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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는 가을을 대표하는 풀이다. 자줏빛 억새도 있고, 노란빛을 띠는 억새도 있지만 역시 억새는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장관이다. 그것도 수십 만평, 수백 만평의 대지 위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따라 이리저리 일렁거리는 억새밭은 경이로움을 안겨준다.

 

왜 하필이면 '억새'라고 했을까. 억울한 심정을 담고 있는 풀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억만 겁처럼 못다 한 사연을 지니고 있는 풀이라서 그런가. 억새는 가을의 전령사이자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오묘한 풀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억새밭을 꼽으라면 화왕산 억새밭과 천황산 억새밭이 있다. 두 군데 다 족히 수백만 평을 자랑한다. 그것도 산 정상 근처에서 웅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그 장쾌한 억새밭에 서면 인간은 그저 초라해진다. 그 장대한 서기를 뿌리는 억새밭에 서면 인간은 하염없이 소박해진다. 억새밭은 인간의 나약함과 자연의 웅혼함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제인 것이다.
 


이 웅대한 억새밭을 부산 근교에서 마음껏 볼 수 있는 곳이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승학산이다. 고려 말 무학대사가 산천을 유람할 시, 산세가 준엄하고 기세가 높아 마치 학이 나는 듯하다 하여 승학산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 이 승학산의 정상 근처에 가면 족히 수 만평은 됨직한 억새밭이 낙동강과 남해를 굽어보며 굽이굽이 펼쳐져 있다.

 

이 땅의 어느 산에 있는 억새밭이나 그 나름대로 특성이 있다. 하지만 승학산 정상 인근의 사면에 펼쳐진 억새밭은 여타 산들의 억새밭과는 다른 맛이 있다. 천황산이나 화왕산의 억새가 널따란 평지 위에서 웅대한 맛을 풍긴다면, 승학산의 억새는 흘러내리는 산비탈을 장식하는 아찔함을 연출하고 있다.

 


승학산의 억새밭에서 아낌없이 내려다볼 수 있는 낙동강과 을숙도, 진우도의 모습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또한 저 멀리 보이는 절영도와 신선대 부두, 신평 바닷가의 아스라함은 투명한 눈동자를 적시는 수채화이다. 그 풍경을 보고 누군들 시인이 되지 않으며, 그 풍경을 보고 누군들 명창이 되지 않으리. 시인과 화가, 명창의 숨결이 스며있는 승학산에 올라 심장 깊숙이 박히는 맑은 바람을 어찌 외면하리.
 


승학산의 가장 큰 장점은 부산시내와 무척 가깝다는 것이다. 동아대학교를 거쳐 올라가는 길도 좋고, 하단이나 당리지하철 역에서 올라가는 길도 가깝다. 또한 범일동 안창마을에서 수정산을 거쳐 종주하는 코스도 있다. 승학산에서 시작하여 구덕산, 구봉산, 엄광산을 거쳐 수정산으로 하산하는 코스를 거치면 부산 시내를 샅샅이 볼 수 있는 영광도 누릴 수 있다. 장쾌한 억새밭도 보고, 부산 시내도 오밀조밀하게 구경할 수 있는 산이 바로 승학산인 것이다.
 


부산시내에서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산, 승학산. 승학산에서 시작되어 수정산으로 내려가는 산행로에는 현란한 가을 색이 물들어 있다.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옹달샘을 만나게 되고 꽃동네로 유명한 구덕꽃마을도 만나게 된다.

 

꽃마을은 부산 시내에서 오리고기집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며, 수정산을 거쳐 범일동 안창마을에 가도 저렴한 가격으로 오리고기를 즐길 수 있다. 노곤한 산행 후에 부드러운 육질과 입안에 달라붙는 오리고기의 향을 마음껏 음미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승학산 산행인 것이다.
 
승학산의 억새군락은 승학산 동쪽 제석골 안부에 있다. 해운대에 가면 장산이 있고, 그 장산의 정상 근처에도 억새밭이 있지만 승학산 억새에는 명함도 못 내민다. 해운대 장산의 억새밭에는 장산국의 슬픈 전설이 어려 있지만, 승학산에는 학의 전설이 아름답게 어려 있다.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연상시키는 학의 마을, 승학산. 백로가 두 날개를 펼쳐 억새밭 사이로 날아가는 광경을 상상하면서 마시는 한 잔의 동동주는 어찌 그리 달콤한지. 

 


조금의 시간이 있다면 승학산에서 낙동강과 을숙도를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보고 가련만 시간에 쫓긴 중년의 사내는 하산 길을 재촉해야 했다. 하산 길에 사내는 작은 상상을 해 본다. 해가 기울어 서녘으로 넘어가고,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태양이 마지막 힘을 다해 붉은 기운을 하늘에 퍼트릴 즈음, 은빛 억새밭이 황금색으로 물들면서 수 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혹은 이런 상상도 해본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억새밭에 은빛의 폭포수가 내려앉고, 그 억새밭 사이에서 정인(情人)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젊은이의 모습. 그때, 두 마리 학이 정겹게 달빛 사이로 날아간다. 

덧붙이는 글 | * 지난 21일 부산 승학산에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가을여행, #억새, #승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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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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