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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 너머로 넘어다 본 안채. 외양은 거의 갖춰진 듯하다.
ⓒ 안병기
지난 토요일(6월 30일) 오랜만에 충북 옥천을 찾은 김에 시간을 내어 육영수 여사 생가를 찾아보았다. 작년 봄, 이곳에 잠시 들른 적이 있다. 2004년 12월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지만 그때까지 공사는 별 진척이 없는 듯 보였다.

내가 이곳을 다시 찾은 것은 그동안 복원공사가 얼마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귀추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할 때 '복원'이란 참으로 추상적이고 아리송한 단어이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삼느냐도 모호하지만 원 상태로 돌려놓는다는 게 당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복원공사에 나선 육영수 여사 생가

▲ 육 여사가 다녔던 죽향초등학교 목조 교실. 이 교실은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 안병기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이곳 충북 옥천에서 육종관과 이경령 사이의 차녀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한때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0년, 전쟁을 피해 부산에 피난 중일 때 육군 중령 박정희를 만나 결혼했다.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거부한 후 1963년 6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대통령 부인으로서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박정희를 내조했다. 그러나 그는 1974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의 총격을 받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우측 담장. 꽤나 긴 담장의 길이가 담장 안 건물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 안병기
집은 언제나처럼 굳게 대문을 닫아건 채였다. 마을 어른들께 들으니 원래 이 담은 돌담이 아닌 토담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71년 현대건설이 토담을 헐어내고 돌담으로 쌓아준 거란다.

담장이 얼마나 높은지 까치발을 하고 팔짝 뛰어 보기도 하지만 집안을 들여보는 일은 여의치 않다. 복원공사가 끝나고 나면 이 집이 앓고 있는 자폐증도 함께 끝날까.

▲ 안채가 있었던 자리(2005. 3).
ⓒ 안병기
▲ 생가복원공사 조감도.
ⓒ 안병기
이 집은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통상 '교동집'이라 불리던 이 집은 1600년대부터 김정승, 민정승, 송정승 등 삼정승이 살았던 집이라 전해지는 옥천 지역의 명가였다고 한다.

육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씨가 이 집을 사들인 건 1918년이었다. 그는 이 건물을 사들이고 나서 계단을 높여서 개축하였다고 전해진다.

2005년에 대문 안으로 들어가 집터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완연한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집은 육 여사가 서거한 이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999년 철거되었는데, 2004년 12월부터 시작된 복원공사가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흩어진 집터마다 주춧돌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집터의 크기와 너른 대지로 미루어 이 집이 굉장히 큰 집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집은 1894년 신축한 바 있는 이 집은 조선 후기 충청도 양반집의 전통적인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육 여사 부친이 사들인 후 원형과 많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002년 4월 '충청북도 기념물 123호' 문화재로 지정된 이 가옥의 복원공사는 2004년 12월부터 시작됐다. 복원할 건축의 총 넓이가 2777평 안채 등 13개 동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현재 안채 정도만 복원된 듯하다.

총 사업비 90억원 가운데 국비로 50% 정도를 충당할 계획이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사업에 대한 국고보조금 회수 조치와 함께 육영수 여사 생가 복원을 위한 국고보조금도 회수됐기 때문에 도비와 군비로만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라 공사의 진행이 지지부진한 듯싶다.

▲ 복원 공사 전의 연못(2005.3)
ⓒ 안병기
"어머니 생전, 그 연못으로 복원할 순 없나요."

2006년 12월 21일치 <오마이뉴스> 보도는 생가에 들른 박근혜 한나라당 대통령 예비후보가 못내 아쉬워했지만, 군청 측에선 "연못까지 발굴하면 사업비가 대폭 커진다"라며 난감해 했다고 전한다.

'연못'이란 나르시시즘의 태실이다. 혹시 그는 복원된 연못에다 자신의 그림자를 아니 자신이 누렸던 무소부지 권력의 그림자라도 비춰보고 싶은 것일까. 그의 무의식적인 발언에서 유신 당시의 박정희 정권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에 대해 사과한다는 그의 말의 진정성을 떠올린다면 내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

▲ 육영수 생가 앞의 논들. 동네 노인들의 말로는 이 근방의 논이 거의 육여사 부친 육종관씨의 소유였다고 한다.
ⓒ 안병기
마침 평상에 앉아 더위를 피하던 노인 두 분이 계셔서 그분들께 궁금한 것 몇 가지를 여쭤본다. 집의 크기가 조감도에 그려진 것과 일치하는지, 육 여사 아버지의 땅이 얼마나 넓었는지 등.

그분들께 들으니 이 일대가 거의 그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고개 너머 청산면 쪽을 가리키며 저쪽에 논이 훨씬 더 많았는데, 지금은 다 팔아버렸다는 얘기를 들려 주신다. 어디선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육 여사의 직접적인 평가를 읽은 적이 있는데 "썩 인심이 좋은 분이 아니었다"라고 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곳에서 700여m가량 떨어진 하계리에는 시인 정지용의 생가가 있다. 1902년에 태어난 정지용 시인이 휘문고보를 다니던 시절인 1925년에 육영수 여사는 태어났다. 23년이란 간격을 두고 태어나긴 했지만 거의 동시대의 인물인 두 사람은 대조적인 생애를 살다 갔다.

한 사람은 정상의 권좌를 내조하던 퍼스트레이디로 살다 갔고 한 사람은 6·25 때 납북되고서 생사를 모르다가 1988년에야 복권이 된 시인으로 생애를 마쳤다. 어쨌든 두 사람은 옥천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언어란 분별 없는 미묘한 것일 때가 있다. 사람들은 떵떵거리던 맛을 잊지 못하는 권력이 느끼는 감정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과 함께 싸잡아서 향수라고 부른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원형을 그리워하는 향수라는 순수한 감정과 그 삶의 원형을 파괴한 권력이 느끼는 불순한 감정을 구별 없이 부른다는 것은 언어가 지닌 일종의 형용 모순인지도 모른다.

우아한 미소가 가리는 잔혹한 세상

육영수 여사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목련꽃같이 온화한 미소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가난과 아픔을 함께 겪고 서민의 편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그였다. 많은 사람이 평가하듯이 개인 육영수는 선량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선량한 미소가 오히려 독재의 본질을 흐리는 데 이바지했던 것은 아닐까.

흔히 육영수 여사는 살아 있을 때 청와대의 야당을 자처했다고 말한다. 야당의 자처한 것과 실제 야당의 처지를 겪은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육영수 여사는 1970년 11월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을 알았을까? 알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청계천 평화시장의 비참한 노동 현실을 알았더라도 그는 그렇게 우아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을까. 그가 지었던 미소가 설령 위선이 아니라 타고난 선량함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의 미소는 결코 무죄가 되지 못할 것이다.

권력은 여자보다 더 야릇하고 끝내 주는 거라고
나는 내 자식에게 가르칠 것이다
내가 이만큼 강해지기까지의 애국적이고 민족적인 과정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많다지만, 지금부터
지난 모든 과거와 흘러간 옛사랑에 대하여
책임지려는 놈은 늘 그랬듯이 정당한 사법적 절차에 의해
사형에 처할 것이다. 시를 쓰기 시작한 지
어언 몇 해가 지났어도 아직까지 서시
하나 못 쓰는 당신. 시대에 대한 지나친 비관은
비합리적인 센티메틸리즘으로의 몰입이며
정신건강을 해치는 염세주의의 시작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내가 내 동료조차 감시하고
고문하고 필요하에 따라서는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함부로 술집이나 법정에서 지껄여서는 안 되며
우리에겐 아직도 선진조국창조와 정의사회구현과
새마을운동의 길이 멀기 때문에, 제 가문과
제 부모와 제 애인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는
위험한 젊은 놈들, 어깨를 깊숙이 구부리고 다니며
아무 데나 흐린 침을 뱉는, 그 모든 사소함에서
우러나오는 반항들을 국가는 이제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집권의 이유는 아름다웠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노라고 역사는 찬양할 것이며
나는 끈질기게 살아 남아 꿈틀거리는 네 여자의
아이에게까지 그렇게 가르칠 것이다

- 이응준 시 '독재자' 전문


침묵과 미소야말로 진실을 감추는데 가장 절묘한 위장술이 아닐까 생각하며 교동리 육영수 생가를 떠난다.

태그:#육영수, #육종관, #충북 옥천, #생가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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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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