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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나무·돌·금·옥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자를 새기는 일이나, 새긴 것(인장, 낙관, 어보 등)을 말한다. 전각은 문자와 조각이 결합된 조각예술로서 인면(印面)에 표현되는 다양함은 내면의 예술세계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동양예술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한 고려 때부터 시작된 한국의 전각은 조선 시대로 이어져 훨씬 다양해진다. 어보도, 문인 묵객들의 낙관도 이 전각으로 만들어진 만큼 추사 김정희나 몽인 정학교, 오세창, 김명희 등 역사 속의 문인, 명필 20여명이 스스로 전각을 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조상들이 남긴 유물인 전각은 최근 몇 년 새 전통적인 제작 방법을 벗어난 새로운 시각,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되어 대중과 가까워졌다. 하여 어떤 타이틀이나 상호, 삽화나 아트 상품 제작 등에 두루 쓰이고 있다. 전통과 실생활의 접목이라. 썩 반가운 일이다.

-<시는 말라꼬 쓰노>의 저자 송세희 시인의 작품
▲ 전각 -<시는 말라꼬 쓰노>의 저자 송세희 시인의 작품
ⓒ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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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의 대중화와 함께 최근 한국 최초의 전각시집 <시는 말라꼬 쓰노>가 나왔다. 이 시집에 수록된 전각 62점을 돌에 새긴, 즉 전각을 한 사람은 시집에 수록된 시를 쓴 여류시인 송세희(54)씨다. 즉 시인이 직접 자신의 시를 돌에 전각하여 책으로 묶은 것이다.

전각 지도는 조상들의 문화유산들과 함께 한켠에서 고풍스럽고 고즈넉하게 앉아 있던 전각을 대중 속으로 이끌어낸 고암 정병례 선생이다.

'한국 최초의 전각 시집? 어떤 모습일까?'의 궁금함으로 펼쳐 든 시집의 목차 속에서 내 고향 김제의 금산사와 조선 세조의 일화가 스며 있는 전설의 '수종사'를 만났다. 아무래도 시인은 불자 같다.

불교적인 느낌이 강하고 자기 성찰이 물씬 묻어나는 시와 전각의 고풍스러움과 고급스러운 전통이 아무렴 잘 어울린다. 여느 시집의 시편들 속에 곁들여지는 작은 삽화들보다는 훨씬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사람과의 첫 만남에 해당하는, 책의 첫인상이 무척 좋다고 할까? 호감이 느껴지는, 왠지 인간적이고 낯익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 시인을 만나 한번 물어 보는 거야. 나처럼 불자인지. 시를 써서 출판사에 넘기고 시집이 나올 날을 기다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시를 다시 한 번 한 자 한 자 돌에 새긴 그 이야기를 말이야.

-시인 송세희씨가 돌에 자신의 시(詩)를 새기고 있다
▲ 전각하는 모습 -시인 송세희씨가 돌에 자신의 시(詩)를 새기고 있다
ⓒ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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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6일 저자인 송세희씨를 만나 우리나라 최초의 전각 시집 출판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 어떻게 전각 시집을 낼 생각을 하였는가?
"어느 날 우연히 만난 전각이 좋았다. 5년 전 우연히 고암 정병례 선생님 작품이 전시된 곳에 가게 되었다. 인연이 있었기 때문인지 미술도 조각도 문외한인 나는 그때 전각 속으로 빨려들고 싶은 강한 이끌림을 받았다. 바로 전각을 배우기 시작했고 내가 쓴 시를 전각하고 싶어졌다. 나처럼 전각에 매료된 열 사람이 전각 시집 동인을 위해 뭉쳤다. 하지만 결국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그 후 1년 후 다시 5인이 뭉쳤지만 다시 나만 남아 이렇게 혼자 첫 전각시집을 내게 되었다. 때문에 한편 아쉽다. 나의 전각이 아직은 많이 쑥스럽고 부끄럽지만 전각이 좋아 계속 미칠 것 같다."

전각이 좋아 계속 전각에 미치고 싶단다. 언젠가는 전각으로 가득한 시 동산을 만들고 싶은 것이 꿈이란다. 시 역시 30대 중반 가을 어느 날에 미치고 싶은 열망으로 시작한 것이란다. 자신을 찾는 일에 미치고 싶어서 선택한 것이 문학소녀로 이름을 날릴 때 쓰던 시(詩)였고, 문단에 등단(1995년)하고 9년 전에 <가을 진달래>란 시집을 내었다고 한다.

- 최초의 전각 시집이라는 특별함도 있지만 제목도 좀 특이한 것 같은데? 단지 고향 사투리?
"시를 쓸 때 늘 나에게 묻는 말이자 나와 나의 시, 내 삶을 돌아보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왜 시를 쓰고자 하는가? 시는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써야 하는가. 나의 시는 무엇인가?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 시 한편을 가지고, 토씨 하나 때문에 수많은 밤들을 뒤척일 때도 많다. (나는) 시가 좋지만 쉽게 써지지 않고 쉽게 쓰지 못한다."

-<시는 말라꼬 쓰노> 겉그림
▲ 송세희 전각 시집 -<시는 말라꼬 쓰노> 겉그림
ⓒ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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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비소리에
깨진 어둠이 말갛다.

큰 스님 말씀이
'시는 말라꼬 쓰노'하신다.

뒤닦는 일인 줄
모르시나봐.

명치끝이 발갛고보니,
제살 파먹는 짓인 줄 이제사 알겠다.

- 시작론·2 전문

'시작론 1'은 모모 날 어느 여인이 선택한 뼈 바스러지는 사랑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사랑하는 대상끼리는 훤히 보인다. 그래서 정전중이어서 눈앞이 캄캄해도 본능은 절대 어둡지 않은 것, 절대 어두울 수 없는 것이 사랑 아닐까? 30대 중반 어느 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뼈 빠지는 뜨거운 사랑이다.

미치도록 뜨거운 사랑 밤새 뒤척이다, 한 년 놓치고 두 년 마저 놓치다. 세 년 째 낳다. 꿈 깨다. - 시작론·3 중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는가? 시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나이 서른다섯 가을이 생각났다. 그때, 평균 수명 절반을 아무런 이룸 없이 살았다는 자책감에 날마다 흔들렸다. 늘 잔잔한 편이던 내게 갑자기 몰아닥친 폭풍과 같은 방황이었다. 그래서 어둔 새벽에는 쓸데없이 초조해지고 깊은 밤에는 쓸데없이 깨어 있는 시간들이 많았다.

"여자 나이 서른 중반이 그런가요?" 서른 중반에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는 자신을 찾고 싶어 무엇에든 미치고 싶었다는 송세희 시인에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시작론1~시작론4에는 시인의 이런 고뇌와 사랑, 산고의 고통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얻은 삶, 하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사랑과 삶에 대한 깊은 고뇌가 묻어난다. 하필 이 가을에 나의 30대 중반을 떠올리며 공감을 깊게 한 시이기도 하다.

- 대부분의 시에서 불교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 어떤 시는 선시 같은 느낌도 나는데?
"난 천주교 신자이(었)다. 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절에 자주 다닌다. 특별한 계기는 없다. 다만 절에 가고 싶어 갔는데 마음이 참 편안했다. 천주교 신자였지만 절에 가고 싶어 가다보니 향이 몸에 배이듯 불교적인 색깔이 강해진 거지 특별히 불교를 공부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제는 불교를 좀 알고 싶고 선사들이 남긴 시도 좀 많이 만나고 싶다."

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31편. 금산사와 수종사 외에 백담사 만해마을과 무량사, '무심천'이니 '연꽃'과 같은 불교적인 시들이 여럿이라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말이기도 하단다. 하지만 시인은 불교니 천주교니의 구분보다는 종교를 통하여 얻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덧붙인다.

시집에 수록된 시는 모두 31편이지만 왼쪽 페이지에는 전각 2점이, 오른쪽 페이지에는 전각한 시 원문이 실려 있다. 때문에 둘 중 하나만 더듬어 읽어도 된다. 혹 모를 일이다. 이 시집을 만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멀게만 생각하였던 전각을 배우고 싶어 몸살을 앓을지도. 그만큼 전각과 시가 조화를 이룬 시집 <시는 말라꼬 쓰노>이다.

여류 시인 송세희
 여류 시인 송세희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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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덧붙인다. 전각은 생각보다 우리들 가까이에 있으며 어느 정도의 마음만 기울이면 쉽게 배울 수 있다고. 책으로 내기 위해 전각을 하고, 토씨 하나가 틀려 처음부터 다시 새기며 힘들고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아 초조할 때도 많았지만 자신의 시들을 전각으로 옮겨 책으로 나오기까지의 1년이 무척 소중했다고 말이다.

시인에게 물었다. 수록된 시중 특별한 사연이 있는 시는 없나요? 연작시 '물에 빠진 수종사'를 말한다.

물속에 빠진 종소리를 건지려다 내가 빠졌다 - '물에 빠진 수종사 1'중에서

'스님, 허공에도 감옥 있어예' '복짓는 소리 하들랑 마라', '스님, 스스로를 가두면 그게 감옥이라예'/'감옥바깥도 감옥인게야', '아, 그렇구나' 나를 건지려다 수종사 종소릴 놓아버렸다 - '물에 빠진 수종사 2'중에서

뎅그라니 홀로 남아 울지않는 종을 친다… (중략)강너머로 떠내려 간 종소릴 건져/내 안에 매달았다 - '물에 빠진 수종사 3'중에서

수종사를 다녀온 사람들의 말이 분분하다. "종소릴 들었다", "그런 게 어디 있노?"…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종소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누군가의 종소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찾아야 하는 종은 어디에 있을까?… 다시 가을이다.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또 다른 한해이다. 이런 저런 것들을 묻고 있는 '물에 빠진 수종사'다.

덧붙이는 글 | <시는 말라꼬 쓰노>-송세희 전각 시집(새김/2007년 10월 10일/15000원)



시는 말라꼬 쓰노

송세희 지음, 새김(2007)


태그:#전각, #송세희, #시집, #책읽기,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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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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