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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만난 10월 2일 장기구금 양심수(이하 장기수) 세 명이 관악구 만남의 집에서 정상회담 관련 뉴스가 흘러나오는 TV를 주시하고 있었다.

 

문상봉(82), 강담(74), 김영식(73). 그들은 남쪽에 피붙이 하나 없는 무연고 장기수들이다. 가족들은 모두 이북에 남아있어 생사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옥고 탓에 몸도 성치 않은 그들이 TV를 바라보는 눈길은 형형했다.

 

보이는 모습 하나 하나, 들리는 소리 하나 하나 놓치지 않았다. 가끔씩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고, 시선을 돌려 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문씨에게 "오늘 아침부터 TV를 지켜보셨냐"고 물었다. 문씨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해했다.

 

"이제 말이 잘 나오지가 않아요. 기자 양반이 묻는데 대답을 잘 못하겠네. 미안하네."

 

병색이 완연히 묻어나오는 말투였지만 정중했다. 되레 질문을 던진 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다행히 문씨 옆에 앉아 있던 강담(74)씨가 "내가 답하지"라며 민망함을 덜어줬다.

 

반신불수의 몸. 그러나 통일을 향한 그의 정신은 식지 않았다

 

강씨의 몸도 성치 않다. 3년 전 중풍을 맞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전립선 암 치료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강씨는 2007 남북정상회담의 과제에 대해서 논하는 등 아직도 지치지 않은 정신을 보여줬다.

 

"시기가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린 것은 정말 잘 됐다. 이번에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건넜다. 정말 큰 일을 했다. 7년 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만큼 남북한 서로 간의 이해와 협력 수준이 상당히 진전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불어 강씨는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그동안 남한이 북에 지원해주는 방법을 넘어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창출되길 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에 전기, 철도, 항만 등 기초적인 사회시설을 건설해야 한다"고 정상회담의 구체적인 추가 과제까지 제시했다.

 

반면,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이들에게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강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답방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며 "정상회담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는 이들을 보면 과연 저들이 같은 동포인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 사람들, 북한에서 수만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은 탓을 북한 지도부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남북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은 경제 경쟁 아닌가. 북한 지도부가 자칫 자신의 체제를 무너뜨릴 짓을 일부러 하겠는가. 사실 미국이 북한을 봉쇄해서 대량 아사 사태가 난 게 아닌가. 그 사람들은 보따리 싸서 미국에서 살아야 한다."

 

"장기수 송환과 국군포로 맞교환? 정치적 수사법에 지나지 않아..."

 

조심스럽게 "만약 정상회담에서 장기수 2차 송환이 결정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으시냐"고 물어봤다.

 

"31명 정도의 동지들이 북한으로 돌아가길 원하고 있다. 이제 다들 나이도 많고 몸이 허약해 걱정이다. 벌써 네 분이 돌아가셨다. 인생 중 태반이 넘는 시간을 남한에서 보냈지만 여생을 고향에서 보내고 싶다."

 

강씨는 가족들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1965년 3월 체포됐을 때, 그의 부인은 세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4월이 산달이었는데 그 아이가 컸으면 지금 42살 정도 됐을 거다. 그 아이가 가장 많이 보고 싶다. 딸과 아들 한명도 있었는데 당시 4살, 2살이었으니 길거리에서 만나도 서로 몰라볼게다."

 

강씨는 "장기수 송환 문제에 대해 정부나 우익단체에서 '납북자나 국군포로'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문제 논의에 대해 잘못 접근한 것"이라고 말했다.

 

"동포 문제를 논할 때 동시에 주고 받겠다는 생각으로 임해서는 안 된다. 인류적 보편적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장기수들을 우선 송환하고 나서 납북자나 국군포로에 대해 의제를 꺼낸다면 오히려 더 양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겠는가. 그저 납북자, 국군포로와 맞교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정치적 수사법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정치적 수사법의 희생양들이고..."

 

모든 남북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세상이 오길

 

출소 후 장기수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강씨도 "20년 이상을 옥에 있다 나오니 TV며 전화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모르겠다"며 사회적응이 쉽지 않았음을 토로했다. 그는 88년 특사로 석방된 후 지인들의 도움으로 가구공장과 건설 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꾸리지 않았다. 오히려 남북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이번 강씨를 비롯한 장기수들은 이번 북한 수해 복구 지원금으로 없는 돈을 모아서 1000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조용히 TV 앞을 지키던 김씨가 '송환문제'에 대해 한 마디 덧붙였다.

 

"북한으로 돌아가 나 한 몸 편하자고 하는 것이라면 간절히 바라지 않어. 아무쪼록 남북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돼야지. 그게 맞는 거야." 


태그:#장기수, #통일, #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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