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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이 어릴 적 놀던 '강'에 가는 길
ⓒ 배지영
▲ 옥구읍 수산리 사람들은 이 곳을 '강'이라고 부른다.
ⓒ 배지영
남편은 '소파 선생'이다. 주말이면 소파에 누워서 리모콘 누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남편은 주말에도 약속이 많아서 '소파 선생'의 본분을 지키기가 어렵다.

나는 '글루미 선데이'다. 집안에서 주말을 보내면 우울하고 힘이 없다. 인생의 패배자가 된 것 같다. 아이는 '10세 미만', 혼자서도 집에 있을 수 있다고 우기지만 보호자 옆에서 주말을 나야 한다.

식구 셋이서 주말을 오롯이 함께 보내는 건 한 달에 한 번 꼴이다. 그런 날이면 남편은 느지막하게 일어나 밥을 한다. 날씨가 추울 때는 먹고 나서 다시 뭔가 먹을 것을 만들어서 아이와 나를 사육한다. 그러나 날이 풀리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서 과일을 깎고, 차를 우려서 도시락을 만든다.

집에서 나서는 시간은 한낮, 남편은 대천이나 목포에 가자고 하지만 하릴없이 길 위를 배회하다가 가는 곳은 딱 한 군데다. 남편이 나고 자란 곳,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 군산시 옥구읍 수산리에 있는 만경강 하구다. 밀물 썰물이 있고, 염전이 있고, 칠게와 도둑게, 숭어와 망둥어가 살던 곳을 동네 사람들은 '강'이라고 부른다.

밥 훔치는 도둑게, 볍씨 먹는 쫑찡이에게도 곁 내주다

▲ 새만금 방조제 제 4공구가 마무리되자 '강'은 바닷물이 들고나지 않는다.
ⓒ 배지영
▲ '강'으로 가는 외길
ⓒ 배지영
'강'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다. 들녘을 따라 곧게 뻗은 길은 전봇대만 나란하다.

처음 왔을 때 남편에게 "강이라며? 강에 무슨 갯벌이 있냐?" 하고 물었다. 남편은 달이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을 끌어당겼다 놓아서 밀물 썰물이 생기고, 그때 바닷물은 모든 서해의 강 하구로 흘러들어온다고 말하지 않았다. "강이지, 강"이라고 할 뿐이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강'에 와서 강아지풀만 가지고도 오래 놀았다.

아이가 서 있는 풀섶에는 도둑게가 많았다. 바다와 육지를 오가면서 사는 도둑게는 사람사는 부엌에 들어와 밥까지 훔쳐먹어서 붙은 이름이다. 집게가 빨갛고, 내 주먹만 한데 산란기가 되면 바다로 나온다. 그 때가 5월쯤인데 나는 게를 잡아서 아이를 겁주다가 물리면 비명을 질렀다.

▲ 갯벌 뿐만 아니라 풀섶이나 아스팔트 위에서도 도둑게가 나왔다.
ⓒ 배지영
강둑 위를 걸으면 셀 수 없이 많은 쫑찡이(도요새)들이 우리 머리 위로 바짝 날았다. 커다란 종이에 철가루를 뿌려놓고 자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날았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 리브스가 총알 피하는 것처럼 우리는 몸을 뒤로 젖혔다.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을 때도 많았지만 늘 갑작스럽게 당하는 일이라 셔터를 눌러본 적이 없다.

만경강 하구는 '강'이기 때문에 해마다 4월이면 쫑찡이가 날아왔다.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출발해서 남편이 살던 동네까지, 며칠을 쉬지 않고 단숨에 날아왔다. 쫑찡이들은 헤엄치거나 잠수하지 못한다. 그래서 갯벌이나 염전에서 쉬면서 갯지렁이·조개·고둥·게를 잡아먹는다. 몸을 아껴 활력을 되찾으면 시베리아로 날아간다.

사람들은 쫑찡이가 철새인 줄 몰랐다. 텃새인 줄 알았다. 아버지는 "갸들은 어디 가들 않는가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처럼 모판에 볍씨를 뿌리지 않고, 물못자리를 하던 시절에는 쫑찡이들이 볍씨를 먹는 얌체짓도 했다. 그래도 동네 사람들과 만경강 하구 갯벌과 옥구 염전은 '갸들'에게 곁을 내주었다.

새만금 사업, 염전의 운명은 정해졌다

▲ 밀물을 이용해서 중국 동포가 들어올까 봐 '강'에는 군인이 상주했다.
ⓒ 배지영
▲ 2003년 추석, 아버지가 투망을 쳐서 잡은 숭어는 강아지풀에 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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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지고, 사라졌다. 옥구 염전은 새만금 간척사업을 시작할 때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공사를 당해낼 장사가 없었다.

달은 더 이상 바닷물을 옥구 염전까지 몰고 올 수 없었다. 염전은 폐전됐다. 그래서 쫑찡이도 줄었다. 새만금 방조제 제4공구가 마무리되자 '강'의 갯벌이 단단해졌다. 차를 몰고 들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그러나 '강'이 살아있을 적에는 망둥어·숭어·게· 새우를 잡는 어부이기도 하셨다. 젊은 시절 농한기 때면, 22만평의 옥구 염전에서 일하던 염부셨다. 소금은 만들거나 생산한다고 하지 않는다. 소금은. '온다'.

나는 '강'에 들른 주말이면, 이전에 아버지에게 여쭸던 것까지 다시 궁금해진다.

"아버지, 언제 오는 소금이 좋은 거예요?"
"송진 가루가 날리는 4월에서 6월이 좋아. 그 때가 최고여."

"소금에 소나무향이 배어들어요?"
"(내 며느리가 돌대가리인가? 몇 번을 말해도 그러네) 이 놈의 새끼 봐라. 딱 그때가 좋다는 뜻이제. 소금을 앉힐라먼 강물을 가둬 둬, '난치'에서 '난치'로 내려 보내면서 이틀이고 사흘이고 쪼려. 그렇게 해야 소금이 와. 장마 뒤에 앉힌 소금도 좋아. 비가 오면 소금 판을 씻어내준 게 깨끗한 소금이 되제. 가을 닥치면 '누가리'여. 소금이 써."


이제 아이는 강에서 걷지 않는다

▲ 지금은 사라진 옥구 염전, 새만금 간척사업을 시작할 때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 배지영
아이는 가을에 온 소금처럼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다. 이제 '강'에 와도 걷지 않는다. 차 안에 남아 텔레비전을 본다. 우리 부부는 강둑을 걷는다.

남편은 어릴 때 '강'에서 놀던 얘기를 한다. 배고프면 갯벌에서 조개를 잡아서 구워먹었다. 염전 옆 '똘'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그러나 물에는 귀신이 살고 있어서 한 번씩은 아이를 잡아간다. 남편도 어릴 때 보았다.

산골에 살던 나도 여름이면 '둠벙'에서 개헤엄을 치며 놀았다. 어느 해 여름에는 물귀신이 잡아 간 남자 아이도 봤다. 위로 누나가 열두 명이 있던 아이였다. 그렇게 세상을 뜨면 '똥꼬'가 벌어진다. 어른들은 잿더미에 죽은 아이를 놓아두면 '똥꼬'가 다시 닫혀서 살아난다고 했다. 그러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 식구는 '강'에서 나오면 아버지 어머니가 살고 계신 집으로 간다. 거실에 누워서 잠들기도 한다. 도시락을 먹었어도 허전한 날은 저녁밥 때까지 기다려서 밥을 먹는다.

우리가 어머니 집에서 쉴 때에 쫑찡이들은 갈 곳을 잃어 헤매고 있다. 이제 '갸들'은 물귀신이 데려간 아이처럼, 다시 못 오는 것인가. 언제나 개발 중인 사람의 땅, 차라리 쫑찡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뉴질랜드까지 단 한 방에 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면 좋겠다.

▲ 많은 것이 달라지고 사라졌지만 우리 식구들은 '강'에 가겠지.
ⓒ 배지영

덧붙이는 글 | <나만의 여행지>에 응모합니다.


태그:#여행, #남편,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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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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