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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깥에서 본 펜시옹 아르체로스의 전경. 가운데에는 중정(파티오)가 있고, 중정을 둘러친 회랑을 따라 방이 나 있는 전형적인 안달루시아 지방 민속가옥입니다.
ⓒ 이은비
'오늘(2월 15일)은 어디서 자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며 터벅터벅 낯선 거리를 걷고 있던 때였습니다.

"숙소를 찾고 계시오? 그렇다면 내가 싸고 좋은 숙소로 안내해줄 수 있소."

웬 아저씨가 말을 걸어옵니다. 스페니쉬 억양이 강하게 섞인 영어입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찰나, 제 귀에 강력한 단어가 꽂힙니다. "15유로."

'15유로!'

잠시 생각해본 저는 이 이상 싼 곳을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 삐끼 아저씨를 따라가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산타크루즈 지구 안쪽에는 백성모마리아 성당(Iglesia de Santa Maria la Blanca)이 있는데, 삐끼 아저씨는 바로 그 성당 옆 골목으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저렴한 스페인식 민박집이 밀집해 있는 골목이었습니다. 삐끼 아저씨는 그 중 '펜시옹 아르체로스(Pension Archeros)'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제일 첫 번째 집 문을 열고 들어가더니 주인을 소리쳐 부릅니다.

펜시옹은 안달루시아의 전통가옥 구조로 돼 있습니다. 널찍한 파티오에는 테이블과 나무의자가 놓여있고, 방금 전까지도 누군가가 앉아있었던 듯 비벼 끈 꽁초가 담긴 재떨이와 오늘 신문이 펼쳐져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친근한 분위기입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허둥지둥 2층에서 내려오고, 삐끼 아저씨는 문제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호들갑스럽게 "아, 당신은 틀림없이 이 곳이 마음에 들 겁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주인장이 달려가서 문을 열어준 곳은 현관 바로 옆에 위치한 1층의 커다란 메인 방. 아마도 가족용 방인 듯, 침대가 3개나 있었습니다. 이 커다란 방을 혼자 써도 된다고?

저는 조심스럽게 방을 살펴본 뒤, 나무문이 오래돼 문짝이 내려앉는 바람에 문이 잘 닫히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흠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가 손을 크게 내저으며 괜찮다고,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더니 "5분만 저기 앉아계시지요"라며 나를 끌고 마당 의자에 앉히더군요.

주인아저씨는 달려가 창고에서 대패를 꺼내옵니다. 그러고는 즉석에서 대패로 문 가장자리를 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의자에 앉아 이 난감한 상황을 바라봅니다. 주인아저씨, 대패로 밀면서 저를 쳐다보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씨익 웃습니다. '아아,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미안해서라도 다른 집으로 못 가잖아요.' 이 소박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아, 이 곳에서 묵어야겠다'라고 마음을 굳히고 있을 때였습니다.

엄청난 느끼함으로 무장한 '다비드'

▲ 날이 저물고 손님이 없었는지 펜시옹 주인은 널찍한 방을 저렴한 가격에 내놓았습니다. 카메라에 다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넓고 욕조까지 딸린 방이 1박에 15유로.
ⓒ 이은비
돌연 삐끼 아저씨가 제 옆 의자를 끌어당겨 앉더니,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립니다. 그 표정을 보니 마치 '우리, 시간도 남는데 이야기나 나눠볼까'라는 듯합니다. 안달루시아 남자들의 표정에는 웅변적인 호소력이 있습니다. 코가 우뚝하고 쌍꺼풀이 두껍게 져서, 음영이 또렷한 얼굴에 큰 눈으로 뭔가를 호소하면 그 느낌이 팍팍 전해집니다.

이 아저씨,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메 야모 다비드."

자기 이름이 다비드랍니다. 그러더니 단숨에 "여기서 자기로 결정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오, 난 당신 같은 아름다운 아가씨가 이 곳에 묵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오"라고 느끼한 말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엄마야, 사람 살려요!' 엄청난 느끼함과 진작부터 느껴지던 수상쩍음에 벌떡 일어나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전설적인 바람둥이 '돈 후안'이 스페인 세비야 출신이라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아, 불세출의 작업남을 배출한 지역의 동향사람이라서 이렇게 느끼한 건가'라고 순식간에 납득해버립니다.

찬바람이 휑하니 부는 얼굴로 대꾸도 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저씨는 또다시 말을 겁니다.

"플라멩코 공연은 볼 생각 없소? 세비야에 왔으면 플라멩코를 봐야지요."
"전 보고 싶은 가게가 있어요. 로스 가요스(Los Gallos)라는 가게죠."

그러자 다비드씨는 그곳의 표를 숙소에서 바로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밤거리가 위험하고 복잡하니 자신이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자청합니다. 저는 '당신이 더 위험해보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산타크루즈 거리의 복잡함을 실제로 체험하고 난 뒤였기 때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밤 10시 30분에 시작하는 공연을 보러가기 위해 서둘러 숙소를 나서니, 다비드씨가 능글능글하고 여유롭게 말합니다. "뭐가 그리 바쁘지? 로스 가요스는 여기서 걸어서 3분 만에 갈 수 있어요." 그러더니 저를 끌고 백성모마리아 성당 주변에서 영업하고 있는 가게들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이리 와서 같이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가도 충분해요."

친해지면 진심으로 친구가 되는 세비야노들

▲ 세비야 로스가요스 타블라오에서 볼 수 있는 플라멩코. 세비야는 플라멩코가 공연으로 올려진 최초의 도시입니다.
ⓒ 이은비
다비드씨는 길거리에서 커피 한 잔을 사서 홀짝홀짝 마시며 제게 말합니다.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당신은 뭘 하는 사람이지요?"

저는 신문을 가리켰습니다.

"저널리스트."

그러자 다비드씨가 인상적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멋지군요. 나는 이 지방에서 숙박업을 해요. 내가 운영하는 펜시옹이 크루세스 광장에 있지. 그리고 토박이라, 이곳 사람들 모두와 친구랍니다"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가 백성모마리아 거리를 지나가자, 성당 주변에서 영업하는 레스토랑의 가게 직원들이며 주인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던지고 아는 척을 해옵니다. 과연, 이 지방 토박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가 봅니다.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는 듯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는 다비드씨와 함께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가게 주인들이 저를 끌고 들어가 뭔가를 먹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일일이 거절하며 광장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밤10시 15분. 왠지 슬슬 부아가 치밉니다. 저는 어서 플라멩코를 보러 가고 싶은데 이 아저씨가 온 동네를 끌고 다니며 이곳저곳에 인사시키고, 자기 용무는 용무대로 다 보며 가고 있으니까요. 제가 "아는 사람이 많으시군요"라고 쌀쌀맞게 말하니 다비드씨가 웃습니다.

"나는 당신의 아미고(Amigo, 친구)이니 나를 믿어도 좋아요. 우리 안달루시아 사람들은 일단 친해지면 가슴을 모두 열지요. 그리고 친구(아미고)가 됩니다. 일단 한번 친구가 되면, 그때부터는 마치 가족이나 오래된 사이처럼 모든 걸 아낌없이 줍니다."

그러더니 광장을 두 개 가로 지르면 로스 가요스가 나올 거라고 저를 안심시킵니다. 과연 다비드씨를 따라가니 자그마하고 아담한 광장 하나가 나옵니다. 레피나도레스 광장(Plaza de los Refinadores)이었습니다.

혼자 흥겨워 춤추더니 노래까지

▲ 로스가요스 타블라오의 프리마돈나. 관록이 넘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관객에게까지 두엔데(의지할 곳 없는 절망적 감정)의 감동을 전달합니다.
ⓒ 이은비
19세기 초 호세 소리야 이 모랄이 쓴 <돈 후안 테노리오>를 바탕으로 세워진 돈 후안 동상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는데, 나뭇가지에서 무언가를 딴 다비드씨가 다가와 손바닥을 펼쳐 보라고 합니다. 그러더니 손바닥 위에 작은 하얀 꽃을 한 무더기 올려놓았습니다.

"재스민 꽃이오."

여성을 향한 끝없는 찬사와 에스코트, 거기에 꽃 선물이라니! 마치 17세기 기사를 보는 것 같아 그 전형성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려는 찰나, 돌연 다비드씨가 플라멩코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는 "플라멩코에 대해선 잘 아시오? 우리 세비야노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플라멩코의 발놀림을 배우지!"라며 자신의 발로 박자를 맞춰 보였습니다. 혼자 흥에 겨워 춤을 추더니 갑자기 제가 가장 걱정하던 말을 꺼내고야 말았습니다.

"좋아! 내가 오늘밤 당신에게 진짜 세비야의 노래를 들려드리리다. 이건 세비야 지방의 전통 민요인데, 당신도 무척 마음에 들 거요."

저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호소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비드씨는 골목이 쩌렁쩌렁 울리게 목청껏 노래를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제게로 두 손을 한껏 치켜 올리고, 발로는 박자를 밟으며 바닥을 구릅니다. 반대쪽에서 산타크루즈 지구를 빠져다가던 노부부 2명이 우리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옆으로 물러섭니다.

처음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창피했는데, 마음을 이내 고쳐먹었습니다.

아니, 제가 대체 여기 아니면 지구상의 그 어디에서 나를 위해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며 쫓아오는 남자를 꽁무니에 달고서 거리를 활보해 보겠어요? 저는 정신을 수습하고 애써 다비드씨를 외면하면서 노부부를 지나쳐갔습니다.

부인할 수 없게도, 다비드씨의 춤 솜씨와 노래 자체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세비야노들은 노래도 원래부터 잘하는 것일까요. 노래는 골목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더니, 이윽고 두 번째 광장인 산타크루즈 광장(Plaza Sta.cruz)을 목전에 두고 끝났습니다.

제가 박수를 쳐주니 다비드씨,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로스 가요스로 뛰어 들어가는군요.

저렴한 가격에 최고의 공연 볼 수 있는 로스가요스

▲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는 발을 구르는 사빠떼아또나 손뼉 소리, 내지르는 칸테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하기 때문에 날카롭고 빠르며 정확한 기량으로 연주를 해야 합니다. 뛰어난 연주솜씨를 보여주며 독주무대도 이끌었던 로스가요스의 기타리스트.
ⓒ 이은비
로스 가요스는 번역하자면 수탉. 수탉 타블라오인 셈입니다. 이곳에서 밤마다 열리는 춤공연은, 매번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매료시키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지요. 고백하자면 이날 공연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플라멩코'하면 예쁜 여자가 빨간 옷 입고 입에는 장미를 물고 춤추는, 판에 박힌 인상만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된 뒤, 저는 그간 제가 알고 있었던 플라멩코의 본질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집시들의 은밀한 문화였던 플라멩코를 레스토랑이나 바르에서 무대예술의 일종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곳이 바로 세비야였고, 오늘날의 플라멩코로 발전하고 확립된 곳도 세비야였기 때문에 이 곳에서 플라멩코를 보자 원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스가요스는 1966년에 생긴 타블라오로, 1842년 문을 연 엘 아레날(El Arenal)과 더불어 세비야에서 가장 유명한 타블라오 중 하나입니다. 매일 저녁 8~10시, 밤 10시 30분~12시 30분 두 타임 공연이 있는데, 27유로라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좋습니다.

4명의 여성댄서와 두 명의 남성댄서가 추는 격렬한 플라멩코에는, 대도시의 잘 다듬어진 플라멩코에는 없는 날것의 생생함이 살아 있습니다. 특히 남성댄서가 추는 격렬한 사빠떼아도(Zapateado, 발 구르기)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수십 년 동안 계속해서 칸테오레(Cantaore, 플라멩코 가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집의 메인가수 파코 델 비소(Paco del Viso)의 목소리도 훌륭합니다.

펜시옹 아르체로스를 소개합니다

지난 번 여행기사를 개재했을 때, 숙소 위치를 물어보신 분이 많아 이번에는 숙소정보를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세비야의 핵심 구경거리 중 하나인 산타크루즈 지구 안에 있는 펜시옹 아르체로스는 친절한 미겔씨 가족이 운영하는 가족적인 분위기의 민박집입니다. 숙소에서 바로 세비야 내의 플라멩코 타블라오 공연 티켓을 사는 것도 가능합니다.

펠라요(Pelayo) 대로에서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거리(calle Santa Maria la Blanca)로 들어가 직진합니다. 약 30m 정도 직진하면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교회(Iglesia de Santa Maria la Blanca)가 오른편에 있는데, 그 교회에 다다르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꺾어진 골목이 있습니다. 아르체로스 거리(Calle Archeros)입니다.

스페인 전통가옥을 개조한 민박인 펜시옹(Pension) 간판이 즐비하게 늘어선 골목이기 때문에 금방 알아보실 겁니다. 그 골목 첫 번째 집입니다. 인터넷으로는 예약 안 되며 전화번호는 +34(0)95-418465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


태그:#스페인, #세비야, #안달루시아, #플라멩코, #배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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