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송용미 빚진자들의집 공동대표
ⓒ 이민선

"그리워요. 너무나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 때가 그리워요."

그를 다시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 말 때문이다.

87년 6월 항쟁 20년을 맞이하여 경기도 안양에서 그 때의 기록을 정리하기 위한 모임이 있었다. 6월 항쟁 당시 안양에서도 민주화 열기를 타고 시민들이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다. 그 때의 주역들이 다시 모여 기억을 더듬어 기록을 만드는 그런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에게 "6월 항쟁이란 말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최루탄' '불타는 경찰서' 등의 대답을 했다. 그 당시 성난 시민들이 안양경찰서 일부를 불태웠다. 그런데 송용미씨만은 "그립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이 못내 궁금하여 그를 다시 찾게 됐다.

불타는 경찰서... "오래 바라만 보았어요"

송씨는 80년대 초에 노동운동을 시작해서 민주화 열기가 절정에 달했던 86년과 87년에는 민주화 대오의 선두에 있었다. 부상도 많이 당했다. 87년에는 서울시청에서 집회를 하다가 크게 다쳐서 꽤 여러 날 병원에 누워있기도 했다. 그 덕(?)에 그의 몸에는 아직도 빼내지 못한 최루탄 조각이 많이 남아있다.

안양에서는 87년 5월부터 시위가 시작됐다. 당시 송씨는 안양 '한무리 노동상담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이 그가 맡았던 주임무였다. 유인물은 주로 새벽에 배포했다. 경찰에 발각되지 않고 집집마다 골고루 배포하기 위해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통쾌하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난 그렇지 않았어요. 본래 부서지고 깨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통쾌하거나 시원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오래도록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민주화 열기가 안양에서 절정을 이룬 것은 87년 6월 26일이다. 2만여 성난 시민들이 안양경찰서 앞 도로를 가득 메우고 민주화를 요구했다. 경찰의 직격탄에 맞아 부상자가 속출했으나 시위대는 맹렬한 기세로 싸워서 경찰서 일부를 불태웠다. 그 현장에 있던 송씨는 불타고 있는 경찰서를 오랜 시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가족처럼 지내던 동지들이 그립다

송씨는 현재 안양6동에 있는 '빚진 자들의 집'이라는 복지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빚진 자들의 집은 위기 가정과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공부방 사업,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사랑의 집수리' 운동 등을 하고 있는 비영리 사회문화 복지단체다.

송씨를 만난 곳은 '빚진 자들의 집'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이다. 18평 정도의 깔끔한 방안에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공부방 어린이들의 사진이 갖가지 장식과 함께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올리지 마세요." 이 말을 듣고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깔끔한 성격일 것 같다는 생각에. 인권이 걸린 일이기에 아이들의 허락 없이는 사진을 올리지 말라는 뜻이다. 이런 성격의 사람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상당히 신중해야 한다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80년대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기에 노동운동을 했던 송씨가 '그리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당시 그의 삶 속에는 편안함보다는 고통스러운 순간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무엇이 그리도 그리운 것이지? 자리에 앉자마자 난 궁금했던 것을 질문했다.

"열정적이었던 삶이 '그립다'는 말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리운가요?"

"그 열정이 지금도 있다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는 거리에서 시위를 하든 노동현장에 있든 내 신념을 의심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몸을 던졌어요. 노동자가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 되길 원했기에 앞만 보고 달렸죠. 그것이 그리워요. 지금은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무슨 일을 하든 끊임없이 되돌아보게 돼요."

'그립다'는 말의 실체는 대화가 거의 끝나가는 즈음에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 당시 함께 동고동락하며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동지들에 대한 향수도 있었다.

"그 당시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끼리 서로 가족처럼 살았어요. 하나같이 생활이 어려웠지만 서로 많이 나누며 살았죠. 없는 형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했어요. 지금 생각하니 그것이 인상적이네요. 기억에 남아요."

13살 소녀가장, '타이밍'과 '박카스'를 끼고 살았다

▲ 공부방 어린이들이 그린 그림(공부방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 이민선
험난한 시기에 송씨가 여자의 몸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그 자체가 그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저처럼 어린 시절부터 노동자의 삶을 살았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라고 송씨는 말한다.

송씨가 노동현장에 첫 발을 들인 것은 13살 때,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다. 막내동생이 태어나던 해에 아버지가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13살 소녀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공장에서 구두(수제화) 기술자로 일하며 송씨는 야학과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다. 현재 그의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다. 그 당시 공장에서 일하며 억척스럽게 공부를 해서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마친 것이다. 송씨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잠을 잔 것 같아요. 타이밍(각성제)과 박카스를 늘 끼고 살았죠. 돈 많이 벌려고 일도 많이 했고 학원도 다녀야 했기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노동조합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야학을 통해서다. 야학을 통해서 노동자의 권리에 눈을 뜨고 노동조합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다. 그에게 노동자의 권리를 알려준 것은 당시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이다. 선생님에게 <노동의 역사>라는 책을 선물받은 것이 그가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도시산업선교회(일명 도산)'라는 교회를 알게 되면서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도산'은 개인 구원보다는 사회 구원이 우선이라는 진보적 해방신학에 이론적 기초를 둔 선교단체였다.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립기도 하지만 아쉽기도 해요. 노동운동하면서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특히 가족들을. 어머니는 제가 '도산'에서 머리띠 매고 있는 모습 보고 기절하기도 했어요. 그때 어머니를 설득하려는 노력 별로 안 했어요. 지금 같으면 충분히 설득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그 점이 아쉬워요."

송씨에게도 아쉬움은 있었다. 사람을 깊이 사랑하지 못한 점! 아마도 앞만 보고 달리던 80년대 운동가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아쉬움일 것이다.

87년 6월과 같은 상황이 다시 닥친다면 거리로 나가겠느냐는 질문에 송씨는 거침없이 "당연히 나가야죠! 누구나 그럴 거라 믿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87년이 자신에게 던져준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87년은 지금까지 내 삶을 지탱해주는 밑거름입니다. 지금까지 지치지 않고 사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지요."

대화를 마치면서 송씨는 그 당시 함께 싸웠던 동지들에 대한 당부의 말을 했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때의 마음을 잊지 말고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대화를 마치고 '빚진 자들의 집'을 나서면서 '나누는 삶'이라는 말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다. 난 무엇을 나누어야 할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안양뉴스(aynews.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6월이야기 공모


태그:#6월 항쟁, #안양, #시민, #거리, #집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