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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의 대선 출마 선언을 들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는 나를 많이 번거롭게 했다. 이유도 많고 변명도 많은 정치판을 여행길에서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봄에 와서 걸어보지 못했던 오솔길을 이번엔 꼭 걷고 싶었다. 그래서 차도 동무도 없이 혼자 떠난 여행길이었다. 선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조곤조곤 걷고 싶었던 길. 바로 그 길 가는 버스 안에서 하필이면 정치판 소식이 내 귀를 어지럽히다니. 문득 그의 유배는 아마도 정치판을 벗어나 학문을 집대성하라는 신의 계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귤동마을에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 차밭에서 차 열매를 따는 사람들을 보았다. 봄에 새순이 돋아 여름이면 하얗게 꽃이 피고,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는 기름을 짜기도 하고 다시 밭에 뿌릴 종자로 쓰기도 한단다. 일이 힘들 텐데도 밭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 나오는 게 흥겨워 보였다. 마치 노래 한 자락이라도 흘러 나올 듯한 분위기였다.

 

가파른 계단길로 두세 번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자 높다란 지붕이 지그시 나를 내려다 보았다. 나무 그늘로 어둠침침해진 시야는 초당에 이르러서도 여전. 제일 먼저 제자들이 유숙했다는 서암이 나뭇가지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 대학자 정약용은 이곳에서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유배생활을 하던 산중 칩거지에서 그의 학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도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면서 써 온 것이란다. 원래 당호는 여유당, 호는 사암이다.

 

그의 벼슬살이는 28세 때 대과에 급제하면서 시작되었고, 33세에 정 3품까지 오르면서 정조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신유박해를 만나 서학을 했다는 이유로 머나먼 유배길에 올랐다. 유배라는 고통스런 형벌은 그를 고난으로 내몰았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이곳 다산초당을 발판삼아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해 내놓았다. 그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의 업적을 보며 놀라워하고 있다.

 

처음 강진으로 유배 와서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사의재란 이름으로 올해 복원)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에서 8년을 보냈다. 그리고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다.

 

다산의 위대한 연구와 저술은 철학, 정치, 경제, 법률, 농학, 문학, 의학등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방대한 책으로 저술하였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해 낸 것이다.

 

1957년 복원하였다는 초당은 기와로 되어 있었다. 그 당시 유배지 초당이 기와일리 없는데,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너무 쇠락한 초가를 헐고 지금과 같이 지었다고 한다. 처음엔 초당을 지었고, 그 다음에는 서암과 동암도 지었다고. 그래서 그런지 강진군은 그 당시에 맞는 초가로 다시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님의 자취는 200년이 지난 현재에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다산선생이 직접 병풍바위에 글자를 새겨 넣고 해배되었다는 정석바위, 수맥을 찾아 차를 끓였다는 약수 약천, 차를 끓이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그리고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였다는 천일각이 남아 있었다. 200년을 묵묵히 남아 후세에까지 전해준 그 소중한 자취. 200년 전으로 훌쩍 뛰어 넘었다 온 냥 감회가 새로웠다.

 

님의 발자취는 초당을 떠나 백련사까지도 이어졌다. 차를 끓여 마셨다던 약천과 차 끓이는 부엌으로 썼던 다조를 보아도 알 수 있듯, 님은 차를 매우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귤동마을 뒷산에 차가 많아 다산이라 부른 것도 그렇지만, 책읽기와 글을 쓰는 중에도 차 끓이는 일을 소일삼아 즐겼을 정도로 차에 정성을 들인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산길은 백련사 혜장선사와 차를 마시며 교류하기 위해 만든 길이었다. 길은 외줄기로 고즈넉한 차향기가 전해져 오는 길이었다. 올 봄 새로 만들었다는 해월루로 가 강진만을 바라보았다. 구강포가 있고 그 너머로 다도해가 가늠되었다. 말이나 가마가 교통 수단이었던 그 때, 님은 아득한 심원을 바라보며 애끓는 마음을 어찌 달래었을까?  

 

쓰기에 진력이 난 님은 이 길을 걸으며 생각도 하고 머리도 식혔을 것이다. 빨리 걷기도 하고 천천히 걷기도 하면서 머릿속을 휘도는 글귀들을 정리하고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갔을 것이다. 길옆에 난 차에 코를 대고 차향을 맡으면서.

 

아직도 길가엔 야생차가 풀처럼 무더기져 나 있다. 차를 잘 알면 한 줌 뜯어다 차를 끓였을까? 그러다 발설을 하는 것 자체가 화가 된다는 생각이 내 입을 단속하게 하였다. 내 할아버지도 한학을 하셨다. 매사에 철저했던 그 분은 바깥 것은 도통 안으로 들여오지 못하게 하여, 난 지금도 길가에 난 풀 한 포기 건드리지 못한다. 내 것과 남의 것, 그리고 공공의 것이 어릴 적부터 확실히 구분되어진 탓이다.

 

정말 알기만 하면 이 길은 불이 나도록 닳아질 것이다. 차잎은 고사하고 뿌리째 뽑힐 게 뻔해, 사실은 여행기를 쓰는 이 순간에도 걱정이 많이 된다. 떼 중에 인간 떼가 가장 무섭다는데, 하면서. 짧은 거리였지만 길게 느껴지는 길이었다. 님과의 거리가 200년이었던 것처럼, 200년을 하루 같이 강진만을 바라보았을 길을 걸었으니 말이다. 이 길이야말로 천천히 되새김질 하듯이 하늘과 땅과 인간의 조화를 생각하며 걷고 싶었던 길이었기에 이렇게 다 걷고 나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어느덧 백련사가 관리한다는 차밭이 나오고, 동백숲이 나왔다. 벌써 다왔나 싶어 가슴으로 싸한 울림이 전해져왔다. 자주 올 수 없는 길이기에 아쉬웠다. 그러나 한 편 자주 올 수 없는 길이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도시 근교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에 이 길이 있었다면, 아마 옆으로 찻길을 내자고 성화였을 것이니. 이 길은 이대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한 옛길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안고 동백숲 안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덧붙이는 글 | 다산초당은 11월 7일 다녀왔습니다.

* 신유박해 : 온건파인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11세)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고 벽파가 정권을 잡게 된다. 벽파는 정순왕후를 조종, 서학이라 불리는 천주교를 박해하는데, 천주교를 박해한 진짜 이유는 남인을 숙청하려는 데에 있었다. 또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통해 정조의 온건정책을 부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태그:#다산초당, #정약용, #만덕산,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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