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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쫄깃쫄깃 맛있습니다
ⓒ 김 관 숙
요즘 부쩍 머리가 하얘진 남편이 쫄깃한 쑥개떡이 먹고 싶다고 해서 지난 봄에 우리 동네 잔디밭에서 뜯어 삶아서 냉동실에 둔 쑥 한뭉치를 꺼내 해동을 시켰습니다. 쌀가루 역시 봄에 고추장을 담고 남은 게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에 어머니가 하던 방법대로 쑥을 도마에 놓고 칼로 서너 번 툭툭 치듯이 썰어서 쌀가루에 막 버무려 반죽을 합니다. 그래야 씹히는 맛도 있고 쫄깃 쫄깃하면서 제 맛이 납니다. 간은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소금도 설탕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쑥을 많이 넣었으니까 쑥 맛과 향기가 절묘하게 간을 대신하고 나올 것입니다.

반죽이 차츰 연두빛으로 변해 갑니다. 흰 도화지 같은 반죽이 연두빛으로 변해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쫄깃거리라고 한참을 치대고 있는데 이웃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감자 반 상자만 사세요. 친구가 팔아 달라는데 한 상자가 너무 많아서요."
"먹을 사람이 있어야지. 아들애도 지금 외국에 있다구."

전화를 끊고 생각해 보니 나도 참 많이 야박해졌습니다. 남편과 단출하게 지내고 있어도 감자 반 상자 정도는 상하기 전에 모두 먹어 치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림도 해 먹고, 갈아서 부추 넣고 부침도 해서 먹습니다. 푸짐하게 쩌서 주보 접는 날 성당에 가지고 가서 어르신들과 같이 주보를 다 접고 난 뒤에 간식으로 먹어도 좋을 것입니다.

남편이 슬슬 방에서 나오면서 물었습니다.

"무슨 말야?"
"감자 사라고 해서."
"사지 그랬어. 쪄서 냉장고에 두고 점심 때마다 데워 먹으면 좋잖아. 갈아서 부침도 해먹고"
"쑥개떡은 어쩌구? 이래뵈두 열 조각은 나올텐데."

▲ 봄부터 냉동실을 차지하고 있던 쌀가루와 쑥입니다
ⓒ 김 관 숙
나는 연두 빛 쑥반죽이 든 양푼을 기울여 보입니다. 갑자기 열이 납니다. 어제는 양파김치가 먹고 싶다고 해서 양파김치를 담갔고 오늘은 쑥개떡을 만듭니다. 쑥개떡도 그렇지만 감자를 갈아서 부침을 해 먹는 것도 얼마나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지 모릅니다.

"이것 저것 먹음 좋지 뭘 그래."
"나도 이것 저것 먹음 좋다구. 근데 하기가 싫어."

오늘은 유난히 더워서인지 정말 이것 저것 만들기가 싫어졌습니다. 음식을 잘 만드는 친구의 남편이 생각났습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집안 일을 가리지 않고 같이 합니다. TV에도 그런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얼마나 보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그 친구 부부는 늘그막이 되면서부터 청소와 주방 일을 가리지 않고 사이좋게 같이 합니다. 집안 청소는 기본이고 나란히 장을 봐서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끌고 옵니다. 요즘 들어서는 남편이 거의 주방장이라고 합니다. 부침이나 청국장 찌개 나물무침까지 깔끔하게 만들어 식탁에 올린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퇴직을 하고 백수가 되면서부터 그렇게 달라졌습니다.

그런 게 늘그막에 애정 표현이 아니냐고 얼마나 행복하냐고 농담삼아 말했더니 친구는 머리를 저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소일거리를 찾아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음식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그렇게 쉽게 집안 일을 소일 거리로 만들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 나이에 종일 무료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 물론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고, 한강 둔치에 나가 걷기 운동도 하고, 친구들 모임에 나가기도 하는데 그런 시간들은 즐거운 소일거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쑥반죽이 점점 연둣빛으로 변해 갔습니다.
ⓒ 김 관 숙
퇴직을 한 남편들은 거의가 조용합니다. 퇴직을 한 지 십 년이 지나면 더 조용히 지낸다고 합니다. 친구의 남편은 퇴직한 지가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퇴직 전보다 더 목소리가 크고 더 당당해졌습니다. 오히려 우스갯소리 잘하는 친구가 조용해졌습니다. 돈이 안 되는 소일거리도 사는 즐거움을 주고 체통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남편에게는 소일거리가 없습니다. 집안에 화분을 가꾸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운동은 많이 하는 편입니다. 새벽 수영, 걷기운동, 게이트볼 등을 합니다. 그러나 남편이 하는 운동은 건강을 지키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지 친구의 말대로 즐거운 소일거리에 들지 못합니다. 그래선지 남편은 퇴직 전보다 사뭇 조용해졌습니다. 목소리를 크게 낼 적보다 조용할 적이 더 많은 것입니다.

"쑥개떡은 통밀가루래야 제격이라고."

남편이 반죽 치대기를 끝내고 난 내 눈치를 보다가 툭 한마디를 합니다. 흑백 영화같은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또 하려고 운을 떼는 것입니다.

나는 못들은 체하면서 찜통에 물을 잡고 가스불을 켰습니다. 그런 뒤 찜통용 베보자기를 꺼내 수돗물에 흔들어 짜서는 깔고 둥글 넙적하게 빚은 반죽을 놓습니다.

참 눈치도 없습니다. 찜통 날씨라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어도 내 등에서는 땀이 흘러 내립니다. 하긴 연둣빛 반죽이 곱다거나 반죽을 치대느라 힘들었을 거라는 등의 감성어린 말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때는 내가 조용해져야 합니다.

남편은 어릴 때 쑥개떡를 자주 먹었다고 합니다. 키가 유난히 작은 할머니가 종일 통밀을 맷돌에 갈아내어 쑥 반죽을 해서 젖은 베 보자기로 싸서 두었다가 저녁이면 뜸이 들어가는 밥 위에다 쪄내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큰 가마솥 뚜껑을 열면 뽀얀 김발 속으로 쟁반만한 꺼먼 쑥개떡이 얼굴을 내밉니다. 늘보리와 검은 콩이 섞인 밥 냄새, 쑥개떡 냄새가 훅 하고 달려나옵니다.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붙어 섰던 어린 손자는 그만 눈이 어지러워졌습니다.

할머니는 나무주걱으로 쑥개떡을 떠서 납작한 채반에 담아들고 돌아섭니다. 침을 꼴각거리던 손자도 돌아섭니다. 그제야 하얀 행주치마를 두른 며느리가 나무 주걱으로 놋주발마다 밥을 수북수북 퍼 담기를 시작합니다.

소금 간만 살짝 해서 통밀 맛과 쑥 향기가 그대로 살았고 씹으면 씹을수록 단 맛이 나던 그 쑥개떡은 밤참입니다. 달이 떠오르고 푸른 별들이 돋아나기 시작하면 봉숭아 채송화가 한창이고 밤벌레 우는 소리가 요란한 마당은 부산스러워집니다. 할머니의 성화에 온 가족이 평상으로 모여드는 것입니다.

마루 기둥에는 알전구가 내걸리고 어중간하게 마른 쑥더미에서는 뭉글 뭉글 푸른 연기가 피어 오릅니다. 앵앵거리던 모기소리가 뜸해져간 너른 평상에는 먹을 것이 푸짐합니다. 삶은 옥수수와 찐 감자, 쑥개떡, 수박 등이 쟁반에 가득 가득 합니다.

쑥을 뜯어다가 삶고 통밀을 맷돌에 갈아 쑥개떡을 만드는 일은 유일한 할머니의 소일 거리였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맷돌은 광 한 구석에 박혀지다시피 했고 작은 밀밭은 작물이 바뀌어졌습니다. 대신 마루 한 구석에는 장에서 사온 하얀 밀가루가 들어 있는 누런 종이 푸대가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물론 여름 밤에 평상의 향연도 사라졌습니다.

▲ 양파 김치는 눈결에 버무려야 사각사각 맛있습니다.
ⓒ 김 관 숙
남편이 간직하고 있는 그 어릴 적 추억은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그러고 보니 쑥개떡도, 찐 감자도 남편이 어릴 적에 푸른 별들을 머리에 이고 평상에서 먹던 음식입니다.

추억이 무엇인지, 내 추억도 아닌데 나는 마음이 약해졌습니다. 음식을 만들기는커녕 파 몇 뿌리조차 다듬어 주지 않으면서, 먹고 싶은 것만 찾는 남편이, 친구의 남편과 비교가 되면서 순간적으로 싫어졌지만 그래도 감자 반 상자를 들여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자 반 상자를 들여 놓지 않으면, 남편이 지금보다 더 조용해지는 날이 많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모습이 더 싫어질 것만 같은 것입니다.

한 김 나간 쑥개떡을 썰어서 접시에 담고 마춤하게 잘 익은 오이지 하나를 꺼내어 썰었습니다. 남편이 어릴 적에 먹던 쑥개떡처럼 참기름은 바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먹음직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식탁에 올리고 보니 훌륭한 점심 식사입니다. 한두 개만 먹어도 든든할 것 같습니다.

남편은 시원한 오이지 국물을 떠먹으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서너 개를 먹습니다. 그 기세로 보아 남편이 지금보다 더 조용해지는 날은 없을 듯 싶습니다.

남편이 모처럼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맛있는데. 거, 아이들 생각나네"

쫄깃 쫄깃, 정말 맛있습니다. 쑥 향기도 살았습니다. 맷돌에서 흘러나온 통밀가루로 만든 쑥개떡이 이보다 더 맛있었을까.

나도 자식들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쑥개떡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딸애도 아들애도 먹어보라고 하면 마지 못해서 아주 조금 떼어서 입에 넣고는 바람처럼 달아나 버립니다.

그런데도 간절하게 자식들 생각이 나는 것은, 쑥개떡이 별 거 아니지만, 꼭 먹이고 싶고 보이고 싶은, 내 손으로 정성껏 만든 토속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태그:#쑥개떡, #감자, #소일거리,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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