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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전북 김제의 모악산을 오르던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 날도 전북지방에는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서울을 출발할 때는 비가 내리지 않아서 또 한 번 기대를 했었다.

비는 지난 여름동안 우리들이 등산할 때마다 우리가 오르는 산을 피해주었다. 일기예보가 무색할 정도로. 그런데 모악산 등산은 달랐다. 논산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등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되었다.

“오늘은 봐주지 않을 모양인데,”
“이 정도로 내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금산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도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비는 조금씩 내렸다. 모두 비상용으로 소지하고 있던 삼단우산을 펼쳐들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곳은 전날 밤부터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금산사로 들어가는 입구의 개울에는 제법 많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사는 한가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평일에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많은 절인데도 불구하고 매표소를 지나 일주문이 가까워질 때까지 우리들 일행 외에 다른 사람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 비 때문인 것 같았다.

“어, 이게 웬일이야? 사천왕이 무서운 얼굴이 아니고 웃고 있네.”

천왕문을 들어서며 바라본 사천왕상은 특이하게도 정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대개의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사천왕상들이 왕방울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린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웃는 표정의 사천왕상
 웃는 표정의 사천왕상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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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부도전
 금산사 부도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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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을 지나 법당 쪽으로 가는 길과 부도전으로 가는 삼거리에서 우리들은 오른쪽 길을 택했다. 모악정을 거쳐 케이블카 길을 따라 정상으로 오르기 위해서였다. 심원암 입구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 길로 잠깐 올라가자 모악정이 나타났다.

모악정은 골짜기 길가에 산뜻하게 서있었다. 비를 피하며 간식도 먹을 겸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정자에는 빙 둘러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져 있어 쉼터로는 아주 그만이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간식을 먹고 난 다음 우산이 작아서 젖을 염려가 있는 배낭에 비닐 커버를 씌우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은 넓고 잘 다듬어져 있어서 평탄했다. 그러나 한참 오르자 길은 갑자기 급한 오르막 계단길로 바뀌었다. 그 계단길을 허위 허위 올라 능선길에 접어들자 저 만큼 정상이 바라보인다. 그러나 정상은 비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저 꼭대기의 저 구조물, 저거 송전탑 아냐?”

그런 것 같았다. 멀리서 바라본 정상부근은 온통 콘크리트 구조물과 높이 솟은 철탑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 산이 평야지대에 우뚝 솟아 있어서 방송 송출용 탑을 세워놓은 것 같았다.

산줄기를 타고 오르다가 능선길 삼거리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왼쪽으로 가면 매봉으로 가는 길이요 오른쪽이 정상으로 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지척이었다. 높은 지대여서 그런지 비는 조금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비구름에 감싸인 모악산 정상
 비구름에 감싸인 모악산 정상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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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길에서 익어가는 밤송이
 능선길에서 익어가는 밤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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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길가에는 빗물에 흠뻑 젖은 밤송이들이 알알이 익어가는 모습이 탐스럽다. 송전탑 부근에서 왼쪽으로 돌아가자 정상 표지석이 나타났다. 높이 793m로 제법 높은 산이었지만 별로 힘들이지 않고 올라온 느낌이었다.

“우리들이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인데, 저 아래 산봉우리를 감도는 구름 좀 봐.”

정말 그랬다. 비와 흐린 날씨 때문에 시야가 좋지 않았지만 대신 눈 아래로 펼쳐진 구름을 바라보며 일행들은 정말 신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우와! 정말 멋있다.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저수지 이름이 뭐지요?”

마침 우리들과 같은 시간에 올라온 이 지방 사람들 몇이 있어서 그들에게 물어보니 구이 저수지란다. 반대편으로는 상당히 높직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가 매봉이라고 했다.

“저 쪽에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가 마치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어서 모악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답니다.”

날씨가 맑을 때는 김제 만경평야를 바라볼 수 있는 정말 전망 좋은 산이라고 한다.

이 모악산 자락은 예로부터 논산시 두마면의 신도안, 영주시 풍기읍의 금계동과 함께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며, 십승지지 길지로서 난리를 피할 수 있는 피난처이자 각종 무속 신앙의 본거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산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구름과 저수지 풍경
 정상에서 내려다본 구름과 저수지 풍경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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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뒤쪽 봉우리가 매봉
▲ . 저 뒤쪽 봉우리가 매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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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모악산은 산이 아니외다.
어머니외다.


저 혼자 떨쳐 높지 않고
험하지 않고
먼데 사람들마저
어서 오라, 어서 오라
내 자식으로 품에 안은 어머니외다.


-고은의 시 <모악산> 앞부분-

모악산은 고은 시인의 시처럼 상당히 높으면서도 그 높이만큼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평안함과 넉넉한 품을 지닌 산이었다. 더구나 평야 가운데 솟아 있어서 시야가 빼어난 산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쏟아지는 빗줄기와 흐린 날씨 때문에 좋은 전경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 채 하산길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산은 능선 삼거리 헬기장을 지나 심원암 쪽으로 잡았다.

심원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양편으로 많은 산죽들이 자라고 있었지만 길은 더 평탄하고 좋았다. 대부분 흙길이었고 적당히 젖어 있어서 부드러운 느낌과 함께 먼지가 일지 않아 걷는 느낌은 아주 좋았다.

내려가는 길에서는 심원암 못 미쳐 능선 위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북강삼층석탑을 만났는데 보물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재였다. 탑의 모양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탑을 둘러보고 잠깐 내려가자 심원암이다.

특이한 모양의 금산사 6각 다층탑
 특이한 모양의 금산사 6각 다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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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미륵전
 비에 젖은 미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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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빗줄기는 제법 굵어져 있었다. 심원암은 법당과 요사채 단 두 채의 절집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법당 앞마당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마당 아래 해우소를 배경으로 서있는 마애불상이 그것이었는데 자연 암석에 새겨진 일반 마애불과는 달리 석판에 새겨진 물상을 마당 가운데에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심원암 마당의 마애불상, 이마에도 불상이 새겨져 있다
 심원암 마당의 마애불상, 이마에도 불상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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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특이한 것은 이 마애불상의 이마에 새겨진 또 하나의 불상이었다. 불상의 이마에 또 하나의 불상이 새겨져 있는 모습은 정말 신기했다. 그 특이한 불상이 마당 한쪽에서 해우소를 배경으로 서서 비를 맞고 있는 풍경이 아주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 심원암에서부터 금산사까지 내려가는 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넓고 좋은 길이었다. 그 길을 걸어 내려오는 길가에서는 다시 부도밭을 만날 수 있었다. 부도밭을 지나면 곧 금산사다. 비에 젖은 금산사는 여전히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

승려들도 관광객들도 보이지 않고 범종각과 대웅전 앞에 피어 있는 배롱나무 꽃만 흐드러진 모습이었다. 일행들 중에서 독실한 불교신자인 친구 한 명이 부지런히 미륵전으로 향했다. 그가 두 손을 합장하며 엎드리는 모습을 보고 나는 당간지주를 찾아 나섰다.

이 금산사는 신라 불교 오교구산(五敎九山)의 하나로 서기 599년(백제 법왕1년)에 창건된 고찰이다. 특히 십승지지라는 명당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는 경관이 또한 빼어나다.

모악산 서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국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거찰인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 왕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세워진 절이라고 한다. 그 후 신라 해공왕 2년에 중건되었다.

배롱나무 꽃과 범종각
 배롱나무 꽃과 범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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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인조 4년에 재건되었다. 미륵전 안에 세워져 있는 11.82m 높이의 미륵불은 국내 최대의 불상이다. 그 외에도 노주, 석련대, 해덕왕사질응탑비, 오층석탑, 석종, 6각 다층석탑, 당간지주 등의 보물을 간직하고 있으며 심원암 등 몇 개의 부속 암자도 거느리고 있는 대사찰이다.

참배를 마치고 나온 일행과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 작은 우산으로는 감당키 어려울 정도였다.

"오늘도 역시 우리들의 등산을 봐주었구먼. 올라갈 때부터 이렇게 굵은 비가 내렸더라면 등산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말이야."

역시 그랬던 것 같았다. 모악산 등산도 비가 참아주지 않았더라면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모악산, #금산사, #이승철,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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