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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투왕국의 한복판에는 세투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 서진석

인구 120만명에 영토도 남한의 반 정도에 불과한 에스토니아는 보기보다 상당히 복잡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나라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인도유럽어족과는 거리가 먼, 우리말과 계통상 통하는 '아주 이상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 구성도 비교적 복잡하다.

전체 인구 중 30%를 차지하고 있는 러시아인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에스토니아 영토 안에는 에스토니아인이 아닌, 그렇다고 러시아인들도 아닌 제3의 민족이 살고 있다.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에스토니아 남동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모여살고 있는 세투(Setu, 세투어로는 세토 Seto)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다른 언어 간직한 5000여명 세투인

우리말과 어원상 비슷한 단어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전치사 대신 조사를 사용한다는 특성 때문에 여러 곳에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는 핀우그르어는 전 유럽에서 공식적으로 핀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세 나라에서만 사용된다.

그러나 나라를 이루지 못한 채 발트해 주변 지역과 러시아 내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도 현재 20개에 이른다. 그들 중 대부분에선 문화적 정체성이 보장되지 않는 주변 환경으로 인해 언어 사용자가 급격히 줄고 문화의 원형적인 모습도 사라져 가고 있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다.

세투인도 바로 그런 위기에 처해있는 민족이다. 현재 약 5000여명이 남은 세투인은 에스토니아 남동부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모여살고 있다.

이들은 독일루터교를 주로 믿는 에스토니아인들과 달리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에스토니아 사람들도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무거운 은장식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독특한 민속의상으로 유명하다.

문화적으로는 러시아에 가깝지만 언어적으로는 에스토니아와 흡사하다는 것 때문에 에스토니아에 편입되어 있기는 하지만, 정작 그들은 에스토니아인들과는 다른 세투인으로 불리길 원한다.

그렇지만 정작 에스토니아 본토에서는 거의 사라진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생활풍속이 원형 그대로 내려오고 있어 에스토니아 민속문화의 원형이 살아있는 곳으로 인정받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정부나 유럽연합 차원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주기 위한 여러 가지 지원금과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 경비가 삼엄(!)한 세투왕국의 세관. 그러나 돈을 내고 비자를 사면 누구든 들어갈 수 있다.
ⓒ 서진석
▲ 탈린에 살고 있다는 참가자들. 세투 관련 행사 때마다 참가해 세투인으로서 자긍심을 되새기고 있다고.
ⓒ 서진석
세관까지 설치한 '왕의 땅' 세투

요즘 들어 세투인은 수동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에서 많이 진보한,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자신들의 마을로 끌어들이는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매년 8월에 열리는 '세투왕국의 날'이다.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축제로, 세투 민족을 다스리는 대표자를 뽑는 날이다.

세투인은 세투가 엄연히 '왕이 다스리는 곳'이라며 자신들의 영토를 자신있게 '왕국'이라고 부르고 있다. 매년 민족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이 축제의 명성은 이미 에스토니아 전역에 퍼져 행사 때가 되면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길로 한참 들어선 후 도착한 메레매에(Meremäe)라는 시골마을. 올해는 그곳에서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곳엔 국경(?)이 그어졌고 왕국 입구엔 세관도 만들어졌다.

그 세관을 통과하면 전통의상을 입고 비자를 파는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45크론(한화 약 3500원 정도)을 주고 비자를 구입해 입장하니 에스토니아 전 지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축제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특히 올해는 행사를 기념해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대통령이 방문해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나 자신도 세투의 독특한 복장과 언어를 책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 이렇게 많은 세투인이 모인 곳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그만큼 세투의 문화는 일상생활에서는 보기 어려운, 박물관에서 보호받아야 하는 것으로 전락하기 일보 직전에 놓여있다.

차포스카드의 독특한 매력

▲ 세투왕국의 날 행사에 참가한 토마스 일베스 에스토니아 대통령.
ⓒ 서진석
에스토니아어로는 에흐테드(ehted), 세투 언어로는 차포스카드(Tsaposkad)로 불리는 가슴에 달린 은장식은 그들의 복장에 독특한 매력을 불어넣어준다.

순은으로 만들어진 은장식은 지름이 작게는 20~36㎝까지며 무게만도 4㎏나 된단다. 게다가 은장식에는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은화 동전들이 빼곡히 달려있다.

그러한 전통이 아주 역사가 오래된 것은 아니다. 에스토니아가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18세기 무렵 형성된 것으로, 특별한 의미나 상징은 없이 단순히 사회적 지위나 부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기 시작한 장식품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장식들은 딸들을 시집보낼 때 남편집 식구들에게 지참금 형식으로 보내야했을 정도로 상당히 값진 물건들이었다. 현재는 그 은장식들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곳이 전무해서 희귀성 때문에 값이 점점 더 오르고 있는 중이란다. 그래서 웬만한 은장식은 시가가 2만 크론(약 150만원)까지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게 생활습관 속에 러시아의 요소가 많이 숨쉬고 있는 세투인들은 에스토니아와 러시아의 국경지대에서 수백년 동안 살고 있다.

근대 국가의 틀이 잡히면서 에스토니아는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었지만, 에스토니아인들에 비해 수가 적은 세투인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보다는 언어적으로 비슷한 에스토니아에 남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인들의 눈에는 그들이 러시아인들을 더 닮은 것으로 비쳤고, 러시아인들이 보기에 그들은 에스토니아인들의 모습을 더 많이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국경지대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형성된 세투족은 대략 11개 정도의 마을에 모여 살았고, 페체리(Petseri)라는 도시가 세투인들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로 분단된 세투

에스토니아가 소련에 편입된 직후 스탈린은 에스토니아 공화국의 국경을 페체리 서쪽으로 옮겨놓았고, 1991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하자 그에 맞추어 러시아와 에스토니아 사이의 국경선이 그어졌다.

그 결과 4개의 마을만 에스토니아 지역에 남게 되고, 페체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은 러시아로 편입되고 말았다. 러시아 지역에 남은 세투족 마을에선 대대적인 러시아화가 진행되어, 러시아에서는 자신을 세투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겨우 130명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세투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많은 이들이 에스토니아로 이주해왔지만, 독립 이후 그어진 국경선은 마치 우리나라처럼 그 민족을 양분했다. 물론 남북한처럼 소통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편에 있는 가족들의 묘지를 찾아간다거나 친척을 방문할 때에는 꼭 러시아 비자를 받아야하는 상황이다.

모든 나라가 통합되고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현 시점에서 가족의 무덤조차 맘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현재 페체리 지역은 러시아 영토로 들어가 있지만, 국경에 관한 양국 정부의 협의가 아직 정식으로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국경분쟁의 불씨도 여전히 남아있다.

IT강국 에스토니아, 그러나 '왕의 대행자' 선출 방법은 줄서기

▲ 세투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페코의 형상. 저 형상의 주인공은 국경 너머 러시아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 서진석
세투왕국의 날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세투왕국의 대표자 선출이다. 이 행사는 세투왕국의 날과 동시에 시작된 것이므로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행사는 아니며 선출된 대표자 역시 아무런 특권을 누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아주 엄중한 의무가 있다.

세투왕국의 날에는 세투의 왕이 선출되는 것이 아니다. 세투 사람들은 그들의 왕이 페체리 수도원 지하에 영원히 잠들어있다고 말한다.

세투를 다스리는 왕은 '페코(Peko)'라고 하는 신이다. 그 신은 이번 투표를 통해 당선되는 대표자에게 여러 가지 충고와 명령을 하게 되며 대표자는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세투왕국의 날에 선출되는 사람은 왕이 아니라 '왕의 대행자'로 불린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왕의 대행자엔 세투에서 태어난 사람이면 누구든 지원할 수 있다.

공식 선거가 시작되기 전, 각 지원자들은 무대 위에 올라 자신이 세투 왕의 대행자가 되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등 세투인으로서 지닌 기량을 뽐내면서 선거유세를 한다. 그렇게 선거유세가 끝나면 정식선거가 시작된다.

IT강국임을 자랑하는 에스토니아지만, 왕의 대행자 선거에서는 전자투표는커녕 종이투표 방식도 활용되지 않는다. 후보자들은 한 명씩 나무기둥 위에 올라서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그 뒤에 길게 늘어서면 된다. 그 뒤에 길게 늘어선 지지자들이 제일 많은 사람이 왕의 대행자로 선정된다.

▲ 후보자들의 선거유세(?)를 경청하고 있는 세투 국민(!)들.
ⓒ 서진석
올해 왕의 대행자 자리에 나온 후보는 모두 세 명. 그 중 두 명이 여성후보였다. 타르투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후보 메를레씨는 '노래하는 혁명'이라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독립을 이뤄낸 에스토니아의 명성에 걸맞게 자기도 노래를 통해 분단된 세투 민족을 화합시키겠다는 꿈을 품고 출마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분단된 한국과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다는 메를레 후보자는 "정치적 특권은 아무것도 없지만 왕의 대행자로 선출된다면 세투 민족의 화합을 위해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올해 왕의 대행자로는 세투 문화원의 문화홍보관으로 일하고 있는 남성후보 흐른 아레씨가 당선되었다.

왕의 대행자에겐 특별한 임기가 없다. 그 다음해에도 그만한 지지를 받으면 몇 년이고 왕의 대행자 일을 맡을 수 있다. 올해까지는 에바르 리짜르씨가 4년째 그 일을 맡아왔다. 그리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여성이 왕의 대행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 올해 선출된 왕의 대행자 역시 2000년에 한 번 당선되어 왕의 대행자 직책을 역임했다.

사라져가는 언어·문화 수호에 전력 다하는 세투인들

세투인들이 자신의 문화와 언어를 홍보하기 위해 내놓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2005년과 2006년에는 세투 여인의 삶을 다룬 록오페라 '타르카'를 공연해 큰 성공을 거뒀으며, 세투어 교육과 세투어 사전 편찬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자칫하다간 '죽은 언어'로 전락할 수 있는 세투어와 문화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이 내게 자주 이야기하는 농담 중 하나는, 에스토니아와 한국은 중간에 나라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스토니아와 한국 사이에는 러시아라는 나라밖에 없으므로 만약 러시아가 없었다면 국경이 맞붙은 이웃이 되지 않았겠느냐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농담이다.

그러나 그들의 언어와 문화적 양상을 보면 그러한 것들이 단지 웃자고 말하는, 뜻 없는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과 비슷한 정서와 한국어와 닮은 단어를 사용하는 에스토니아 민족과 세투족이 예전에 한국인과 정말 한곳에 살았던 이웃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저를 찍어주실 분들은 줄을 서세요!'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 뒤에 모여드는 사람들. 세투 왕의 대행자는 세투인만이 될 수 있지만 선거에는 아무나 참가할 수 있다.
ⓒ 서진석
▲ 왕의 대행자 직책을 다시 맡게 된 흐른 아레씨.
ⓒ 서진석

태그:#세투왕국, #에스토니아, #핀우그르어,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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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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