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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드라마처럼 단지 티격태격 사랑놀음인가 아니면 결혼이라는 거래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전쟁인가? <칼잡이 오수정>(박혜련 극본, 박형기 연출, SBS)은 정확히 이 두 가지 길 사이의 중간 지점에 존재한다.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저쪽 길에서 다시 이쪽 길로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양쪽 모두를 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달콤한 로맨스와 성공적 결혼을 동시에 꿈꾸는 오수정(엄정화 분)의 야심찬 투지처럼.

 

그러나 나는 이제 막 중반을 넘긴 이 드라마가 결국 '사랑놀음을 빙자한 결혼암투였다'라는 쪽에 배팅하고 싶다. 이 드라마는 영원한 머슴 고만수(오지호 분)와 그 위에 군림하는 여왕 오수정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격돌이자, 두 사람이 사랑과 결혼이라는 권력관계를 둘러싸고 벌이는 치열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결혼이란 권력관계의 전쟁

 

출발은 잘 나가는 퀸카 수정이 대책 없는 거구의 폭탄 만수를 결혼식장에서 차버리고 다른 부잣집 남자와 도망가버린 것에서 시작된다. 수정이 원해서 고시를 치렀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어떤 부정이나 비리도 행할 수 있다는 정직한 대답으로 사시 3차 면접에서 떨어지는 이변을 일으킨 만수가 사실을 고백하는 바람에 결국 수정이 식장을 박차고 나간 것이다. 이것이 만수에 대한 수정의 1차 만행이다.

 

8년 후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히 역전된다. 무참히 버려졌던 만수는 미국에서 세계적인 프로골퍼 '칼 고'가 되어 떼돈을 거머쥐고 모델 같은 몸매로 돌아왔다. 그 옛날 만수를 머슴처럼 거느리다 헌신짝처럼 내던진 수정은 이제 가진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한물 간 노처녀가 되어 있다. 이것이 만수가 수정에게 가한 1차 복수이다. 수정이 자기를 버린 걸 땅을 치며 후회할 만큼 멋진 완벽남이 되어 돌아온 것.

 

이렇게 역전된 상황에서 수정은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도 잊고 만수의 원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뻔뻔하고 천연덕스럽게 다시 완벽남 칼 고에게 작업을 걸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수정의 2차 만행으로, 수정의 안하무인적 뻔뻔함에 만수는 치를 떨게 된다. 그러나 수정이 예전처럼 기세등등하고 콧대 높은 퀸카였다면, 만수의 마음이 그리 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큰 소리치고 잘난 체를 하지만 때론 자존심마저 잃고 비굴해지기까지 하는 수정을 보면서 만수는 다시 그녀에게 말려들기 시작한다.

 

수정의 저자세에 흔들리기 시작한 순진무구한 만수, 그녀의 마음이 진심인지 확인 들어간다. 그녀를 그냥 받아들이자니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가 자신에게 다시 오는 것이 자신의 달라진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는 최소한의 증거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는 반듯하고 지적인 사기꾼 정우탁(강성진 분)을 재벌로 둔갑시키고 자신은 도박빚에 시달리는 속 빈 강정 신세로 꾸며 수정을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정에게서 일말의 진심이라도 찾아보려던 만수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져 내린다. 실수로 우탁과의 데이트 기회를 놓친 수정이 만수의 병실로 찾아와 무릎 꿇고 우탁의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통사정할 때 만수의 작전실패는 만천하에 드러난다. 이것이 만수의 KO완패이자 수정의 3차 만행이며, 수정이 만수를 두 번째 버린 순간이다.

 

이제 드디어 만수의 본격적인 복수극이 시작된다. 열받은 만수는 우탁에게 수정의 마음을 빼앗고 결혼까지 진행한 후 식장에서 여자를 버리고 나오면 수억원대 자신의 집을 주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한다. 게다가 수정 밑에서 일하는 육대순(박다안 분)을 자기 옆에 세워둠으로써 수정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결국 사각관계라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만수가 벌인 복수극이 사각관계라는 게임으로 변질되는 순간, 만수의 복수 실패는 예정된 것이 된다. 트렌디드라마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사각관계라는 장애물넘기가 결국 두 남녀주인공의 사랑의 확인으로 귀결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복수극이 시작되면서 궁지에 몰리는 것은 오히려 만수 쪽이다. 비록 만수는 수정을 향해 복수의 칼을 뽑지만, 그 칼은 고스란히 자신의 발등을 찍는다. 수정은 점점 우탁의 언변과 술수에 넘어가고, 우탁은 점점 만수에 대한 라이벌의식과 수정을 향한 마음을 키우면서 상황을 주도해 나간다. 수정과 우탁의 결혼이 다가올수록, 수정에 대한 만수의 애증의 고통도 커져만 간다.

 

만수의 복수심은 수정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과 뒤엉켜, 자신의 복수가 진정 복수인지 아닌지, 대리인을 내세운 얼굴 없는 키다리아저씨의 원조는 아닌지 헛갈리는 지점으로까지 사태를 몰고 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눈물겹도록 가슴 뭉클한 지고지순한 순정남의 연정이다. 자신을 비참하고 잔인하게 두 번씩이나 버린 여자를 못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모진 운명의 사슬이라니. 어쩌면 만수는 지난 8년 동안 수정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수정의 마음에 꼭 드는 완벽한 남자가 되기 위해 죽을 각오로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이런 만수와 너무나 대조적으로 수정은 드라마 역사상 가장 속물적인 여자주인공이다. 그녀는 남자를 오로지 그가 가진 (경제적) 조건만으로 선택하고, 손바닥 뒤집듯 선택을 번복하는 노골적인 속물이다.

 

'왕속물'인 오수정에게 왜 애정이 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속물 중의 왕속물인 이런 오수정에게 애정이 가는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처량함과 연민을 자아내는 그녀의 노처녀다움일 것이다(이것은 <9회말 2아웃>의 난희(수애 분)가 결코 가질 수 없는 미덕이다). 겉으로는 이쁜 척 잘날 척 콧대를 세우지만 복대로 허리를 졸라매야 하고 진한 화장발로 나이를 감춰야 하는 처지에, 그럼에도 아직도 여전히 자신이 공주라고 생각하는 오만과 착각까지. 여기에 내숭형 속물인 대순이라는 연적은 수정의 솔직함을 돋보이게 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담당한다.

 

게다가 '알고 보니 심청'이더라는 (낡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사실에 약해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겉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왕싸가지 속물이지만, 속으로는 인정 많고 마음 약한 헌신적인 처녀가장이라는 것. 철저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보였던 수정이 알고 보니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자신의 사랑을 희생해가며 가족을 위해 헌신해온 심청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수를 혼란으로 몰고 가는 것은 그가 쳐놓은 사각관계의 덫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그녀의 진심이다. 결혼을 앞둔 수정이 실상 오래 전부터 만수를 사랑했으며, 지금도 만수를 사랑하고 있다고 힘겹게 고백했을 때, 결혼식에서 뛰쳐나올 사람은 우탁이 아니라 수정임이 명확해졌다.

 

그렇게 결정적인 반전이 발생한다. 결혼식에서만 두 번째 뛰쳐나온 수정은 재벌인 우탁 대신 도박빚을 짊어진 만수를 택함으로써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자신의 진심과 사랑을 되찾는다.그리하여 만수는 수정에 대한 복수 대신 수정의 사랑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렇다면 만수와 수정의 전투에서 최종적 승자는 누구일까?

 

속물 수정에게서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위대하고 극적인 변심을 이끌어낸 만수일까? 아니. 이 결혼전쟁의 최종 승자는 당연히 수정이다. 수정은 결과적으로 사기꾼인 우탁 대신 완벽남 만수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놀라운 동물적, 본능적 감각을 드러낸다.

 

이제 막 10회가 끝난 시점에서 내가 기대하는 최종적 반전은 이러한 것이다. 어쩌면 수정은 만수의 모든 작전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녀는 정우탁이 가짜 재벌이며, 만수가 꾸민 연극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대순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수정처럼 영악하고 똑똑한 여자가 가짜 재벌에게 속아 넘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친구 영애가 의심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오수정은 까짓 사랑을 확인해주고 성공적 결혼을 얻는 가장 고단수의 작전을 구사한 셈이 될 것이다. '알고 보니 심청'이나 '속물의 숨겨진 진심'보다는 이쪽이 좀 더 오수정스럽지 않은가. 반전과 역전의 이 독특한 로맨스가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으려면 말이다.


태그:#칼잡이오수정, #오지호, #엄정화, #속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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