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부장님, 노을을 좀 더 붉게 하면 안 될까요? 바다에 비치는 햇빛은 좀 더 섹시~하게. 네? 네?"

지난 2월, 한 신문사 편집국. 제작을 막 끝낸 사진부장님에게 '똑딱이'(콤팩트 카메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를 건넸다.

며칠 전 다녀온 휴가 때 찍었던 사진을 파일로 옮기기 위해서다. 케이블선 가져다 혼자 옮길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고 싶었다. 이래봬도 회사에서 사진부장을 맡고 있는, '마에스트로' 고 부장님에게.

LCD 창으로 찍어온 사진을 넘겨보던 고 부장님이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쇼를 해라~ 아주 예술 사진을 찍었고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약속도 없이 우리가 낯선 곳에서 만난 것도 어쩌면 각본 없는 '쇼'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불알친구... 어색한데, 사진 한컷!

1월 말. 신문사 취재기자 입사 뒤 1년 만에 찾아온 첫 휴가를 썼다. 잔뜩 움츠러들었던 마음도 달랠 겸, 불알친구 한 명과 전남 영광의 '백수해안도로'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백수해안도로'는 노을 진 바다를 보며 자동차로 달리기에 그만인 시닉드라이브(경관주행)코스다. 국도 77호선의 영광군 백수읍 대전리~구수리의 19㎞ 구간. 전국 '가보고 싶은 길'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힐 정도로 유명하다.

소문은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늦은 오후,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려 할 무렵의 그 곳의 경치는 뇌쇄적이었다. 선홍빛의 레드 와인 같은 바다 위로 빛이 반사돼 사방이 반짝거렸다. 경치에 취해 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같이 간 친구도 곁에서 함께 말없이 경치에 취했다.

그때였다. 드라이브에 흠뻑 취할 무렵, 눈앞에 익숙한 차 한 대가 휙 지나갔다. 특히 운전석에 앉은 자(者), 무척 낯이 익었다. "하핫~ ○○지? ○○ 맞지?" 친구 말대로다. 방금 지나간 그 놈은 불알친구 중 한 녀석이었다.

이내 전화를 걸었다. 2~3번 신호음 끝에 들리는 친구 목소리. "하하~ 뭐냐! 너? 여기 뭐 하러 왔어? 나도 친구랑 머리 식히러 왔어. 깜짝 놀랐다. 야 차 돌려!"

몇 분 뒤, 우리 넷은 한 자리에 섰다. 뻣뻣한 삭신들의 참 어색한 만남. 이 역사적인(?) 만남을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더구나 붉은 해는 아직 지평선 끝에 살짝 걸쳐있다. 사진 찍기에는 최고의 시간이다.

가방에서 가져간 '똑딱이'를 꺼냈다. 어색한 만남인 만큼 특별한 포즈가 필요했다. 고민 끝에 외친 외마디. "야! 그냥 뛰어!"

똑딱이로 점프샷 찍기, 수십 장 중 두 장 건지니 '대박'

'똑딱이'를 써본 사람은 안다. 제대로 된 '점프샷' 찍기가 얼마나 힘든지. 게다가 역광(逆光)이다. 흔들리지 않고, 타이밍 맞추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이왕 뛰는 거 팔딱거리는 몸동작도 넣고 싶었다. 그날 친구들, 무던히도 많이 뛰었다. 처음엔 팔짝팔짝 잘도 뛰더니, 열댓 번 실패한 뒤엔 숫제 바닥에 드러누웠다.

수십 장 사진 가운데 그래도 두 장이나 건졌다. 나름 대박 난 셈이다. 그것도 '마에스트로' 고씨에게 가벼운 웃음을 선사할 정도의 '하이 퀄러티'(high quality)다.

"그래도 잘 찍지 않았어요? 나름 신경쓴 사진인데. '볼펜(업계에선 사진기자는 '카메라', 취재기자는 '볼펜'이라고 부름)'이 이정도 찍으면 대단하죠. 후훗."

"아잉~부자~앙~님." 코에 바람을 살짝 넣어 애교(?)를 부렸다. 추억에 남을 수 있는 고급스런 사진 한 장 남기기 위해서.

예상은 적중했다. "아~ 알았다. 알았어. 그만! 그만!" 먹혔다. 애교 연속 콤보가 듣기 거북했는지, 고 부장님이 순순히 부탁을 들어줬다.

5분 남짓 흘렀을까. 수차례 마우스가 '딸깍' 거리더니, 사진이 제법 근사해졌다. '똑딱이'로 찍은 게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전남 영광 백수해안도로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한 점프샷.
▲ 야! 뛰어~ 전남 영광 백수해안도로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한 점프샷.
ⓒ 이승배

관련사진보기


"감사합니다. 역시 '마.에.스.트.로'." 컴퓨터를 끄고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간 부장님, 할 말이 생각났는지 뒤를 돌아봤다.

"정작 필요할 때는 형편없이 찍더니. 뭐야~ 놀 때는 잘만 찍네? 요놈~" 역시 공짜란 없었다. '마에스트로' 고씨는 그렇게 나를 살짝 즈려밟아 주시곤, 이내 사라졌다.

8개월 만에 다시 꺼내본 이 사진.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게 한다. 그 기억은 더 시간이 흘러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이 사진만 있다면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블로그(goster.egloo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영광, #백수해안도로, #점프샷, #여행, #시닉드라이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내가 밉습니다. 화가 나도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내가 너무나 바보 같습니다. 돈이, 백이, 직장이 뭔데, 사람을 이리 비참하게 만드는 지 정말 화가 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안타까운 '클리셰'의 향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