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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5월입니다. 특별히 5월이라서 모란공원에 가는건 아니지만 특별히 5월이라서 사진기를 들고 갔습니다.

▲ 열사묘역입구의 추모비. 바로 오른쪽이 계훈제 선생의 묘소입니다.
ⓒ 오정렴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에 있는 모란공원은 민주화투쟁과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100여 분을 모신 곳입니다. 전태일 열사와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조영래 변호사 등이 계십니다.

남양주시의 뜻있는 시민들이 시작한 월례 참배행사는 벌써 2년이 넘어갑니다. 월산리라는 지명을 우리말로 풀이한 달뫼를 아이디로 쓰시는 달뫼인님, 산너머 덕소에서 오신 한스님, 퇴계원에서 경춘선 기차 타고 오신 늦바람님, 서울로 이사 갔다고 몇 달 만에 온 저와 와이프 라히드님, 5살 아들까지 모두 6명이 이번 달의 참배를 했습니다.

달뫼인님과 한스님은 접착제를 손에 들고 푯말에 번호표를 붙였습니다. 열사들을 어디에 모셨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상세한 위치를 약도에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번호표를 붙여도 우리 젊은이들이야 '걸어다니는 내비게이션 달뫼인님'만 쫓아다니는 건 당분간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번호표를 붙일 열사들을 찾는 한스님, 달뫼인님(좌측부터)
ⓒ 오정렴
아쉽게도 가장 열렬한 참석자인 '마지막땅님'은 피할 수 없는 행사가 있어서 이번 달에는 참배를 못했습니다.

▲ 왼쪽이 늦바람님, 라히드님, 자세불량님은 오성채님.
ⓒ 오정렴
살아있는 사람 얘기는 그만하고 돌아가신 분들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5월이 기일이신 분은 열두 분입니다. 참배를 하던 중 김순조 열사의 친지들을 뵈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열사에게는 살아있었으면 같이 늙어갔을 젊었던 친지들이 있었습니다.

▲ 김순조열사의 묘소. 그림을 클릭하면 김순조 열사의 사진창이 뜹니다.
ⓒ 오정렴
여러 분들도 잘 알고 계시는 젊은 두 열사를 소개하겠습니다.

아름답고 젊은 이 여자는 '김귀정 열사'입니다. 최루탄과 진압경찰의 무자비한 몽둥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26살의 꽃다운 나이에 저세상으로 먼저 갔습니다. 푯말에 적혀있는 글로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 김귀정 열사의 묘소
ⓒ 오정렴
"동지는 대학 입학 후 '심산연구회'활동을 통해 조국과 민중을 고민하는 책임 있는 운동가로 삶을 실천하던 중 백골단의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운명하였다.

91년 5월 25일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 참여하기 위한 시민 학생 등이 대한극장 주변에 약 1만여 명이 집결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3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5시 20분경 전경과 백골단이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며 시위대를 3방향에서 포위공격을 하였다.

시위대의 절반 정도가 골목을 통해 빠져나가던 중 세중간에 백골단이 골목의 입구를 차단, 시위대를 U자로 포위하고 최루탄과 사과탄을 시위대의 머리 위로 던지면서 방패와 곤봉으로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우들이 부상당하였다. 당시 골목 앞에는 승용차와 봉고차가 주차 중이었고 골목의 폭은 4m 정도였다. 최루탄은 쉬지 않고 터졌고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에 여기저기 널브러져 토하기 시작했다.

백골단은 쓰러져 있는 사람들 위를 뛰어다니며 진압봉을 휘둘렀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학생이(김귀정 동지로 추정) '아저씨, 때리지 말아요. 저 죽어요'라고 울부짖었으나 백골단이 '이년아, 집에서 공부나 하지 데모는 왜 해' 하고 몰아부치며 구타하였다고 한다.

이후 골목입구 지점에 동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백골단은 여기에도 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고 하는 수 없이 김지훈군은 골목을 빠져나갔다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돌아왔다.

전경이 물러간 후 한겨레신문사 취재차량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운명한 상태였다."


또 한 분은 젊은 남자입니다. 역시 26살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독자분들은 김기설 열사를 기억하실 겁니다. 유서대필사건으로 돌아가신 뒤에도 편히 잠 못 드신 분입니다. 역시 푯말의 설명으로 소개를 대신하겠습니다.

▲ 김기설 열사의 푯말
ⓒ 오정렴
"동지가 운동에 접하게 된 것은 '88년 9월 성남민청련 창립대회에서 김근태씨의 강연을 듣고서부터이다. 동지는 즉석에서 성남 민청련에 가입하여 활동을 시작하였고 성남 민청련 노동분과 소속, 지역 노동운동단체들을 지원 연대하는 사업에 열의를 갖고 참여하다 민청련이 역량부족으로 해체되면서 성남노동자의 집에서 교육상담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동지는 노동자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조광피혁 등에 입사했으나 성남 민청련에서의 활동이 드러나 쫓겨나곤 하였다. 항상 쾌활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성실하고 힘있는 활동을 하던 동지는 동료들 간에 인기있고 신뢰받던 동지였다. 91년1월부터 전민련에서 사회부장으로 일하게 된 동지는 궂은일, 드러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다.

속초 동우전문대 사건이 터지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에 달려가 외롭게 투쟁하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노동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신뢰를 갖고 있던 동지는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곁에서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며 헌신적으로 그 일에 뛰어들어 원진레이온 사태가 사회쟁점화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태우정권의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 폭압을 새삼 인식하였다.

동지는 강경대 동지의 죽음 이후 범국민대책회의에 참가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던 중 분신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은 동지 주변의 여러 사람을 불법 연행하여 밀실 강압수사를 통해 유서대필이라는 상식 이하의 조작으로 그를 두 번 죽이는 파렴치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또한 검찰의 유서대필 조작사건의 희생자인 강기훈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은 4년간의 실형을 살았다."


모란공원은 46번 국도 구리에서 춘천 가는 길에 마석을 지난 언덕 정상에 있습니다. 바로 옆에 모란미술관이 있어서 오며 가며 들리시면 존경하는 열사들도 한번 찾아보고 미술관도 들리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모란공원 참배 후기입니다.


태그:#모란공원, #5월, #열사,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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