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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부시 미 대통령. 북미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프로세스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보수진영의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까지 부시 행정부의 의도에 대한 경계심은 진보진영의 몫이었다. 그러나 올해 들어서 그 몫은 보수진영에 넘어간 듯 하다. 진보진영이 갖고 있던 경계심의 핵심은 부시 행정부가 겉으로는 '한반도 비핵화'를 앞세우면서 속으로는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압적인 수단으로 북한의 정권교체를 추구하는 것은 북한의 핵실험이 보여주듯 한반도에서는 재앙이라는 우려와 함께.

그러나 올해 들어 부시 행정부가 줄곧 거부했던 북한과의 양자회담에 적극 나서고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하기 위한 인센티브를 제시하면서 이러한 경계심은 많이 수그러들었다. 특히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해결이 여의치 않자, 연방은행까지 동원해 이 문제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고, 부시의 변화가 그저 제스처가 아니라는 높은 수준의 확신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설마 했던 부시의 변신이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다다르고 북한이 이에 호응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프로세스가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이번에는 보수진영의 경계심이 커지고 있다. 경계심의 핵심에는 부시 행정부가 '핵을 가진 김정일 정권과 악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즉, 부시 행정부가 핵확산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김정일 정권으로부터 받고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 북핵 6자회담이 지난 2월 13일 6개국의 합의로 타결된 가운데, 이날 오후 중국 베이징의 댜오위타이에서 열린 폐막 회의에 앞서 참가국 수석대표들이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북미관계 속도조절론?

이러한 인식의 저변에는 미국이 북한의 핵보유 자체보다는 핵확산을 더 우려하고 있고, 1년 6개월밖에 임기가 남지 않은 부시 대통령이 '업적 조급증'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 자리잡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북미간의 '밀실협상' 가능성까지 제기하면서 자칫 한국이 북미간 '밀약'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비핵화보다 앞서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남북관계에 대해 단골메뉴처럼 등장했던 '속도조절론'이 북미관계로 변형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시가 핵을 가진 김정일과 악수할 것인가? 만약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대규모의 대북지원에 나서며 북미수교까지 한다면, 이는 한국으로서는 난감한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미국 국내 정치와 동북아 질서의 역학관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우선 부시 행정부가 최근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관계 정상화에 비교적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에게 있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수교는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할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기실 평화체제와 북미수교는 북한이 핵포기의 조건으로 내세운 핵심적인 요구 사항이었다. 부시가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하기 위해 먼저 꺼내든 카드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인권, 미사일, 생화학무기, 재래식 군사력 등 다른 문제에서도 진전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었다. 이러한 강경 입장은 북한의 의구심을 증폭시키면서 핵 사태의 악화를 가져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선 핵포기' 노선이 한계에 부딪치고 이라크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부시 행정부도 실용주의 노선으로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고받기식의 '동시 행동'에 기초한 대북정책으로의 전환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를 위해서는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수교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반도 비핵화는 부시 행정부에게 있어서 평화체제 및 북미수교보다 상위의 목표에 해당되고, 이는 북한의 핵포기가 없는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수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예전에는 북한의 핵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이러한 입장이 비핵화라는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병행해서 동시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 지난 6월 22일 북핵 6자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방북 일정을 마치고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부시가 핵을 가진 김정일과 악수할 수 '없는' 까닭

미국 국내적으로 볼 때에도 부시가 핵을 가진 김정일과 악수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관심도는 평화체제 구축이나 북미수교보다 북핵 문제가 훨씬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시가 핵을 가진 김정일과 악수하려고 한다면, 네오콘뿐만 아니라 온건파까지도 강력히 반발할 것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제네바 합의보다 확실한 문제 해결을 추구해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핵포기없는 북미수교는 도끼로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업적(legacy)에 목말라하는 부시에게 업적이 아니라 오점으로 남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동북아 국제관계의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미국이 북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화체제 구축과 북미수교에 나선다면,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국인 한국, 특히 일본은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해 근본적인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이는 동맹관계의 악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독자적인 핵무장까지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지금 한국이 주목해야 할 일은 '부시가 핵을 가진 김정일과 악수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우려가 아니다. '남북관계 속도조절론'과 '북핵-남북관계 연계론'에 막혀 남북관계가 뒷전에 밀리고 대선 정국에 휩싸여 있는 사이에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이 북미 및 미중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중 양국은 2005년 8월부터 고위급 대화를 시작했고, 이 대화의 핵심적인 의제는 한반도의 미래이다. 북미 양국도 올해 1월 베를린 양자 접촉을 시작으로 활발한 양자회담을 가지면서 비핵화뿐만 아니라 평화체제, 북미수교 등 근본문제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한국은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실질적인 협상에서는 배제되고 경제적 부담은 뒤집어썼던 제네바 합의 때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분단이후 가장 근본적인 변화의 시기에 한국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점증주의적 접근 방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뭔가 과감한 돌파구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부분적인 해답은 7년이 넘도록 열리 못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에 있다. 정상회담이 열리면, 구체적인 성과의 여부와 관계없이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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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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