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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38선’

1945. 9. 2. 도쿄, 미 미조리 함상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
 1945. 9. 2. 도쿄, 미 미조리 함상에서 일본 대표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장면을 맥아더 미 극동사령관이 지켜보고 있다..
ⓒ 맥아더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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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방송은 곧 한반도를 열광의 도가니로 빠트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뿐,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에 따라 우리 겨레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38선'이라는 단장의, 원한의 국토분단선을 자기들 마음대로 그었다.

1948년, 한반도에는 곧 남북 두 정부가 수립되고 미처 건국의 기틀도 다지기 전에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년 남짓 계속된 전쟁으로 피아 500여만 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고도 국토분단은 이어지지 않고, '38선'에서 '휴전선'이라는 또 하나의 단장의 선으로 변모, 고착되었다.

38 선
 38 선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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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났지만 이미 국토는 두 조각이 난 뒤였다. 해방정국에서, 6·25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에서 애꿎은 숱한 목숨들이 죽어가는 걸 보고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네가 어른이 될 때는 우리나라가 통일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게 아직도 또렷하다.

하지만 그 손자가 군에 가고 제대한 지도 30여 년이 더 흘렀고, 그때의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가 많아도 그 휴전선은 사라지기는커녕 한 치도 옴짝달싹 않은 채 여태까지 버티고 있다.

1969년 겨울을 앞두고 내가 근무하던 부대가 전방으로 옮겨갔다. 마침내 이전할 부대가 가까워져 오자 북녘에서 대남방송이 짙은 안갯속에서 점점 크게 울렸다. 그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안 대남방송을 밤낮으로 들으며 지냈다.

OP(관측소)에 올라 북녘 땅을 살펴보면, 북녘 논에도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고 추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서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상대를 욕하며, 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아픔과 의문을 품었다.

그 뒤 해외를 돌아다니면서, 나라와 나라를 여권 하나로 마음대로 지나다닐 수 있는데, 왜 우리는 같은 나라이면서도 오갈 수 없는 금단의 나라일까 매우 통분했다. 또 하나의 내 조국 북녘의 참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북녘 사람을 만나도 보안법 위반이요, 인쇄물을 소지해도 보안법 위반이었다.

북녘의 참모습을 알고 싶었다.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 <또 하나의 조국>, 황석영의 북한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는 그런대로 미처 몰랐던 북한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옛말처럼 실제로 가 보는 것만큼이야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겠는가.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

백두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환호하는 남북문인들
 백두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환호하는 남북문인들
ⓒ 북녘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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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5년 7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북녘 내 조국을 내 눈으로 보고, 북녘 동포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북녘 산하를 누비며 바람을 쐬고 물을 마시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일행이었던 정용국 시인이 평양방문 기행문 <평양에서 길을 찾다>라는 책을 엮어 고맙게도 산골로 보냈다.

,평양에서 길을 찾다> 표지
 ,평양에서 길을 찾다> 표지
ⓒ 화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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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며칠 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평양을, 백두산을, 묘향산을 답사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정 시인은 난생처음 북녘 땅을 밟으면서도 조금도 흥분하지 않은 절제된 언어로 차분하게, 그리고 날카롭게, 내 조국 산하를 굽어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날을 꿰뚫고 있었다.

평양의 지하철역은 서울의 지명이나 유명 학교 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과는 달리 ‘부흥’ ‘영광’ ‘건국’ 등 추상명사로 지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였다.

이미 텔레비전에서 본대로 부흥역도 아주 깊은 곳에 있어서 에스컬레이터로 굉장히 오래 내려가야 했다.

지상의 도로도 차량이 많은 편이 아니듯이 지하철 이용객들도 별로 없어서 4량의 객차가 가끔 오갈 뿐이었다. 깊은 곳으로 내려오니까 별도의 에어컨 시설이 없는데도 시원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일행 중에 큰 소리로 ‘반갑습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하자 마주 오는 (평양) 시민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하철에서는 잠깐 오가며 만나거나 내리고 타기 위해 스쳐 지나가며 시민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예정된 일정이거나 계획된 행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신선함을 느꼈다. 안내원들은 바짝 긴장하는 듯했지만 반대로 우리들은 느긋하게 그들을 보았다.


김창규 시인은 지나가는 이들과 악수도 하고 어린이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는 적극성을 보였다. 한 어린이는 발간 머플러를 둘렀는데 김 시인이 악수를 청하자 그 자리에 서서 처음엔 당황스런 표정을 짓더니 바로 그 멋진 거수경례를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그랬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들 평양의 시민들과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공통된 욕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단 번에 자연스러운 의사를 소통하기에는 너무 높은 벽이 우리들 사이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 벽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무너질 것인가.

우리만 옳고 저들은 마냥 그르다고 한다면 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높아질 것이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고 현상을 인정하려 하는 낮은 자세만이 그 벽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소련 체제의 빠른 붕괴와 독일의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통일의 후유증을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93~95쪽)

평양시가지
 평양시가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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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와 들꽃 한 아름을 보낸다

이 부분은 양식 있는 남북동포들이 명심해야 할 구절로, 특히 “우리만 옳고 저들은 마냥 그르다고 한다면 벽은 더욱 견고해지고 높아질 것이요, 서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고 현상을 인정하려 하는 낮은 자세만이 그 벽을 빨리 무너뜨릴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 대목은 정 시인이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에게 바치는 헌사로 여겨진다.

구름을 박차고 해가 돋자 얼싸안는 남측 고은 시인과 북측 홍석중 작가
 구름을 박차고 해가 돋자 얼싸안는 남측 고은 시인과 북측 홍석중 작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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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하여 움직이고 이륙할 때까지 조선의 작가들은 환송대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김일성 주석의 대형 초상화가 멀리 우리를 보고 있었다. 이곳을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시 올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조선은 현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문제가 풀릴 것을 기원했고, 반드시 그러리라 믿고 싶었다.

아쉬운 작별의 순간이 가고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을 이륙했다. 옥수수 밭 농부가 손을 흔들었고 모든 물상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 모질게 살아온 겨레여, 세월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고, 세월은 또 우리를 손잡게 했다. 보아라! 사람아, 세상의 이 사람들아!

그는 이렇게 책의 날개를 접었다. 그를 비롯한 우리 일행은 5박 6일 동안 북한방문에서 통일의 기운을 엿보았다. 마치 얼음장 밑에서도 봄을 기다리며 자라는 미나리 싹과도 같이. 우리 일행이 북녘 땅을 밟은 그 자체가 통일을 위한 한 줄기 서광이 아니겠는가!

때마침 다음달 2일부터 4일까지 열리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 맞춰 출간된 정용국 시인의 평양방문 기행문 <평양에서 길을 찾다>는 북녘 동포들의 모습을 알고자 하는 이에게 매우 적절한 책으로, 지은이의 겨레 앞날을 내다본 혜안과 올곧은 양심에 박수와 이 계절에 피는 강원 산골의 들꽃 한 아름을 보낸다.

덧붙이는 글 | 책이름 : 평양에서 길을 찾다 / 지은이 : 정용국 / 출판사 : 화남 / 값 : 9000원



평양에서 길을 찾다 - 정용국 시인 평양 기행문

정용국 지음, 화남출판사(2007)


태그:#방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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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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