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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를 떠나 포로가 되었다는 뉴스에서 2명의 사상자, 생존자 석방까지 이어지는 뉴스가 지속되는 동안 크리스챤인 나는 인터넷 댓글 보기가 두려웠다."탈레반은 즉각 약속을 이행하라", "순교를 원하는 자들이다. 소원을 들어줘라".

 

악담을 넘어선 살기 어린 저주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아프가니스탄 무장세력에게 납치된 봉사단원들과 관련한 글마다 주렁주렁 붙어있는 것들이다. 어디 인터넷뿐인가.

 

친구가 작가로 일하는 한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청취자 전화 의견을 수집하고 있는데 "무모하게 선교를 떠난 사람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90%를 넘었다는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다. 끔직한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에게조차 법적 살상을 삼가는 세상이다. 납치된 이들의 봉사가 선교 때문이건, 공명심에 의한 것이건, 또는 말 그대로 순수한 뜻으로 행한 것이건 그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일까.

 

그럴 리 없다. 물론 아프가니스탄 방문으로 인해 촉발한 책임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생환한 다음 따져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밉고 한심해도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금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다만 '사필귀정'이라는 생각은 든다. 2005년 1월 세계 최대 규모의 감리교회인 금란교회의 담임 김홍도 목사가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창궐한데다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은 이들이 태반인 까닭으로 서남아시아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했다"는 주장을 설교 시간에 늘어놓았다. 억울하게 세상과 등진 망자에게 '지옥행'이라는 종교적 낙인까지 찍어버린 전대미문의 언어폭력이었다. 이를 대중은 기억한다. 아프간 납치 사건에 대한 일부 누리꾼의 '악플'은 말 그대로 들은 대로 돌려주는 것일 수 있다. (악플에 대해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민심 이반'이다. 기독교는 어느새 대중으로부터 고립 되고 있다. 오만과 독선에 대한 질책은 기본이다. '저나 잘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오도록 후안무치한 작태를 연출하는 일부 목회자들 탓에 기독교는 세상 속 쭉정이가 돼 버리고 있다.

 

하긴 횡령, 사기, 간통, 부당한 세습 등 성직자의 활동 반경 안에 존재하기 어려운 범죄 단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누리꾼들은 이 사안 하나만을 놓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이런 목사들이 건재하다는 점이다.

 

어느 교회 어떤 목사라고 굳이 이야기하지 않겠다. 교인 돈을 개인 용도로 쓰다 걸려서 구속되는 치욕적 대망신을 당했지만 교인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의 영어(囹圄)신세를 '좌파 정권의 음모'니 하며 혹세무민식으로 오도해도 신자들은 연신 '아멘', '아멘'한다. 그리고 보란 듯 아들에게 세습을 해도 누구 하나 문제제기 안 한다. 이런 교회상이라면 목사 개인만 지탄 받는 게 아니다. 이런 자에게 날벼락 한 번 안 내리시는 하나님까지 도매금 된다. '안티 기독교도'들의 비판이 기성 교회나 목사가 아닌 하나님에게까지 미치는 현상, 결코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위기의 징조다. 2007년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에서는 안 쓰는 표현으로 '액(厄)'이 낀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종교사학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한 갖은 추태를 나타내 뜻있는 대중들로부터 빈축을 사더니, 소득세 납부를 어떤 방식으로든 기피하기 위해 온갖 논리를 개발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 연민의 정을 샀고, 기독교 기업으로 포장된 회사가 천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거나 외주용역화하는 등 생계를 위협하는 작태를 서슴지 않아 분노를 자아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내려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넘기라 명하시며 가난한 이웃들의 벗으로 살다 간 예수의 형상은 완전히 실종된 것이다. 이러면서 회개 운동을 기점으로 부흥의 시대가 열렸던 1907년으로 돌아가잔다. 이 몰골, 이 정신상태로 1907년으로 돌아가려면 방법은 딱 한가지 뿐이다. 타임머신을 만들어 탑승하는 것이다.

 

위기의 정점은 권력까지 탐하는 욕망에 있다. 한국 사회의 목사 집단들도 보는 눈, 듣는 귀가 있다. 이런 민심으로는 한국교회의 선교 토양이 수년 내에 황폐화될 것이라고 자기들도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탈출구를 모색한다. 바로 기독교인 대통령 시대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한국교회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현재 기독교가 처한 위기의 이유로 '좌파 정권의 농간'을 들먹이고 있다. 교회의 전통적 권익과 선교 역량을 좌파 정권이 마구 훼손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길은 정권을 기독교인, 아니 기독교의 기득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잡는 것이라 보는 것이다.

 

기막히다. 어떻게 현 정권이 ‘좌파 정권’인가. 온 나라를 무한경쟁 시장으로 만들어 빈부의 양극화를 극대화할 게 명약관화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2년 안에 무참하게 도륙할 수 있는 비정규직 ‘보호’(?)법을 도입하고,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 '형님, 형님'하며 형님이 부르면 늦을 새라 완전군장하며 달려가는 정권이 어떻게 ‘좌파’로 보일 수 있냐 이 말이다.

 

친미 친자본가 친시장경제 정권과 좌파는 형식상의 논리로나 내용상의 논리로 전혀 맥이 닿지 않는 별개의 집단이다. 충고하고 싶다. 좌우세력으로 이념적 구분을 하려 한다면, 목사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지 보장해 주지 않는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말이다.

 

서울 강남의 대표적 대형교회인 사랑의교회 오정현 담임목사가 얼마 전에 뉴욕에서 있은 할렐루야 2007 복음화대회에서 한 말이 있다.

 

"기독교 좌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을 대통령 세우면 안 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들이 믿는 예수는 어떤 예수인가. 그래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낫지 않겠나."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단어에 버금가는 코믹 조어 '기독교 좌파'를 들먹이며 오 목사가 지목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대표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고 말한 사람들의 존재가 궁금하다. 찾아봤다. 그러나 눈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수 믿는 특정인을 지칭해 낙선 운동한 세력도 알아봤다. 그러나 도통 실체가 없다. 오 목사만의 '관심법'으로 통시한 것일까.

 

이것은 '장로 대통령론'이다. 아마 오 목사는 소망교회 장로인 이명박 한나라당 예비후보를 '예수 믿는 사람'으로, 그의 인물 됨됨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대통령 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것으로 편리하게 등치시킨 것 같다. 그래서 장로 대통령론을 반대하는 이들 모두를 '기독교 좌파'요, '(우리와 다른) 어떤 예수를 믿는 자들인지 모르는' 신출귀몰한 사람들로 규정했다.

 

장로 대통령론은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면, 이 땅이 기독교적 정의가 넘치는 나라가 된다는 논리이다. 이는 마치 기독교인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속한 조직과 세계가 기독교적 양심에 의해 변화돼 운영된다는 식의 '고지론(高地論)'을 보는 것 같다. 혹여 고지론이 타당하다고 보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권력만으로 한정할 때,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미국 대통령 자리에 오른 감리교인 부시를 보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며 수 만 명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기는커녕, 팔 다리 잘려 널브러진 죽음의 땅을 조장하지 않았나. 고지론의 모순은 부시가 입증한 셈이다.

 

중대한 오류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대통령이 돼야 한다거나 또 무조건 돼서는 안 된다고 볼 사람은 몇 없다. 게다가 예수 믿는 사람이 경우를 막론하고 세속인 보다 월등한 도덕의식과 인류애 그리고 기독교적 양심을 갖췄다고 보는 이들 역시 별로 없다.

 

지금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른 이 후보의 경우는 특히 더 그렇다. 그가 아무리 교회 장로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인지 여부는 가려지지 않았다. 부동산 재산 차명 보유, 위장전입, 주가조작 등 반사회적인 범죄에 연루됐다는 설 등 검증할 여러 의혹들이 태산 같다. 김홍도 목사 같은 사람은 "사생아를 낳은 전력이 있다 하더라도 기꺼이 지지할 뜻"을 내비치고 있다만 그것은 김 목사의 주장일 뿐이다.

 

교회 지도자는 정치적인 사안에 있어 국민의 총의를 추월해서는 안 된다. 교회 지도자라면 예수 믿는 사람의 정치적 야망이 실현되기를 기대하기보다 그 개인의 인격성숙, 신앙성장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장로 대통령 시대,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대통령되는 시대가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교회를 구원할리 없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은 낮아도, 그의 시대에 확산된 '특권과 반칙이 통하지 않는 나라'의 기조는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질리 없다. 이것은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이제 어설픈 반전책을 모색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혁명적 타개책만이 필요한 시점이다.

 

탈출구는 어디인가. 엄청나게 확산된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씻는 길 뿐이다. 그 길은 무엇인가.

 

종교의 이름으로 부여 받은 모든 특권을 반납하는 것이다. 강요된 공공성이 아닌 자발적 공공성으로 종교사학을 가꾸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적 기능을 수행하는 건강 사학의 모델이 되도록 한다. 교회재산의 경우 하나도 남김없이 국세청의 관리를 받도록 한다. 목회자가 자발적으로 소득세 내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교회를 가장 투명한 기구로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잉여재산이 없어야 한다. 교회는 주수입원인 봉헌된 돈, 이른바 '헌금'을 기본적인 운영비와 인건비, 활동비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회에 헌납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교회에서 돈은 분쟁을 배태하는 독소다. 가난한 교회에서 싸움 나는 일은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다 털어서 나눠주자. 교회의 대사회적 신뢰 회복을 위해. 또 교회 안에 평화와 은혜를 위해 말이다.

 

배타적 시선을 버려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한다. 그래서 이 가치는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이것을 포기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럼 무슨 얘기냐. 유일신 사상을 떠나 '싸가지'를 가지라는 것이다.

 

유일신 사상을 빙자해 이웃 종교인에게 무례하게 행하지 말라는 것이다. 신앙은 수많은 신념 가운데 가장 고수에 속한 것이다. 개인의 철저한 결단과 고백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비신자를 전도한다는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안내한다며 설득과 같은 대화의 방식을 포기하고, 남의 신전에 불을 지르고, 이웃종교 성직자의 머리를 흔들며 희롱하고, "사찰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으로 나간다면 과연 온당할까.

 

예수님은 뱀의 지혜로움을 닮으라 했다. 마땅히 기독교인들은 뱀의 표독함을 배워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세속권력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 누가 권력을 차지하든, 심지어 기독교를 탄압하는 전제군주가 나타나는 상황이 발생해도, 그리스도인은 초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늘의 소망을 갖는 세력으로서 바른 본보기를 보이라는 것이다. 지금 정권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세력이라고 규정하는 목사 중에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바른 소리 한 번 제대로 해 본 사람이 몇이나 있었나. 또 그 때 침묵했던 목사들 상당수가 지금은 '믿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음은 또 무슨 까닭인가.

 

교회는 대선에서 총선에서 아니 기초의원선거는 물론 통반장 선거에서조차 손을 떼야 한다. 권력이 교회를 음험한 목적으로 핍박할 때 교회는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권력과 결탁할 때 지탄의 대상이 됐다. 한국교회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난 기독교. 탈레반의 종교적 토양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비난하는데 국한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부시 역시 같은 문제의식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제 기독교는 평화의 가치, 공존의 이념을 새로 정립해 나가야 한다. 선교는 전도지 들고 다니면서 이번 주일 교회 나오라며 이 사람 저 사람 손 끌어 잡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고난 받는 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며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일종이다. 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고도 명명한다.

 

휴가기간을 쪼개 극빈국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전개한 피랍자들의 행위를 놓고 선교냐 아니냐 논란이 있는 모양이다. 광의(廣義)의 개념이긴 하나 이들의 활동도 당연히 선교이다. 그러나 그 선교 행위가 정복주의형 기독교 선교의 전형인양 매도되고 있다. 그 배경은 한 가지.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이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의 모든 선한 행실도 '개독'으로 매도될 상황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대안을 찾아야 한다.

 

해법은 하나다. 교회의 혁신이다. 특권 지향적 무뢰한 집단의 탈을 벗어야 한국교회가 산다. 교회가 마땅히 서야 할 낮은 자리로 돌아가야 한국교회가 산다. 그리고 신자든 비신자이든 모든 이웃에게 고루 사랑을 전파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지금은 생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대목, 한국교회의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시급한 시점이다.


태그:#정광호, #한국교회, #전북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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