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잠에 곯아 떨어진 그의 옆은 텅 비어 있었다. 추운 새벽 따뜻한 지하철을 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운이었을까?
 잠에 곯아 떨어진 그의 옆은 텅 비어 있었다. 추운 새벽 따뜻한 지하철을 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행운이었을까?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이른 새벽 지하철 안에서 그를 만났다. 짧은 양말 밖으로 나온 맨살이 애처로웠던 그. 두꺼운 겨울 코트로 몸은 휘감았지만 맨살이 드러난 발목은 감추지 못한 그. 그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잠에 취해 있었다.

문득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올랐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많은 바람을 놓아 주십시요.

위대한 여름은 이렇게 황금들판을 만들어 주었다.
 위대한 여름은 이렇게 황금들판을 만들어 주었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마지막 과일들이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살을 베푸시어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풍성한 가을날이다.
 풍성한 가을날이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지금 집이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혼자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낙엽이 흩날릴 때에 가로수 사이를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일 것입니다.

이쪽은 준비가 거창하다. 그렇다고 추위가 감해질까?
 이쪽은 준비가 거창하다. 그렇다고 추위가 감해질까?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나를 가슴 뭉클하게 만든 건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지금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집을 지을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두꺼운 박스로 방을 만든들, 두꺼운 옷을 몇 겹 껴입은들 추위가 감해질까?

박스를 이렇게 만들어 그 안에 눕는다. 꼭 죽은 사람이 누운 관처럼 보였다.
 박스를 이렇게 만들어 그 안에 눕는다. 꼭 죽은 사람이 누운 관처럼 보였다.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일명 박스맨이라 불리는 그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동정을 살핀다. 죽은 사람을 뉘는 관처럼 짜인 박스를 계단 참에 놓고 잠든 사람들. 그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소주병은 옆에서 나뒹굴고 신발은 조용히 그들 옆을 지킨다.

계단을 다 올라가 지상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희부연 새벽. 노숙인 한 분이 모퉁이 계단 참에 앉아 뭔가를 들고 읽고 있다.

불현듯 이런 기도가 읊조려진다.

주님, 지난 여름은 참으로 지루했습니다.
그러나 저분들을 위해서 남국의 태양을 조금만 더 양보해 주십시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이분은 돈벌이을 위해 생활정보지라도 읽고 있는 것일까?
 이분은 돈벌이을 위해 생활정보지라도 읽고 있는 것일까?
ⓒ 이현숙

관련사진보기


부자의 겨울은 아늑하고 가난한 자의 겨울은 춥다 못해 아리다. 이젠 계절조차 공평하지 않은 듯해 가슴 시린 새벽이었다.


태그:#노숙인, #가을날, #새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