고 말한다. 현대 사회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젊은이들은 이성과의 관계 외에도 관심을 기울일 것들이 많아져서 상대적으로 이성교제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성과의 관계보다는 장래 자기 직장과 진로에 대해 더 관심을 두는 젊은이들이 많아졌으며, 이성을 사귀더라도 예전처럼 쉽게 동거 상대자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데이트를 해보고 좀 더 신중하게 장래 배우자를 결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또 동거 커플은 데이트만 하는 커플보다 쉽게 헤어질 가능성이 더 높은데, 서로 단점을 더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거하지 않고 데이트만 하며 사귀면 오히려 관계가 오래가는데, 이는 상대방의 단점이 쉽게 드러나지 않고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라는 로맨틱하지 않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마르코바씨는 지적한다.

이처럼 핀란드에서는 요즘 섣부른 동거가 결별을 부른다며 동거에 신중해지는 반면,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혼전동거를 통해 이혼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는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처럼 다소 상반된 견해를 살펴보니 동거는 마치 양날의 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잘 사용하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해를 입고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볼 수도 있는.

앞으로 한국에서도 동거가 거주의 한 형태로 정착하게 된다면, 동거라는 칼을 잘 사용할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정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태그:#동거, #핀란드, #늑대커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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