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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관타나모 수용자로는 처음으로 재판을 시작한 데이비드 힉스의 소년 시절 모습.
ⓒ 엠네스티 호주 제공
3월 26일 오후(미국시간),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안에 위치한 군사법정에서 2005년 12월 30일 개정된 '테러관련 수감자 처우법'에 따라 재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정에 선 호주 아들레이드 출신의 데이비드 힉스(31)는 힉스는 악명높은 관타나모 해군기지에 수감된 테러용의자 가운데 첫 번째로 재판을 받게 됐다. 2002년 1월 11일 관타나모 해군기지 수용소에 첫 수감자가 도착한지 5년 2개월만의 재판이다.

현재 수감되어 있는 380여 명(처음엔 600여명)의 수용자들이 그동안 재판은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갇혀있었다. 미국이 과연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재판조차도 공정성에 의심이 간다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인권단체들이 있다.

380여명 용의자 중 첫 재판, 그러나 '형량 감축 흥정''

우선 국제앰네스티 호주지부에서 "군사법정 군사위원회가 정신적 신체적 고문을 통해 얻어진 내용을 증거로 채택할 수 있다"면서 재판의 공정성과 정당성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호주와 미국 정부가 플리 바긴(plea bargain, 유죄를 인정하는 답변으로 형량을 감량받는 거래)을 통해서 정치적 골칫거리를 없애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3월 27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의 보도에 의하면, 햇볕도 들지 않는 폭 1.4m 길이 2.4m의 독방에 족쇄에 채인 상태로 5년 동안 갇혀있던 데이비드 힉스는 "유죄를 인정하면 형량을 감면해 주겠다"는 미군검찰 측의 제안을 받았다. 오랫동안 고뇌하던 힉스는 결국 재판 하루 전에 합의했다.

5년 동안 가혹한 처우를 하던 미군검찰 측이 갑자기 플리 바긴을 제안한 이유에 대해, 힉스는 "이라크전쟁의 장기화로 궁지에 몰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존 하워드 호주 총리의 뒷거래"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정신건강까지 파괴하는 수감생활을 어떻게든 마감하겠다는 궁여지책으로 플리 바긴을 수용했다고 데이비드 힉스 측 변호사가 전했다. 결과적으로, 자칫 종신형까지 언도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20년 정도로 형량을 감량 받는다는 조건으로 '테러행위에 대한 물질적 지원'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것.

이미 5년 이상 수감됐기 때문에 나머지 형량을 호주에서 채우도록 한다는 거래인데, 호주에는 관련 법조항이 없기 때문에 힉스는 석방 가능성이 높다.

"아랍어 못하는 내 아들이 탈레반 요원들을 통역했다고?"

데이비드 힉스는 미국과 동맹국에 테러공격을 하는 알-카에다 요원이 되어 적대행위를 했다는 혐의를 받아왔다. '적 전투요원(enemy combatants)'이었다는 것. 그것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요원과 함께 있다가 체포됐기 때문에 중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과 동맹군을 의도적으로 살인하려 했다는 힉스의 혐의는 나중에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지금은 테러단체에 물질적 지원과 알-카에다 테러범 훈련에 참가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플리 바긴의 대상이 된 것이다.

3월 26일 재판에서 재판관인 랄프 콜램 대령은 데이비드 힉스의 변호인단 중에서 군인 변호사인 마이클 모리 소령을 제외한 두 명의 호주 민간변호사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모리 소령의 중재로 플리 바긴 절차를 마무리 했다.

한편 마이클 모리 소령의 설명에 의하면, 힉스에 적용된 진술서 두 개 중에서 하나만 유죄로 인정하게 됐다. 그러나 호주 인권단체들은 그것조차도 고문에 의해서 작성된 진술서이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한다.

이번에 데이비드 힉스가 유죄라고 인정한 '진술서 1'의 내용을 살펴보면 '파키스탄에서 알-카에다 훈련을 마쳤고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서 오사마 빈 라덴을 만나는 등 테러단체를 지원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중에 알-카에다 및 탈레반 요원들에게 통역을 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데이비드 힉스의 아버지 테리 힉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데이비드가 호주 아들레이드에서 출생하고 성장했기 때문에 영어밖에는 할 줄 모른다. 아랍어를 전혀 구사할 줄 모르는 데이비드가 알-카에다 및 탈레반을 통역을 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혹시 영어를 호주어로 통역했다면 모르겠지만…."

끌려가는 죄수 미군 헌병이 관타나모 수용소의 죄수들을 감방으로 호송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재판관 "법정에선 죄수복 입지 말라"

올리브 그린 컬러의 죄수복을 입고 가죽샌들을 신은 채로 군사법정에 등장한 데이비드 힉스는 처음엔 약간 긴장된 모습을 보였지만 진술을 끝낸 다음에는 그를 지원하기 위해서 온 호주사람들을 향해서 "만나서 반갑다, 친구(Good to see, mate)"라면서 호주식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한편 군사법정의 재판관은 법정관계자에게 "앞으로는 죄수복을 입고 법정에 오지 않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그건 힉스의 무죄 추정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데이비드 힉스는 오랫동안 머리를 깎지 않아 어깨까지 흘러내렸고 수염도 듬성듬성 남아있는 상태였다. 사실 수염도 2년 반 만에 깎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 테리 힉스의 전언에 의하면 얼굴과 몸이 부은 상태였는데 전혀 운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추정했다.

데이비드 힉스는 전반적으로 차분한 목소리로 진술했지만, 호주 출신 민간 변호사 두 명이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자 큰 목소리로 항의해서 변호인이 아닌 조언자로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두 변호사는 법정은 나갔고 마이클 모리 소령의 변호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호주로 돌아가서 두 아이를 만나고 싶다"

한편 법정진술 전에 약 3시간 동안 아버지를 만난(2년 반 만의 만남) 데이비드 힉스는 빨리 호주로 돌아가고 싶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테리 힉스는 전했다.

"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존 하워드 총리와 호주정부가 내가 호주로 돌아가서 하게 될 일(폭로 등)을 걱정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 또한 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다."

2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점심식사를 함께 하면서 아버지가 가져간 가족들의 사진을 보면서, 억울하지만 일단 플리 바긴을 받아들이고 호주로 돌아가자고 합의를 했다.

결국 플리 바긴을 성사시킨 군검찰관 모리스 데이비스 대령은 힉스의 진술이 끝난 다음 "데이비드 힉스는 2007년 말 경에 호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진술을 끝낸 데이비드 힉스의 다음과 같은 말이 너무나 처연하게 들렸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내가 호주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두 아이를 만나고 싶어서다. 다섯 살이 된 둘째는 아직 만나보지도 못했다. 하루 빨리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수용소 군도' 관타나모는 어떤 곳인가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은 미국이 대 테러작전의 한 방편으로 운용하고 있는 쿠바 동남부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수용소 군도'라고 부른다.

'수용소 군도'는 구소련 출신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장편소설의 제목인데, 이 소설은 구소련의 강제수용소(Gulag)를 그린 작품이다. 수천 개의 굴락에 약 1800만 명이 강제 수용돼 최소 450만 명이 숨진 충격적인 실상을 담아내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애초 관타나모는 쿠바 최고의 해양휴가지였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의 시에 곡을 만든 아름답고 경쾌한 라틴음악 '관타라메라(관타나모 아가씨)'의 시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 곳이 어쩌다가 '수용소 군도'라는 끔찍한 별명을 얻었을까. 도대체 무슨 연유로 미 해군기지가 그곳에 자리 잡았을까.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에서 미군함정이 침몰된 사건을 빌미로 스페인과 큰 싸움을 벌여 승리했고, 스페인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 쿠바를 미국에 임대형식으로 이양했다.

1959년 쿠바혁명에 성공한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을 상대로 관타나모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미국이 들어줄리 만무했다.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체결된 임대계약서에 미국이 동의하는 시점에 임대계약이 만료되는 것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쿠바가 공산화 된 후, 미국은 쿠바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관타나모에 해군기지를 설치했다. 2000년 초부터 알카에다와 탈레반 포로수용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런 연유로 관타나모가 '수용소 군도'라고 불리는 불명예를 얻었다.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에서는 미국 본토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포로고문행위가 자행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재판은커녕 기소조차 되지 않은 포로들을 5년 이상 감금하는 인권침해행위도 미국 본토에선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절묘한 선택이었다. 미국헌법의 영향력이 100% 발휘되지 않는 관타나모에서 대 테러작전이라는 명목으로 테러혐의자 수용시설을 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현재 관타나모 기지에 대규모 수용소를 짓고 있는 중이다.

태그:#관타나모, #군사법정, #테러, #힉스,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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