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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뚱맞다!" "웬 뒷북?"

여성대통령에 대한 기사를 쓰겠다니까, 쏟아진 주변 반응이다. 선거가 끝나면 패자는 잊혀진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해야 할 패배의 역사도 있다. '여성대통령의 시대는 정말 시기상조일까?'라는 질문 앞에서다.

올 대선 만큼 여성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적이 있었을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한명숙 전 총리,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 추미애 전 의원 등 어느 때보다도 많은 여성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졌다.

이들은 각 당 대선후보 선출 경선에서 예외없이 모두 탈락했다. 그러나 패배해서 더욱 가치가 빛나는 사람들도 있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연구실장은 "이들 여성주자들은 신체 연령을 봐도 아직 젊고, 이번 대선 과정을 통해 가능성을 충분히 점검하고 확인했다"며 "앞으로 이들에 대한 여론의 관심과 집중도가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으로 5년간 이들에 대한 관심은 '일반 정치인'이 아니라 '차기 대선주자'로서 강화된 위상 속에서의 관심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짚어보는 것은 '뒷북'이 아니다.

[박근혜] '박풍'은 멎었지만, '박근혜'는 남았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선출 전북지역 합동연설회가 열린 전주 화산체육관에서 박근혜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선출 전북지역 합동연설회가 열린 전주 화산체육관에서 박근혜 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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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1979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처음 전했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박근혜(55) 전 대표가 건넨 첫마디였다고 한다. "국가 안보가 DNA처럼 피 속에 박혀나온 조건반사적 이야기"라는 게 박 전 대표의 설명이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전까지 그는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로서의 '권력'을 누리며 다양한 국정 경험과 국제적인 외교 감각을 터득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애국주의'도 이 때 체화됐다.

1998년 대구 달성 보궐선거에서 안기부 기조실장 출신 엄삼탁씨를 누르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2002년 3월에는 '당권·대권 분리' 문제로 이회창 총재와 맞서다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는 강단도 보여줬다. '차떼기당'이라는 오명 속에 탄핵 역풍까지 맞아 침몰 직전에 있던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키며 '마이다스의 손, 박근혜'로 불렸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당시 테러를 당해 입원해 있으면서도 "대전은요?"라는 한 마디로 접전 지역이던 대전 판세를 일거에 뒤집는 정치력도 발휘했다. 퇴원하자마자 피습당할 때의 옷차림 그대로 대전에서 유세를 해, 당내에서조차 "독하다" "무섭다"는 말이 터져나왔다.

한 때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의 지지율 차이가 20% 포인트 이상 벌어졌고, 조직에서도 절대적 열세를 보였던 박 전 대표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앞선 데에는 이런 저력이 작용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여론조사에서 이 전 시장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깝게 분루를 삼켰다. 경선 기간 내내 '이명박 필패론'과 이 전 시장 일가의 부동산 의혹 등을 제기했지만, 자신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에는 실패했다.

'박풍(朴風)'이 무너진 것은 지난해 북핵 문제가 불거진 시점과 맞물려 있다. 박 전 대표는 "여성이라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북핵 실험과 관련된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가 넘지 못한 것은 '여성에 대한 벽'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5·16은 구국혁명"식의 이념적 한계로 인해 '유신공주'라는 낙인을 벗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중도층을 비롯한 새로운 지지층을 흡수하는 데 걸림돌이 됐다. 최태민 목사 의혹에 대해선 자신에게 "고마운 분"이라며 경직됐다. 이 전 시장의 '경제제일주의'에 맞설 뚜렷한 브랜드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지난 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 박 전 대표의 '쿨'한 승복연설이 화제가 됐다. 이어 최고위원에 나서려던 측근 김무성 의원은 주저앉히더니, 중앙·지역 사무처 당직자 인선에서 자기 쪽 인사들의 불이익에 대해선 "저를 도운 사람들이 죄인인가요"라며 날을 세웠다. 당내 곳곳에서 경선 결과에 대한 '앙금'도 감지됐다.

경선은 끝났지만 여전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주목받고 있다. 대선에서의 역할과 내년 총선에서의 행보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쏟아졌다. '박풍'은 멈췄지만, 박 전 대표는 여전히 당내에서 가장 유력한 정치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49.2%)'(시사저널 2007년 조사)으로 꼽히며 4년째 수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심상정] '철의 여인'에서 '콘텐츠 갖춘 우량주'로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선출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심상정 후보가 소감을 밝힌 뒤 당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선출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되지 못한 심상정 후보가 소감을 밝힌 뒤 당원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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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서울대 캠퍼스, '유신반대' 데모대열에서 유독 눈에 띄었던 심상정(48) 민주노동당 의원. 커트머리에 청바지·운동화 차림이던 전형적인 운동권들과 달리 그는 긴 생머리와 스커트,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미대에 다니던 언니 탓이다. 1980년 겨울 구로공단에 취업하면서 '노동운동가 심상정'은 푸른색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공장과 투쟁 현장을 오가며 10년에 걸친 수배생활을 보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 기간 중 TV에 '1계급 특진, 500만원 현상금'이 걸린 '지명수배자 심상정'이 보도됐다. 쟁의조정법위반·제3자금지법위반·사문서위조·방화·폭력·집단방화·집단폭력사주·집시법위반·국가보안법위반 등 무려 9가지의 죄목이 따라붙었고, 경찰은 전담반까지 편성했다.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쟁의(투쟁)국장 시절, '인민무력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가 붙여줬다고 한다. 2000년 금속산업연맹 사무차장, 2001년 전국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지내면서 남성 중심의 노동판에서 '철의 여인'으로 불렸다.

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심상정'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여야가 뽑은 최고 국회의원'(2004년)에서부터 '국회입법 정책개발 최우수의원'(2006년)까지 그의 전적은 화려하다. 특히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소속인 그는 같은 상임위 소속 타당 의원들이 "'심상정 신당'이 생기면 입당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인상적인 의정활동을 펼쳤다.

최근 한미 FTA 협상 과정에 대한 날카로운 논리와 정열적인 언변이 돋보였고, 이건희 회장 일가를 괴롭힌 '삼성저격수 심상정'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원내 입성 3년만에 대선후보 반열에 오르는 무서운 성장세를 보였다.

'대통령 예비후보 심상정'의 패션 스타일도 조금씩 변했다. 즐겨입던 남색이나 회색 정장이 주황·연두·파랑색으로 바뀌었다. 액세서리도 거의 하지 않는 심 의원이 밝은 색 립스틱과 눈 화장을 시작했다. '투사' 이미지를 탈피, 여성스러움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심 의원은 결선투표에서 47.26%를 얻어 과반수에서 불과 2.74% 모자라는 대선전을 펼쳤지만 권영길 후보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그와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함께한 손낙구 보좌관은 "과거와 미래의 싸움에서 과거의 장벽이 너무 높았다"고 평가했다. '상식'이 사라진 자리에 "심상정 후보가 승리했을 때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주류의 기득권이 존재했다"고 했다.

그는 또 "현재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낮은 것은 우리가 대변하려는 전략적 지지층에서 자리를 못 잡았기 때문"이라며 "심상정 의원이 후보가 됐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정치는 결국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본령이다. 다수의 서민들이 부동산 때문에 고민하는데, 이들을 대변한다는 정당은 부동산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얘기 뿐이다. 일반 서민들은 이런 정당을 자기 세력으로 안 본다. 거리감을 느낀다."

그는 특히 "문국현식으로 경쟁력을 갖고 치고 올라오면 '실력' 면에서 우리가 어려워진다"며 "(문국현 후보는) 자본주의를 잘하면서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고 투기를 잡겠다고 하는데, 이를 우리의 전통 지지층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 점에서 손 보좌관은 '심바람'의 요인을 '내용(콘텐츠)'에서 찾았다. "권영길·노회찬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과거 성과에 머물러왔다면 심상정 후보는 서민들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풀기 위해 소통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 의원이 여성이라는 것에 대해선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활동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당원들은 일반 서민이다. 여성대통령에 대한 마음의 벽이 기존 정당보다는 덜하겠지만,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여성이라는 점이 초반엔 장점이었지만 결선 투표에서는 결국 50%를 넘는 데 일정부분 장애가 됐다."

그렇다고 심 의원이 여성이기 때문에 패배했다는 것은 아니다. 손 보좌관은 "권영길 후보를 찍은 당원들이 전부 무슨무슨 파는 아니지 않나, 그런 면에서 권 후보를 뛰어넘지 못한 것은 결국 심 후보 자신의 한계"라며 "그 한계가 무엇일까? 두 달이 지났지만, 나도 아직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나마 '심상정 돌풍'이 분 것은 미래로 나가기 위한 씨앗을 만들었다." 손 보좌관의 말이다.

[한명숙] "신사임당 보다는 김만덕이고 싶었는데..." 

한명숙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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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62) 전 총리는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남편이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간 옥바라지를 했다. 자신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른 재야 운동권 출신이다. 또 여성민우회·여성단체연합 등을 이끌며 많은 여성운동가를 배출한 '여성운동의 대모(代母)'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당 창당과 함께 비례대표로 16대 국회에 진출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엔 초대 여성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출범 후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17대 총선 당시 경기 고양 일산갑에서 '탄핵 주역' 홍사덕 한나라당 전 의원을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재선에 성공했다.

지난해 4월 첫 여성 총리로 지명된 뒤, 그는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럽지만 우리 정치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이라며 "첫 여성 총리는 여성에게 희망"이라고 말했다.

'얼굴 마담'이란 일각의 우려를 '민생 총리'로 말끔히 잠재우고, 당·정간 가교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택 미군기지 사태를 물리적 충돌 없이 해결하는 등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여기에 부드러운 카리스마, 개혁 이미지 등을 가미해 일찌감치 대권 후보로서 경쟁력까지 인정받았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사임당보다는 김만덕을 닮고 싶다"고 했다. "신분과 성의 불평등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먹여살린 어머니 리더십을 배우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만덕은 조선시대 후기 제주도에서 비범한 상업적 재능을 발휘해 큰 재산을 모은 뒤, 재난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제주도민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다.

그러나 한 전 총리는 '김만덕'이 되지 못했다. '온화한 이미지', '화합과 소통의 리더십' 그 이상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친노주자로서의 선명성 역시 충분히 부각시키지 못하면서 뒤늦게 경선 레이스에 합류한 이해찬·유시민 후보의 기세에 밀렸다. 지지율에선 선전했지만 조직력의 약세도 드러났다. 한 전 총리가 이해찬·유시민 후보를 향해 '친노후보 단일화' 카드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화' 카드가 오히려 한 후보를 끌어내리는 부메랑이 되고 말았다.

'친노후보 단일화' 카드는 고심 끝에 나온 '마지막 승부수'가 아니었다. 당시 한명숙 후보의 대변인을 맡았던 김형주 의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단순히 그 주에 별다른 이슈가 없으니까 하나 내놓은 것이 '후보단일화'였다"며 "내가 그 얘기 듣고 캠프로 달려가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막 뭐라고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고 안타까워했다.

물론 지역마다 친노 지지층이 세 갈래로 나뉘어서 '누굴 지지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아우성이 거셌다. 그러나 한 전 총리가 먼저 '친노 단일화' 문제를 꺼내듦으로서 스스로 '뒷심' 부족을 인정한 꼴이 됐다. 전략의 부실을 드러낸 셈이다.

한 전 총리는 과연 준비 돼 있었을까?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권력 의지는 충만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지만, 한 전 총리는 경선도중 한 인터뷰에서 "첫 여성대통령에 도전해보니 벽이 두텁더라"고 토로한 바 있다.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도 많이 느낀다"고 했다. "'여성대통령은 시기상조 아니냐'는 편견이 내 앞길에 장애물로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추미애] 대구 세탁소집 둘째딸의 '아쉬운' 도전

추미애 전 의원
 추미애 전 의원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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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한 전 총리가 '후보단일화'에 대한 의지가 있었다면 왜 컷오프(예비경선) 전에 결단하지 않았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한 전 총리에 근소한 차로 밀려 컷오프를 통과하지 못한 추미애(49) 전 의원 때문이다.

김형주 의원은 "광주지역 경선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컷오프 전에 친노후보들이 단일화 하지 않았다는 불만과 비판이었다"며 "추 후보가 됐다면 경선 판에 민주당 세력까지 모아서 흥행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많았다"고 전했다.

판사 출신인 추미애 전 의원은 한 전 총리보다 빠른 1995년 국민회의 부대변인 자격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역시 김대중(DJ)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대구에서 세탁소집 둘째딸로 태어나 호남출신 변호사와 결혼했다. TK 출신이면서 호남 정서에 먹히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라는 게 그의 최대 장점이었다.

특히 97년 대선 당시 DJ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대구에서 혼자 '잔다르크 유세단'을 이끌고 고전분투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2003년 민주당 분당 때 열린우리당 합류를 거부했으며, 2004년 총선 때는 민주당 선대위원장으로 광주에서 사흘간 3보1배를 했지만, 탄핵 역풍을 이기지 못하고 낙선했다. 이후 2년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추 전 의원의 당초 목표는 내년 총선이었다.

그러나 범여권 대통합 과정에서 대선으로 목표를 상향 조정했고, 한명숙 전 총리와 여성 후보 대표 자리를 놓고 막판까지 경합했지만, 결국 후발 주자라는 약점을 넘지 못했다.


태그:#여성대통령, #박근혜, #심상정, #한명숙, #추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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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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