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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둘째 주 토요일(10일)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다. 이 무렵 남도의 산들은 단풍이 절정에 달하고, 그리고는 하루가 다르게 고운 빛을 잃어간다. 하여, 이 날 하루가 가고 나면 나의 한 해도 저물고 만다.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나의 한 해는 다 가고 말아’라고 읊었던 김영랑 시인이 '봄을 여윈 설움’에 잠겼다면 나는 가을을 여윈 슬픔에 잠기고 마는 것이다.    

 

드디어 11월 둘째 주 토요일이 왔고, 건강 문제로 아직은 먼 산행이 어려운 아내와 함께 동네 뒷산이나 다름없는 가까운 산을 찾았다. 조금은 억울한 생각이 없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듯 마음을 조이며 기다려온 날인데 걸어서 십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산에서 가을과 조우해야하는 기분이 어찌 유쾌할 수만 있었겠는가.

 

하지만 산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런 섭섭한 마음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인적이 드문 가을 산에서 느끼는 한산한 정취가 가슴이 저리도록 좋았다. 이맘때쯤이면 단풍구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유명한 사찰이나 산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었다. 뒤에서 재촉하는 사람도 없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마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까지 귀를 기울이며 흠뻑 가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능동적 가을 산행'이라고나 할까? 눈에 확 띄는 화사한 단풍이 없으니 잠들어 있거나 죽은 감각을 되살려서라도 숨어 있는 가을을 찾아나서야 했던 것이다. 그동안 가을 명품만을 선호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고급화 되어버린 입맛을 예전의 소박함으로 되돌려 놓는 소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 겨우 가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은 나를 살아 있게 한다. 감각이 살아 있지 않으면 그들의 실체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아내가 고맙다. 물론 아내가 좀 더 강건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먼 산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 숨 푹 자고 나면 몸이 거뜬해지는 그런 건강한 여자와 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아내를 위해서라도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아내와 더불어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남들처럼 체력이 강건하지는 못해도 가까운 산이나마 함께 오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내 덕에 천천한 걸음으로 가을을 맞이하고, 또한 천천한 걸음으로 가을을 떠나보낼 수 있으니 또한 기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학창시절에 본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워드워즈의 시구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그것이 되돌려지지 않는다고 해도 서러워말지어다.
오히려 그 속 깊이 간직한 오묘한 힘을 얻으소서!

태그:#가을여행,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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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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