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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연애편지를 통해 사랑을 속삭였던 추억이 있다면,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친구와 펜팔을 주고받은 경험이 있다면, 집으로 배달되는 성적표를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집에 일찍 들어갔던 학창 시절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은 집 앞 대문에서 우편집배원(이하 집배원)을 기다려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누구의 기억 속엔 자전거를 탄 아저씨의 모습일 수도 있겠고, 다른 이의 추억 속엔 빨간 오토바이에서 소포를 꺼내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

 

햇수로만 30년째. 여기 우편물뿐 아니라, 자신의 행복한 마음까지도 전한다는 집배원의 이야기가 있다. 우편물을 배달하며 인연을 쌓고, 사랑을 나누며, 희망을 전파하는 전주 우체국 박동일(54) 집배실장의 추억 여행 속으로 함께 떠나보자.
 
추억 하나... 그땐 그랬지

 

지난해 전주 우체국의 배달서비스를 한 단계 끌어올린 장본인으로 인정받아 집배실장이 된 박동일씨. 28년 7개월간 집배원으로 활동했던 기억을 되짚는 그의 얼굴에 한가닥 미소가 스친다. 아련한 30년 전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김제에서 태어났는데, 내가 원체 숫기가 없었어요. 그 당시 시골에선 서로 남의 집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먹는 것이 일상적이었는데, 난 내성적이라 그걸 못했어요. 부끄러움이 많았죠. 그런데, 집배원 일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어요. 배달하면서 익힌 친분을 가지고 아무 데나 들어가서 밥을 얻어먹곤 했으니까요. 하하~”

 

군대 가기 전 잠깐 임시직으로 집배원 일을 한 박씨는 군 제대 후 100:1의 경쟁률을 뚫고 정식으로 입사하게 됐다.

“그때 사람 엄청 몰렸죠. 30명 뽑는데 3000명이 넘게 지원했다니까요. 난 머리가 안 좋아서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그냥 무조건 책을 달달 외웠어요. 그래서 3등으로 들어갔지 아마도. 첫 발령을 받고 나서 부지런히 일했어요. 아, 물론 가끔 하기 싫은 때도 있었죠. 그래도 그냥 열심히 했습니다. 내 일이니까….”

 

김제에서의 2년 근무 후 1979년, 박씨는 전주로 발령을 받아 지금 일하고 있는 전주우체국으로 오게 된다.

 

80년대까진 자전거를 타고 배달을 하는 집배원의 모습이 일상적이었다. 배달 품목도 손으로 삐뚤삐뚤하게 쓴 편지가 대부분이던 시절이다.

“그땐, 가방 하나면 충분했죠. 그날 배달할 거 가방 안에 다 넣고 자전거로 휙 한 바퀴 돌면 됐어요. 물론 시간이야 많이 걸렸죠. 그래도 그게 다 운동이었어요.”

 

90년대 이르러 이륜차가 보급된다. 박씨는 배달 품목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이륜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들,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말이 빨라졌다,

 

“아마도 전주는 이륜차가 제일 나중에 보급됐을 거예요. 아, 지금이야 택배도 많고, 픽업도 있고, 동네도 커지고 이륜차 아니면 배달 못 다니죠. 보통 동 별로 한두 명씩 팀을 이뤄 배달을 가는데, 효자동 같은 경우는 24명이 배달을 나가요. 그 정도면 무주군 전체 정도의 규모죠. 그래서 가끔 배달에 늦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좀 고객들이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요. 우린 언제나 고객 입장에서 친절하게 배달하려고 애쓰고 있거든요.”

 

추억 둘... 특별한 인연들

 

길었던 집배원 생활이었던 만큼, 특별한 인연들도 많다.

 

“가끔 배달을 가면, 집에 사람은 없는데 문이 열려 있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경우 내가 문단속을 해주곤 하는데, 그게 인연이 됐죠. 한 할머니가 문단속 해준 것을 가지고 너무 감동 받았다며 나에게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200만원을 준 거예요. 대학생 한 명 100만원, 중고등학생 50만원씩 2명, 해서 200만원. 그게 매년 되풀이 되고 있죠.”

 

그때가 2000년. 박씨는 그 후로 지금까지 계속 할머니의 뜻을 따라 매년 장학금 중개인 역할을 하고 있단다.

“친절이란 별게 아니에요. 내가 베푸는 작은 것 하나에도 상대방은 감동을 느끼죠. 일상생활에서도 내가 먼저 남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친절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몸에 밴 박씨의 친절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배달을 다니니까, 이집 저집 많이 돌아다니잖아요. 그러던 언젠가 한번은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에 갔는데, 집이 너무 썰렁한 거예요. 알고 보니 할머니께서 기름을 아끼시느라 보일러를 안 돌리는 것이었어요. 혼자 사시는 할머니를 보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가끔 들러 기름도 넣어드리고, 우체국에서 나오는 선물들도 챙겨 드리고 있죠.”

 

그후엔 할머니도 배달 오는 박씨를 위해 이것저것 챙겨 주신다고.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볼 때면 미안하기도 하단다. 할머니와의 인연도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집배원들 중에는 독거노인을 도와 드리는 분들이 많이 있죠. 바쁘지만 그 속에서도 넓은 마음으로 도움을 실천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추억 셋... 그리고, 지금

 

박씨의 친절과 이웃사랑 정신은 회사 내에서도 계속된다. 그의 책상 앞엔 ‘사랑·나눔 돼지 저금통’이 놓여 있다.

“연말에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어요. 한 4~5년 됐는데, 처음엔 혼자서 돼지 저금통에 모은 돈을 구세군에 가져다주곤 했죠. 그러다가 혼자보다는 직원들 모두가 함께 하면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얘기를 했더니 많은 직원들이 참여를 해주더라고요. 모두가 합심해서 하니까 때로는 어려움을 겪는 내부직원을 도울 수도 있고, 참 좋아요.”

 

박 실장의 이런 마음에 하늘도 감동한 걸까. 2005년에 박씨는 로또 3등에 당첨됐다. 당첨금은 140만원. 세금과 교회 십일조를 제하고 나니 99만원이 남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로또를 사기 전 꿈 속에 나타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알려준 번호가 99번이었다. 99만원에 만원을 더해 100만원을 불우이웃 돕기 성금으로 기탁했다.

 

그의 선행과 이웃사랑 정신은 주민들과 동료들의 입을 타고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2005년 12월엔 전국 ‘우체국 서비스왕’으로 선출되는 기쁨도 누렸다.

 

“그때 제가 중앙동에서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우정사업본부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제 뒤를 밟으면서 탐문을 했더라고요. 현장 출장 평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동네 주민들에게 전화를 걸어 평소의 제 모습을 물어보기도 했죠. 그땐 몰랐는데, 그게 다 점수화돼서 올라갔더라고요. 까다로운 절차와 테스트를 거쳐 종합 점수 1등으로 상을 받았죠. 그런데 좀 송구했어요. 하하~”

 

가족들도 박 실장의 선행과 봉사를 응원한다.

 

“아내와 딸아이 하나가 있어요. 비록 가족들에게 월급을 많이 갖다 주지는 못하지만, 좋은 일 하는 것이니까 집에서도 응원해 주고 있어요. 집에도 먹을 만큼은 갖다 주고 있어요. 하하~”

 

고객을 언제나 꽃이라 생각한다는 박씨.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그 꽃을 얼마나 관리하느냐에 달라진단다.

“꽃이 지고 열매가 맺히듯, 우리가 고객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에 따라 고객 사랑이라는 열매가 결정돼요. 무엇보다 서비스가 좋아야죠. 그건 바로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과 봉사가 있어야 가능한 거예요.”

 

박 실장의 정년은 앞으로 3년 남았다. 3년 동안 이루고 싶은 것이 꼭 하나 있단다. 지금은 비록 장학금 중계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장학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30년 집배원 생활 속에 담긴, 인연과 사랑 그리고 희망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꿈은 이뤄지고, 희망은 현실이 됩니다. 단, 그것은 꿈을 꾸는 자의 몫이고 희망을 품는 자의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 뉴스(www.sun4in.com)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집배원, #우체국,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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