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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그리고 버티기

 

아무래도 이번 대통령 선거는 '거짓말과 버티기'가 관건이 될 듯 싶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BBK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을 둘러싼 진실 공방만이 아니다. 사회 전반의 큰 흐름이 '거짓말'과 '버티기'라는 핵심 단어에 모이고 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큐레이터 신정아씨가 거짓말 시리즈의 뇌관 역할을 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거짓과 허위의 가면을 신정아씨처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도 드물 것이다. 그 논쟁이 이처럼 뜨거웠던 때도 없다. 논쟁이 뜨거웠고,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던 데에는 기실 거짓말 때문이 아니었다. 신정아 사건의 백미는 거짓이 백일하에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짓이 아니라고 우기는 데 있었다. 신정아씨는 지금까지도 자신 또한 학위 사기의 피해자라고 우기고 있다.

 

어디 신정아씨 뿐인가. 최근 사회에 큰 물의를 빚고 있는 사람들 치고 자신의 '과오'를 자인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부산의 기업인 김상진씨 뇌물 청탁 사건에 연루돼 줄줄이 엮이고 있는 국세청 사람들 역시 한결같이 '피해자'들일 뿐이다. 억울하다는 소리부터 나온다. 정상곤 전 부산국세청장은 자신이 마치 '속죄양'인 듯한 언행으로 일관하고 있고, 전군표 국세청장은 거대한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큰 판세는 이미 결정이 난 듯싶다. 줬다는 데 끝까지 안 받았다고 우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관행'이라고 빠져나갈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게다가 구속된 부하 직원에게 조직을 위해 희생할 것을 종용했다가 거부당한 꼴이어서 모양새도 최악이다.

 

연세대 치의학과 부정 편입학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산 정창영 연세대 총장 부인 최윤희씨는 <한겨레>의 의혹 제기에 이를 전면 부인했다. 최윤희씨에게 부정 편입학 청탁 대가로 2억 원을 건넸다는 김아무개씨의 명백한 증언에 대해서도 "돈을 받은 적도, 김씨를 만난 적도 없다"며 딱 잡아뗐다.

 

그러나 최윤희씨는 이틀을 버티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정창영 연세대 총장이 이틀을 넘기지 못했다. 총장직에서 사퇴했다. 하지만, 정창영 총장도, 그 부인인 최윤희씨도 부정편입학 연루 사실을 시인하지는 않았다. 물의를 빚어 물러난다는 것이 정 총장의 사퇴의 변이었다. 법적으로 불리한 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BBK 주가조작 사건의 핵심 인물인 김경준씨의 한국 송환 결정으로 정치권 역시 또 한 번 거짓말 논쟁을 벌이게 됐다. 이미 논쟁은 시작됐으며 그것은 이명박 후보의 정치적 사활이 달린 문제로 비화될 소지도 없지 않다. 이회창 변수가 돌출하고 있는 것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이회창 변수는 바로 BBK 논란의 폭발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상태대로라면 BBK 논란은 큰 변수가 되지 않을 개연성 또한 적지 않다. 왜냐하면 작금의 흐름이 그렇다. 진상을 가려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보다는 이를 덮고 넘어가려는 관성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할 소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선 언론의 반향이 다른 사건들과는 다르다. 신정아 가짜 학위 사건이나 변양균 사건, 김상진-정윤재 사건이나 정상곤-전군표 상납 사건에 대한 집요한 의혹 제기와는 달리 대다수 언론들은 이명박 후보가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거짓말 문화 창달에 나선 언론

 

오죽하면 BBK 의혹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아예 보도하지 않은 신문이 다짜고짜 "BBK 의혹의 일부가 사실로 드러나더라도 이 후보를 지지하겠느냐"는 식으로 묻는 여론조사까지 등장했다. 그 결과 '50% 이상'이 '계속 지지할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이른바 '충성도 조사결과'를 여론조사라는 명목으로 발표하고 있을 정도다. 한마디로 의혹의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버티면 된다'는 거짓말 문화 창달에 상당수 언론이 적극 나서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한국의 대표기업인 삼성까지도 그 같은 버티기에 가세할 태세다. 삼성 구조조정본부의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50억 비자금 차명계좌'를 폭로했지만, 삼성은 한마디로 우리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김용철 변호사와 대학 동창인 한 삼성 임원이 개인적으로 김 변호사의 양해를 얻어 개설한 차명계좌라는 것. 돈도 실은 제3자가 맡긴 것으로 삼성 임원이 삼성전자 주식 등에 투자해 7억 원의 원금을 50억 원 규모로 불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삼성은 내부자 정보 이용에 차명계좌 개설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하고 회사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힌 이 임원을 해고하거나 고소하는 등 상식적인 대응 조치를 취했다는 소식은 지금 이 순간까지 들리지 않는다.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해명이지만, 삼성은 '믿으라'고 강변하고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한겨레>와 <시사IN>,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등 극히 일부 언론을 제외하곤 삼성의 이런 '해명'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이라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설 이외에 그 어떤 지면에서도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찾아볼 수 없다.

 

언론만이 아니다. 검찰도, 정치권도 모두 마찬가지다. 검찰은 개인 간 차명 거래라고 딱 잡아뗀다면 딱히 위법 행위를 입증하기 어렵다며 아예 수사할 의지 자체를 보이고 있지 않다. 검찰이 신정아씨나 변양균-정윤재씨 등 청와대 출신 인사들이나 국세청 사람들을 다루는 것하고는 영 딴 판이다.

 

검사들에게 매년 10억 원 가까운 떡값이 제공됐다는 폭로가 나왔음에도 법무장관도, 대통령도 아무런 말이 없다. 국가 최고 사정기관의 신뢰성을 뿌리부터 흔들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는데도 그저 침묵이다. 정치권 또한 민주노동당을 제외하곤 꿀 먹은 벙어리기는 마찬가지다. BBK 의혹과 관련해 '거짓말'을 대선 쟁점화 하고 있는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를 비롯한 다른 후보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대통령 선거는 결국 '거짓말'이 용인되고, 막무가내로 '버티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이 될 개연성이 크다. 삼성 '비자금 차명계좌'에 대한 '억지 해명'이 통하면 다른 억지도 통하기 마련이다. 언론도, 검찰도 그리고 거짓말과의 '전쟁'에 나서야 할 대선 후보들까지도 뻔한 거짓말을 하고 버티고 있는 것을 용인한다면 유권자들로서야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다. BBK 의혹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정치권이 삼성 비자금 차명계좌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태그:#삼성 비자금, #김용철, #BBK 주가조작,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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