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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 가는 길.
 대자암 가는 길.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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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을 향해서 산길을 걸어간다. 대자암은 연천봉 가는 길에 있다. 비가 아까보다 조금 세차게 쏟아진다. 비는 결코 자의식을 내세우는 법이 없다. 자기 존재를 드러내 나무나  풀을 불편하게 만들기보다는 아무 말 없이 속으로 스며드는 길을 택한다.

거름이 된다는 건 그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스며들어 타 존재의 생명을 북돋는 것이다. 이 세상에 비보다 더 헌신적인 거름이 있을까. 나무는 비가 아무리 많이 흘러들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가 가진 헌신성을 익히 알기 때문이다.

이윽고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는 길이 대자암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참선도량이니 일반인의 출입을 금합니다"라고 쓰인 작은 비가 길손을 찬찬히 뜯어본다. 상당히 가파른 길이다. 그러나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은 터럭만큼도 없다. 제 등 뒤에 숨긴 아름다움을 아무에게나 호락호락 보여주지 않으려는 게 길의 고집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내 자존심은 충분히 지켰다 싶었던지 길이 슬쩍 고집을 꺾는 순간, 거기  대자암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나그네를 반긴다.

"절 속 같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암자

칠성각 가는 길에 바라본 대자암 전경.
 칠성각 가는 길에 바라본 대자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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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 법당.
 대자암 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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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문필봉(756m)과 연천봉(738.7m)을 에워싸고 있다.
 구름이 문필봉(756m)과 연천봉(738.7m)을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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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은 고요하다. '절 속 같다'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이름만 놓고 보면 어머니의 품을 연상해도 좋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대자암은 포대기에 싸인 채 잠자는 어린 아기 같은 모습이다. 문필봉과 연천봉 그리고 삼불봉이 팔을 벌려 대자암이라는 아기를 포근히 감싼 형국이랄까.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면 걸음걸이도 가만가만 걸어야 하고 말 소리도 한껏 낮춰야하리라. 우치만 놓고 보면 이곳에 무문관이라는 선방이 들어선 것은 절묘한 것이다.

법당 기단 위에 서서 눈앞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 문필봉과 연천봉이 흰 구름에 싸여 있다. <임제록>은 홍화사라는 절에서 노년을 보낸 임제 선사의 행장을 이렇게 묘사한다. "구리로 된 물병과 쇠로 만든 발우 뿐이요, 방문을 닫아걸고 말을 하지 않았다"라고.

그리고는 덧붙이기를  "소나무는 이미 늙었고 구름은 한가하여 시원스레 유유자적하도다(松老雲閑 曠然自適)"라고 그곳의 경치를 삼삼하게 그려낸다. 상상컨대, 임제 선사가 말년을 보냈다는 홍화사의 풍경이 아마도 이곳 대자암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려워라, 생사 관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무문관인 삼매당과 지행당.
 무문관인 삼매당과 지행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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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기단 위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무문관 선방이 보인다. 무문관(無門關)이란 송나라 무문혜개 선사가 지은 책 이름에서 빌어온 명칭이다.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공안 48칙(화두)을 뽑아 수록한 <무문관>이란 책이다. 이 책의 제목은 또 조주 스님에게 한 스님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은데 대해  "없다(無)"고 답한 '무자 공안'에서 유래한 것이다.

무문관 수행이란 한 마디로 '페문정진'(閉門精進)이다. 자물쇠로 문을 잠근 채 독방에서 수년간 용맹정진하는 것이다. 본래부터 나가는 문이 없거늘 '빗장 관' 자까지 붙였으니 얼마나 혹독한 수행인지 알  만하지 않는가. 들어가는 문은 있지만 나오는 문이 없으니 무문관이다. 이곳에 들면 사생결단하고 '생사 관문'을 뚫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따지면 닫힌 것은 선방의 문이 아니라 수행에 정진하고 있는 선승 자신이기 때문에 그 싸움이 오죽이나 치열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무문관의 전통을 되살린 것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 주지로 있던 정영 스님(현 대자암 조실)께서 천축사에다 '무문관'을 세우면서부터다. 그러나 천축사 무문관은 1979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1993년, 정영 스님은 이곳 계룡산 대자암에다 다시 무문관을 세웠다. 이후 제주도 남국선원, 설악산 백담사 무금선원, 강진 백련사, 통도사 백련암 죽림굴 등 무문관이 줄지어 생겨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대자암 무문관은 '삼매당'과 '지행당,' 두 곳으로 이루어져 있다. 삼매당이라 이름 붙인 것은 아마도 선정 삼매에 들어 생사일여의 활로를 찾으라는 뜻일 게다. 전에 이곳에 머물던 한 재가 수행자에게서 "저 선방 아래는 토굴 식으로 돼 있다"라고 귀띔해 주는 말을 들었다. 이곳에선 현재 10여 명이 용맹정진 중이라고 한다.

작가 송기원도 한때 이곳에서 1년 동안을 수행했다고 하는데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내가 한 해 동안 머물렀던 토굴은 대자암에서도 10분 남짓 삼불봉 쪽 기슭을 향해 올라간 곳에 있다. 토굴은 땅을 파서 굴을 만들어 그 굴속에 거처를 마련한 이름 그대로 토굴인데, 허리를 숙인 채 세 개의 철문을 지나면 굴 깊은 곳에 한 평 남짓한 방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듯 굴속에 깊은 곳에 마련된 방답게 한번 그 방에만 들면, 바깥세상의 한 줄기 빛은 물론 한 가닥 소리마저도 완전히 차단되어 온전히 나 자신만 남게 되는 것이다. - <내 마음에 남은 절>(도서출판 산처럼) 86쪽 

2005년에는 이곳에서 무문관 수행을 하던 삼성(1941-2005)스님이  49일 단식 중 한 송이 꽃을 그려놓고 열반하기도 했다. 그의 일대기는 <무문관에서 꽃이 되다>(운주사 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도토리와 대자암이 불이(不二)가 아니더라

염화실(좌)과 시방당(우).
 염화실(좌)과 시방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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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각.
 칠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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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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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암에서 가장 높은 곳이면서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칠성각과 산신각을 향해 걸어간다. 조실 스님이 계시는 염화실 앞을 지나서 삼매당의 뒤쪽으로 난 돌계단을 밟으며 올라간다. 칠성각 좁은 마당에 서자 대자암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삼매당 지붕이 계룡산 봉우리를 이고 봉우리는 또 구름을 이고 있다. 여기선 속과 성의 경계가 없다. 이런 풍경 속에 들어와 서면 누구나 세속의 허물을 벗고 절로 성스러워 지지 않겠는가.

지난 4월 초파일, 이곳에 왔을 적에 서울이 집이라던 재가 수행자와 인절미와 참외를 나눠 먹던 생각이 난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나도 이곳 무문관에 들어 용맹정진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아직도 이곳에 남았을까, 집으로 돌아갔을까. 염화실에서 나와 바랑을 짊어지고 떠나는 스님이 보인다. 해제 철이라 조실 스님에게 떠난다는 인사라도 한 모양이다.

산신각에서 내려와 대자암을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이곳에선 내리는 비마저 수행을 많이 했는지 항상심을 버리지 않는다. 더 거세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으면서 일정한 속도로 내린다. 내려가다 바라보니 삼매당 아래엔 꽤나 너른 텃밭이 있다.  벌건 땅에 고랑만 처져 있을 뿐, 아무 싹도 보이지 않는다. 가을 무나 배추를 심었는데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은 것일 게다. 오솔길에는 여기저기 상수리나무 열매가 떨어져 있다. 문득 정현종의 시 '안부'가 떠오른다.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가
툭 떨어져 굴러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토리나무 안부가 궁금해서. - 정현종 시 '안부' 전문

몇 발자국 걸어오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대자암의 안부가 궁금하다. 마음 속에서 도토리 열매와 대자암이 만나 일여(一如)를 이뤘나 보다.


태그:#대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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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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