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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인호 소령 동상 앞에선 여수역사연구회원들
 고 이인호 소령 동상 앞에선 여수역사연구회원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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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토요일, 여수시문화원 부설 여수역사문화연구회원 가족 44명이 임진왜란의 유적을 찾아 진주 임란박물관과 해군사관학교박물관을 방문했다.

오전 8시 여수시 2청사를 출발한 차는 진남경기장내 6·25참전 학도병기념비 앞에서 묵념하고 임진왜란 3대대첩지였던 진주성에 도착했다. 아름다운 남강 위에는 유등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유등축제는 1592년 10월 5일부터 10월 10일까지 있었던 처절한 진주성 싸움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열리는 것으로, 국가지정 최우수문화관광축제로 선정됐고 시설물들이 남아 있다.

진주 남강 유등축제현장의 주간모습
 진주 남강 유등축제현장의 주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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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강에 적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은 논개의 영정을 뒤로하고 임란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출입구를 통과하면 1차 진주대첩의 마지막 날 왜군을 물리치고 장렬히 전사한 김시민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선조임금이 하사한 교서가 전시돼 있다.

선무공신 김시민 교서는 1604년 선조가 하사한 이후 충북괴산의 충무공 김시민 장군 종가에 전해 내려왔으나 일제강점기에 유출되었다. 2005년 11월 일본의 고미술입찰회에 출품된 교서를 본 재일교포학자와 일본에 머물던 우리나라 학자들이 유족과 언론에 이 사실을 알렸다.

지난해 6월말부터 MBC <느낌표>의 ‘위대한 문화유산 74434’ 제작진과 진주시민을 중심으로 모금운동이 전개됐고, 2006년 9월 22일 국립진주박물관으로 돌아왔다.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시민 교서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시민 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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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실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다양한 테마별로 전시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보물 331호인 금계일기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들의 여행기 및 의병활동기록 등이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한일 양국의 상황과 전쟁의 진행과정, 그리고 관련된 자료와 문화재 전시를 볼 수 있어 전쟁에 대한 종합적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진주성을 떠나 해군사관학교로 가는 버스안에서 답사를 주관한 순천 청암대학교 정희선 교수는 “진주성 복원 당시 진주시민이 보여준 시민정신으로 훌륭한 진주성이 되살아났다”며 “여수 좌수영성을 복원하려는 계획에 여수시민도 이와 같은 훌륭한 시민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가지를 들어서기 전 산자락에서 바라본 진해항은 외해로 연결된 통로가 보이지 않는 천혜의 군항이다. 1990년 4월 28일에 완공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애족정신과 위대한 활약상, 선조들의 해양활동 역사를 해군장병과 사관생도들에게 교육시킬 목적으로 건립됐다.

이순신장군을 소개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순신장군을 소개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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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판 이순신 장군 전집
 북한판 이순신 장군 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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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은 이충무공실, 해군 해양실, 해사실로 나뉜다. 이충무공실은 장군의 생애를 표현한 전시실로, 이순신 장군의 행장, 초상화 관련 문헌 등 모두 212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해군 해양실에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손원일 제독의 흉상과 유품들이 있고, 함정의 변천사를 실물 크기의 모형으로 볼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옥외전시물로는 1800년대의 포를 비롯한 각종 해양장비들이 있고, 해상 전시물로는 1980년대에 해군에서 복원 건조한 거북선이 있어 그 안으로 직접 들어가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중령으로 예편 후 충무공과 임진왜란에 관한 저서와 번역서 13권을 내고, “충무공 연구를 위해 고향보다 여수를 더 많이 찾았을 것”이라고 웃음 짓는 충무공리더십센터 최두환 교수의 강의요지는 이렇다.

이순신 장군의 승전요인으로 조선수군의  판옥선과  함포중심의 무기체계를 들었다. 왜구의 주요 전술이 배를 계류하고 기어 올라와 검을 주무기로 싸우는 등선육박전술인데 이를 무력화하는 판옥선과 일본 수군이 접근하기 전에 함포로 격파한 후 돌격선인 거북선이 적진 한 가운데 쳐들어가 좌충우돌하여 쳐부순 것이다.

임란 중 있었던 커다란 해상전투 29번 중 3번은 원균이 지휘했고, 나머지 26번의 전투에서 단 한척의 배도 잃지 않고 왜선 731척을 물리친 충무공의 공적은 ‘무한대 승리’로 세계 전사에 없다.

특히 학익진은 적선을 포위한 채 함포를 이용하여 궤멸시키는 전법으로 승리의 비결이었다는 최교수는 그 무엇보다도 장군의 리더십을 승리의 요체로 보았다.

최두환 교수의 강의 모습
 최두환 교수의 강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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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리더십이란 외래어를 대신해 1년 20일 만에 찾아낸 순수한 우리말은 ‘횟손’이다. 리더십은, ‘사람을 포용하여 잘 부리는 솜씨와, 일을 잘 처리하는 수완’이다.  ‘횟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이나 일을 휘어잡아 잘 다루는 솜씨이며,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는 외래어의 리더십과 동일한 개념이며 더 명확한 설명이란다. 다른 장수들은 수확한 곡식을 다 거두어 가버려 백성들이 굶어죽을 지경에 빠지게 했는데 거둬들인 곡식을 백성과 반반씩 나눠줘 감동을 줬다. 법과 원칙을 준수하고 백성과 부하들을 온정으로 아끼고 섬기며, 적을 뛰어넘는 무기체계와 전술을 개발해 불패의 신화를 창조하고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간적 매력을 가져라."

선조가 피난갈 때 백성들에게 돌팔매질을 당했는데, 온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을 받았기 때문에 질투가 난 선조의 미움을 받아 옥에 갇혔고 결국 백의종군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에 대해 자살설, 은둔설, 암살설, 전사설 등이 있으나 절대 자살할 리가 없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의 목숨도 자신한테 달렸는데 전쟁터에서 자살한다는 것은 장수가 아니다.

그가 백령도 인근 NLL에서 고속정 편대장을 할 당시의 얘기다. 북한 함정이 접근해오자 전투배치 명령을 내리고 방탄복을 찾는데 함장인 자신의 것이 없었다. 적함에서는 포조준이 이뤄지고 전투 직전 상황에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비상상황이 끝나고 방탄복을 조사해보니 정원에 맞게 준비된 방탄복을 두 개나 껴입은 병사가 있었으니 편대장 것은 있을 리가 없었다. “전쟁터에 가면 살려고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다. 자살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멀리 독도함의 모습이 보인다
 멀리 독도함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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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인근의 태평양에는 해양 주도권을 잡으려는 무기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예견하고 최신예 함선과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하고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한 혁신 마인드를 지녔던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본받아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 SBS와 남해안신문 및 뉴스365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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