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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째 농사를 지으면서 아직껏 시작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

 

들에 나갈 때마다 이만저만한 이유를 대면서 나를 변명하지만 포기하지는 못하고 여태 꿈만 꾸고 있는 것이 있는데 길가와 논밭에 저절로 피었다가 돌보는 이 없이 홀로 져 가는 풀꽃들에 대한 기록이다.

 

수목원이나 식물도감을 뒤지지 않더라도 집 주변과 들판에서 피고 지는 풀꽃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이 수많은 풀꽃들은 끈질긴 생명력도 생명력이지만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모나지 않게 살다가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붙든다.

 

나는 풀꽃들에 대한 기록을 하되 좀 색다르게 하고 싶다. 모든 누리집과 관련 책에서는 꽃이 활짝 피었을 때 모습만 있다. 풀꽃 분류를 하더라도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 등으로 되어 있어서 꽃이 피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떤 꽃을 피워 낼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나는 풀꽃의 일생을 기록하고 싶은 것이다. 꽃이 피는 기간은 잠시일 뿐, 그 꽃이 있기까지 나머지 기간에는 어떤 모습인지 기록한다면 언제 어디서건 사계절 풀꽃을 동시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초록에 물들다>는 내 꿈과 꼭 같지는 않지만 집 주변의 풀꽃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지은이 이수경은 풀꽃 이야기 뿐 아니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주말농장과 농막에 함께 살고 있는 여러 곤충들 이야기도 하고 있는데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는 또 한 송이의 꽃이다.


가령 이렇다.

동자꽃은 탁발하러 마을로 내려간 스님이 눈이 많이 내려 산 속 암자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동자승이 홀로 스님을 기다리다 굶어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어났다는 꽃이다. 동자승처럼 귀엽게 생긴 이 꽃은 항상 산 아래쪽을 향해 핀다고 한다. 동자승이 산 아래쪽 마을을 바라보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듯이…

 

지은이의 해박한 관심분야가 동화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 많이 있는데 벌레 한 마리 꽃 한 송이를 보면서 늘 재미있는 동화와 연결 짓는다.

 

한번은 냉장고를 열었더니 조그만 청개구리가 붙어 있었나보다. 냉장고 안에서 싸늘해진 개구리가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 청개구리인지는 모르지만 풀섶으로 되돌려 주면 다시 와서는 텔레비전을 같이 앉아 보자는 듯 방 벽에 붙어 있기도 하고 목욕탕 수도꼭지에 올라않아 있기도 했다고 한다. 세숫대야 옆에도 숨고 빨래판에 달라붙어 있는 걸 쫒으면 신발 속으로 기어들기도 하였다.

 

지은이는 이 대목에서 공주를 따라다니며 약속을 지키라고 떼를 쓰는 동화 '개구리 왕자'를 소개한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에 빠져들 때 걸려드는 '마술'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진다. '왕자'가 아니라 힘든 밭 갈기를 대신해 주고 무거운 퇴비를 날라주며 헐거워진 낫자루를 새로 깎아 끼워 줄 '머슴 개구리'라도 있었으면 하는 지은이의 넋두리는 글 읽기의 재미를 더해준다.

 

콩 넝쿨을 보면서는 '잭과 콩나무'라는 동화를, 거미를 한 마리 발견하고서는 길쌈 솜씨가 뛰어났지만 지나친 자부심 때문에 평생 실을 짜는 거미가 되어버린 그리스 신화 속 '아라크네'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이다.

 

사실 꽃에 얽힌 전설과 신화는 웬만한 들꽃 책이나 꽃말 책에 나온다. <초록이 물들다>는 식물도감과 곤충도감을 펼쳐 놓고 독자와 함께 뒤적뒤적 하면서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135쪽에 벌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동물 다큐에서나 볼 수 있는 벌새를 발견하고 이수경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벌새를 아쉬워하며 이렇게 말한다.

 

'유명 인사를 마주 대하고도 사인을 받지 못한 것' 같았다고. 열대지방에서 서식하는 벌새가 나타났다는 것이 신비하고 놀라워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그것이 '꼬리박각시'라는 나비도 아니고 나방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과정은 영상만 없을 뿐이지 다큐 한 장면 같기도 하다.

 

물론 이수경은 풀꽃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도시에서 책을 만드는 일을 한다. 시골에 농막을 짓고 주말마다 애인 만나듯 농장에 가서 알뜰하게 농사짓는 사람이다. 농사지으면서 만나게 되는 풀꽃과 작은 동물, 그리고 곤충들을 농사일처럼 들여다보는 것이다.
  
책을 만들던 사람이 직접 쓴 책이라서 그런지 요즘 많이 쏟아지는 귀농생활 글들과 생태적인 생활 글 책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책이다. 농사일에서 만나는 풀꽃과 풀벌레라는 주제가 그렇다. 그래서 책의 원 제목도 <주말농사에서 만난 풀꽃세상 초록에 물들다>이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주섬주섬 농장 일을 정리하고 뜰에 내려 비치는 평온하고 아늑한 햇살을 뒤에 남겨둔 채 서울로 향해야 하는 주말농사꾼 이수경의 심정은 뭉클 가슴을 적시는 초승달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꽃냄새를 실어 나르는 봄바람, 청량한 밤공기가 떠올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순간처럼 된다.


하지만 짐을 싸가지고 시골로 내려오기에 현실적인 고충은 여전하다. 귀농과 전원생활을 꿈꾸면서도 현실에 긴박되어 있는 모든 이들의 심경이 이럴 것이다.

...역시 인형눈알 붙이기 같은 농사일로는 저축하며 살기 힘들 것 같다. 지금은 그럭저럭 지낼 만하겠지만 나이 들어 눈이 침침해지면 교정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관절염이 생기면 작은 텃밭 가꾸는 것도 점점 버거워질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늘그막에 병이라도 얻게 된다면 그 대책이 막연하다. …(중략) … 친구와 자주 만날 수 없는 것도 고민이고...

 

어쨌든 서울에서 태어난 것으로 소개되는 이 젊은 처자가 주말마다 농장으로 달려가 농사를 짓는 열정과 힘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반가울 따름이다.

 

귀농을 하거나 주말농장을 해 볼 사람만이 아니라 잠시 평소 생활에서 벗어나 푸른 들판으로 나들이 하듯 펼쳐 보기에 좋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수경 지음. 북하우스. 2007. 값 9,8800원)


초록에 물들다 - 주말농사에서 만난 풀꽃세상

이수경 지음, 북하우스(2007)


태그:#이수경, #초록에 물들다,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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