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최환 변호사
ⓒ 이정환
최환 변호사. 그는 검사의 '꽃'이라 불리던 '공안' 출신이다. 그것도 공안 검사들의 계보가 소개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표적 '공안통' 중 한 사람이다. 그럴만하다.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공안부장, 대검 공안부장 등을 역임했다.

헌데 이상한 일이다. '박종철'이란 이름 뒤에 열사란 호칭을 거리낌없이 붙인다. 더구나 그는 1987년, 박종철 '열사'가 탁 치니 억하고 죽던 바로 그날, 독재 정권 시절 중요한 시국 사건을 가장 많이 처리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지검 공안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시신을 화장 처리해서 사건을 은폐하려던 경찰들의 시도를 한사코 저지했다.

'공안통'이 불붙인 독재정권 항복 선언

결국 박종철 사건 초기 부검에 이르는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공안통'이었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6월항쟁의 불씨가 살아나 독재 정권이 '항복 선언'을 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도대체 최환이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먼저 그의 '박종철 열사론'부터 들어보자.

"그 때 박종철군, 일단 '군'이라 합시다. 당시 386 중에 아주 극히 일부지만 주체사상에 흠뻑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종철군은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아보자'는, 민주화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 강했던 학생입니다. 나는 기록 갖고 얘기하니까, 종철군의 학교 기록을 살펴보고 문제인물 리스트에 포함됐는지도 알아봤는데 종철군은 그런 문제없었어요. 민주화에 대한 신념이 강한 순수한 학생이었지.

그리고 잡혀갔을 때를 봐요. 박종운이라는 선배, (박종철 군이) 얘기했어도 돼요. 그 사람말고도 중간에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어요.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얘기했으면 본인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얘기 안 했어요. 학생으로서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해 타산적인 생각을 전혀 안 갖고 있더라. 박수받을 만한 학생이란 말입니다.

남들은 그럽니다. 박종철군이라고 하면 되지, 공안부장하던 사람이 왜 열사라고 하느냐. 하지만요.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중 으뜸이 '생명 존중'입니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누가 죽였습니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줘야 될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잖아요. 거기서부터 미안하고 죄송스런 마음을 가져야 하죠. 그래서 내 입에서 열사가 나오는 겁니다."

- 혹시 사건 당시에도 그런 마음이 들었단 말씀인가요?
"그랬죠. 왜냐하면 천인공노할 중범죄를 저지르고 온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목숨을 뺏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끝까지 사인을 밝혀야 되겠다. 관련자들은 가차 없이 처단해야겠다, 그래서 한 거죠."

"미안하고 죄송하니까 내 입에서 '열사'가 나옵니다"

ⓒ 이정환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사망. 15일 부검.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 화장.

이를 보더라도 당시 상황이 얼마나 숨가쁘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다. 만약 15일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타살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박종철 사건은 아직 '의문사'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환 변호사의 역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먼저 경찰의 변사 처리 신청을 거부했다.

1월 14일 저녁 7시 40분경, 경찰관 2명이 최환 당시 공안부장을 찾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문제의 변사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박종철의 집으로 출동한 동료들이 합의서에 도장을 받아오면, 곧바로 시신을 화장하여 사건을 종결할 참이었다. 하지만 묘한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

"그들이 만약 오후 5시에 왔으면 형사부로 갔을 겁니다. 7시까지만 왔어도 당직검사가 맡았겠죠. 그런데 형사부 검사 다 퇴근하고, 당직검사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찾아온 겁니다. 딱 저만 있었던 거죠. 자기들이야 눈이 번쩍 뜨인 거지. 공안부장이니까.

지방에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서울대까지 보냈으면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아들이겠어요. 그런데 어느 부모가 쇼크로 죽었다는 아들 바로 화장해서 유골 내준다는데 동의하겠어요. '아들 얼굴 한 번 봅시다'하고 따라 올라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건 거짓말이다, 진실이 아니다. 내일 정식으로 처리하자'고 그랬더니 생난리를 치는 거요. 공안부장이 우릴 안 도와주면, 누굴 믿고 수사하느냐고!"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치안본부·중앙정보부·청와대 고위층 등에서 '사인해주라'는 압박이 쏟아졌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휴대폰이 없을 때였다는 것. 전화 코드를 뽑고 최 부장은 퇴근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검사장과 의논 끝에 사망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수사팀이 구성됐다. 최 부장 휘하에 안상수 검사가 배속된 것도 그때였다.

"안 검사를 불러 얘기했죠. 보통 사건이 아니다,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고. 안 검사가 그래요. '부장님 걱정 마십시오.' 법원에서 사체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시신을 인수하라고 지시했는데, 오후 늦도록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연락했더니 '시체를 안 내줍니다' 그러더군요. 그래 경찰에 전화를 걸어 따졌죠. 영장이 나왔는데도 시체를 왜 안 내놓느냐. 부검을 못하게 하면 공무집행방해다 말이지.

조금 있다 전화가 와서 또 그래요. 그럼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도록 해 달라. '누구 얘기냐' 그랬더니 자기네 제일 윗사람 얘기래요. '생각해봐라. 경찰 손에 죽은 사람을 경찰병원에서 해부하면 누가 결과를 믿겠느냐. 언론도 안 믿고, 국민도 안 믿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느냐'. 그래서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경찰은 집요했다. 집도의 만큼은 경찰병원 의사와 국과수 과학자가 하게 해달라고 또 졸랐다. 그들의 요구를 일단 받아들인 최 부장, 곧바로 한양대학교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부검의를 한 명 붙여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그래서 합류한 의사가 한양대 박동호 교수였다. 한숨 돌린 최 부장은 안상수 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유족대표, 학생대표 등 그 사람들 전부 하나씩 (부검 현장에) 넣어줘라. 공개리에 부검하는 것으로 해라. 또 나중을 위해 특이 소견이 나올 때마다 메모해라. 그리고 다 끝난 다음에 의사 셋에게 보여주고 사인을 받아라. 진실을 확고하게 지켜주는 요인이다. 그거 안 하면 나중에 다 말들이 바뀐다."

그를 박종철과 만나게 한 묘한 운명



최 부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부검 현장에 있던 경찰병원과 국과수 의사들이 엄청나게 시달린 끝에 결국 굴복한 결과라는 것이다. 다음날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역시 쇼크사로 드러났다'고 발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검찰 기자회견은 '물고문 치사'.

극명하게 엇갈린 결과에 기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당연히 의혹은 커져만 갔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수사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철저한 수사를 주장했어요. 그리고 당연히 나한테 (수사가) 돌아올 줄 알았죠. 헌데 결과를 보니까, 담당 검사는 안상수로 하되, 초벌 수사를 경찰에서 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믿겠어요? 안 그래요? '지금까지 우리가 다 해 놓고 왜 안 하냐'고 항의했지만, 공안 일이나 하라는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

- 수사를 맡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것 같네요.
"수사에 손을 대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워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만 해도 검찰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잖아요. 물고문에 의한 타살이란 점을 밝혀냈잖아요. 그랬으면 수사도 같은 궤도에서 진행돼야지, 왜 옆길로 탈선하냐구요. 제대로 했으면 검찰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안 생겼을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검찰은 살아있구나' 이랬을 거 아뇨.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독재정권의 앞잡이란 인식이 생겼죠. 결국은 권력에 약하고 나중에 가서는 재벌에 약하고 또 나중에는 (검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잘 보여 개인 영달이나 취하려 하고…. 결국 이 때부터 뭐랄까, 우리 검찰의 원죄가 생겨버린 거죠."

검찰의 '탈선'은 언뜻 진실을 덮는 듯 했다. 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은 이부영에게서 한재동 교도관으로, 그리고 다시 '비둘기'(비밀 편지를 뜻하는 은어)가 김정남의 손에 안착하면서 1987년 5월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검찰의 '원죄'가 '낙인'처럼 세상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최 부장 역시 '고약한 놈'으로 찍힌 결과를 감수했다고 한다. 속된 말로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의 탈선, 검찰의 원죄가 되었습니다"

ⓒ 이정환
하지만 '공안통'의 '탈선(?)'은 계속된다. 남부지청 차장검사 시절에 마주친 "국가기관이 동원된 테러", 이른바 '용팔이 사건(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수사가 대표적인 예다. 6년 동안이나 계속된 수사의 끝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의 구속으로 마무리된다.

이렇게 끝날 것 같았던 최환과 장세동의 악연은 1996년에 다시 살아난다. 최환 서울 지검장이 총괄 지휘하던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수사 결과 장세동씨는 다시 철창 신세를 지고 만다. 최환 공안부장의 '저지'로 촉발된 박종철 사건 파문으로 장씨가 안기부장직을 물러나야 했던 것까지 떠올리면 묘한 우연인 셈이다.

하지만 최 변호사는 장세동씨보다 더 미운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장세동씨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래요. 그런데 말입니다. 대통령 하고 나면 평생 떠날 때까지 나라에서 다 뒷바라지합니다. 돈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솔직한 얘기로.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에게 참 많이 야속하고 실망스럽죠. 대통령 또 할 것도 아닌데 무슨 돈이 그렇게….

부정부패가 심하잖아요? 빈부격차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지면, 사람들이 나라 위해 몸을 던지지 않습니다. 군대는 다 같이 가는 거라고 해놓고, 자기 자식은 힘 있다고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전 군사정부의 본질은 폭력입니다. 하지만 금권정치라고 뭐가 다릅니까? 똑같이 폭력적입니다. 민주정치요? 아직 요원한 것 같아요."


태그:#최환, #박종철, #6월민주항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