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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골목길에서 말리는 태양초
 가난한 골목길에서 말리는 태양초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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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한가위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비는 또 왜 그리 많이 퍼부어대는 걸까? 곳곳이 물난리를 겪고 농촌 들녘에 누렇게 익어가던 벼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버린 모습이 고달픈 삶을 버티지 못하고 드러누운 인생처럼 참으로 처참하다.

그래도 엊그제 모처럼 쨍한 가을 햇볕에 빨간 고추를 말리는 골목길의 할머니들은 태양빛이 따가워서인지 담벼락 그늘 밑에 앉아 다 마른 고추를 다듬고 있었다. 터진 양철판과 판자로 얼기설기 묶어 가린 담장이며 사람 키보다 낮은 블록 집, 그 위를 뒤덮은 호박덩굴, 참 가난한 골목길이다. 골목길만 가난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이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래도 그 가난한 골목길을 비추는 태양빛은 강남의 어느 아파트촌이나 강북의 어느 부촌보다 더욱 밝은 빛이었다. 초라하고 꾀죄죄한 모습이지만 할머니들의 표정에도 그늘은 없었다. 가난이 꼭 불행은 아니라는 증거일 것이다. 삶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넉넉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반짝 햇볕을 보였던 가을 날씨가 태풍과 함께 또 많은 비를 몰고 왔다. 온 누리가 빗물에 흠뻑 젖었다. 쏟아져 내리는 비는 땅과 집과 사람들만 적시는 것이 아니었다. 공원 마당의 비둘기들도 흠뻑 젖어 가난한 노인들만큼이나 꾀죄죄하다.

그 빗물이 스며든 보도블록 속에서 숨이 막힌 지렁이들이 밖으로 나왔다. 비둘기 한 마리가 무심코 그 지렁이를 밟았다가 꿈틀거림에 깜짝 놀라 비켜선다. 혹시 놀란 비둘기가 그 지렁이를 부리로 쪼지 않을까 했지만 고개만 갸우뚱 거리다가 물러선다. 지렁이가 긴 몸을 늘이며 앞으로 나아가자 비둘기들이 길을 비켜주기까지 한다.

담벼락 그늘에 앉아 고추 다듬는 할머니들
 담벼락 그늘에 앉아 고추 다듬는 할머니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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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을 벗어나 어느 대학교 정문 앞에 이르자 유명시인의 시비 하나가 역시 비에 흠뻑 젖어있다. 그래도 비에 젖은 시비는 결코 초라하거나 꾀죄죄하지 않다. 오히려 빗물에 때를 씻어 청정한 얼굴이다. 그 청정한 얼굴에 미소가 묻어난다. 본래 가난한 민초들이야 어디 따듯하게 데운 물만 쓸 수 있었던가. 때로는 빗물 세수도 감지덕지 했었지.

모처럼 쏟아져 내리는 가을 햇살에 빨간 고추를 말리는 할머니들처럼 작은 것에 행복할 줄 알았더라면 우리들은 지금 모두 행복에 젖어 있을 터인데. 가을이 서러운 사람들이여, 추석 한가위가 더욱 서러운 사람들이여, 골목길의 할머니들처럼, 공원마당의 비둘기들처럼, 그렇게 행복해지자. 시비에 그린 떠돌이 인생의 삶처럼 그렇게라도 행복을 만들어 보구려.

비 맞은 공원마당의 비둘기들과 지렁이
 비 맞은 공원마당의 비둘기들과 지렁이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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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의 시 <목계장터>모두-

빗물에 씻긴 신경림의 시비
 빗물에 씻긴 신경림의 시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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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승철, #가을 햇살, #목계장터, #신경림,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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