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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현기와 나는 뉴질랜드 최대의 관광 도시, 로토루아의 ‘스타 벅스’ 앞에 있었다. 해 지면 가게 문을 닫아도, 커피 전문점만은 다르겠지 하는 기대로 왔는데 역시 문은 닫혀 있었다. 불 꺼진 시내, 지나가는 차와 사람도 드물었다. 우리 둘이는 차를 세워둔 채로 천천히 걸었다.

 

“숙모, 난 생리가 싫어요.”
“어? 여기 와서 너도 생리를 하게 됐어?”
“아니요, 혜린이(현기 여자친구)가 짜증내요. 그러면서 4일만 참아 달래요. 숙모는 며칠 해요?”
“혜린이는 완전 축복 받았다야. 숙모는 일주일 꼬박 하거든.”

 

현기는 중학교 3학년 때 뉴질랜드에 왔다. 유학 생활이 3년쯤 됐다. 한국에서 학교 친구들이, 방학이면 학원을 더 다니며 공부할 때, 현기는 대학생 배낭여행 팀을 따라서 인도 여행을 하기도 했다. 씩씩하고, 성정이 착해도, 공부를 잘 하는 편이 아니어서 ‘예쁜 사람’ 대접을 받는 학생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에 와서는 한국사람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고, 인종 차별도 심했다고 했다. 학교는 오후 3시 30분이면 ‘프리 타임’이어서 유학생들과 함께 어울렸다. 술자리도 흔했다. 그러다가 현기는 학생 도시라고 불리는 파머스턴노스로 전학했다. 1년 반 전이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현기가 처음으로 유학 생활을 시작했던 도시 해밀턴에 들렀다. 현기가 사귀었던 친구들도 만났다. 그 애들 중 몇은 부모님과 함께 뉴질랜드에 왔다. 부모님들은 미용실을 하거나 모텔을 한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어르고 달래주는’ 청소년 시기의 특권을 누린다. 

 

“숙모, 부모님이 없으면 막 살아요. 유학 자체가 애를 버려요. 나는 아들 딸 낳으면, 절대 유학 안 보낼 거예요. 보내고 싶으면, 한국에서 일 그만두고, 자식이랑 같이 와야 해요. 같이 살면서, 식당을 하든지, 미용실을 하든지, 모텔을 해야 해요. 진짜, 유학 생활은 힘들어요.”

 

우리 얘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작은 누나가 “뭐가 힘들어? 한국에서 학교 다녀도 그 만큼은 힘들어” 했다.

 

“봐 봐요. 엄마가 저렇게 말하면, 정 떨어져요. 원래 애들은 까지잖아요. 숙모도 그랬죠?”
“(허걱! 아직도 티가 나나?)… 응.”
“근데 여기서는 더 까져요. 마약도 쉬워요. 숙모, 그러니까 제규는 스무 살 넘어서 유학 보내세요.”
“어. 제규는 서른 살 됐을 때에 생각해 볼게.”
“장난 아니예요. 스무 살은 돼야 해요. 솔직히, 나는 너무 어려서 유학 왔어.” 

 

우리는 진짜 어려서 유학 온 꼬마들을 모텔(우리나라 콘도 같다)에서 만났다. 네 살, 일곱 살인 그 애들은 2년 전에 엄마와 뉴질랜드에 왔다. 휴가철을 맞아 한국에서 온 ‘기러기 아빠’와 여행 중이었다. 나는 그 아빠가 대단하고 신기했다. 미국보다 생활비가 덜 든다는 뉴질랜드도 집 렌트비 1000불, 생활비 1000불, 교육비 500불(영어, 수학, 음악, 운동), 기타 잡비 500불, 대략 3000불을 송금해야 된단다.

 

언젠가 나는 밥벌이가 너무너무 지겨웠다. 자꾸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다르게 살고만 싶었다. 그 때 현기가 막 유학 생활을 시작했을 때여서 작은 누나는 나보고, 우리 아이 데리고 뉴질랜드로 건너가서 현기랑 함께 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남편한테 물었다.

 

“대단하게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제규 데리고 뉴질랜드 가서 살아도 돼?”
“그래. 가고 싶으면 가. 난 배지영하고 제규 가자마자 이 집 팔고, 전화번호도 바꿔버릴 테니까.”

 

 


뉴질랜드에 와서 야성이 있는 깨끗한 자연이나 해 떨어지면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생활만 본 건 아니었다. 조카 전현기를 봤다. 한국에 있을 때처럼, 살찐다고 먹지 말래도 막대 사탕을 물고 있고, 밤이면 커다란 통에 든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학교 끝나고 들른다는 패스트푸드 체인점에 들러서 “나, 이거 먹잖아. 그래도 맛있는 편이에요” 하면서 음식을 추천했다.

 

아주 딴판인 전현기도 보았다. 나는 주부 생활을 10년 했어도 물건 값을 기억 못 한다. 그런데 현기는 샴푸나 화장지 같은 생필품 값을 외우고, 주유소 할인 쿠폰을 챙겨 다녔다. 주유소에 딸린 슈퍼보다는 대형마트가 싸고, 물도 냉장고에 안 들어간 게 쌌다. 현기는 미지근한 생수를 사다가 모텔 냉장고에 넣어놓는 알뜰함을 보였다. 

 

양털 깎는 쇼를 보러 갔을 때에는 본 적 있다며 입장료를 아꼈다. 표를 끊을 때에 이미 쇼는 시작한 뒤였다. 안내인은 시작한 지 15분밖에 안 지났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한테 동시통역 헤드폰을 찾아서 끼워주고 앉아 기대를 하는 순간에 끝나버렸다. 나는 환불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시간에 맞춰오는 단체 관광객만 상대해서인지, 서로 미루며 대꾸하지 않았다. 주차장에 있던 현기가 와서 환불 받았다.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날에야 현기가 사는 파머스턴노스로 갔다. 현기가 홈스테이 하는 집에 김치와 밑반찬을 주고, 가디언을 만나 밥을 먹었다. 가디언은 성공보다 실패한 조기 유학생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어떤 유학생은 뉴질랜드에서 3년을 지냈지만 가디언(그가 돈 관리를 해 준다)에게 문자 메시지를 "yongdon juseyo(용돈 주세요)"로 보낸다고 했다.

 

실제로 조기 유학 성공률이 5% 미만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기 유학 잘못 가면 내 아이 폐인 된다>에서는 한국에서 상위 5% 안에 드는 학생이 좋은 사립학교에 유학하거나 목적의식을 가진 예체능계 학생이 특기 학교로 진학했을 경우에만 성공한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부모 중 한 명이 함께 유학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 가지 경우에 들지 못하는 현기의 유학 생활을, 작은 누나는 실패로 볼까? 성공으로 여길까?

 

“현기가 한국에 있었다고 해 봐. 고등학교도 간당간당하게 갔을 거야. 지 아빠가 일 때문에 외국에 다녀도, 말을 할 줄 몰라서 얼마나 영어에 한이 맺혔나 몰라. 그런데 현기가 저만큼이라도 앞가림 하니까 좋아. 저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힘들었겠지. 그래도 나는, 현기 유학 보내서 성공했다고 생각해.”

 

식사가 끝나고도, 유학생활에 대한 얘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아기였을 때 뉴질랜드에 온 가디언의 세 아이들은, 한국식 밥상 예절을 알고 있어서 먼저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심심하고 지루한지 저희들끼리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였다. 아! 영어에 대한 열망의 끝은, 한국 사람이면서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고 있는 이런 장면일까.

 

 

 

우리는 현기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현기는 아기였을 때 엄마 젖을 먹었고, 유학 오기 전까지도 엄마 젖가슴을 만져서 그런지, 오랜만에 본 엄마를 틈 날 때마다 껴안고, 뽀뽀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클랜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고, 현기는 다시 남겨져야 하는 파머스턴노스의 공항에서는 제 엄마한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서로가 학교에서 날아온 경고장을 받은 표정이었다. 누구도 대놓고 울지는 않았다.

 

현기는 유학 와서 한국에서보다 뛰어나거나 특별해지지 않았지만 부모와 떨어져서도 ‘배리지’ 않고 건강한 성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그 애는 처음 유학 와서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 중 한 명이 마약을 권할 때 거절했다. 그리고 낯선 도시로 옮겨와서 새로 시작했다. 그 때 현기가, 첫 번째로 정든 곳과 결별을 선택했을 때, 그 애 스스로 유학 와도 괜찮다고 말하는 ‘스무 살’이 되었는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올 여름, 6월에서 7월 사이에 다녀왔습니다. 글에 나오는 작은 누나는 우리 아이의 고모, 제게는 시누이입니다.


태그:#뉴질랜드 , #조기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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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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