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만화를 즐겨 보지 않았다. 만화가 '우스운' 매체라는 정말 '우스운' 편견에 약간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며칠 동안 야근을 하고 돌아가던 집 근처에서 발견한 만화 대여점, 불현듯 만화가 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평범한 그림체의 만화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존게임>이다.

유명한 일본 작가, 사이토 타카오의 작품이며 마니아들 사이에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재난 만화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한장 한장 넘기며 시큰둥하게 보고 있었지만 다 보고 난 뒤엔, 만화가 우습다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져있었다. 나아가 내 아이와 함께 꼭 다시 보리라는 결심까지 했다.

그 만큼 읽는 재미와 더불어 인간의 존재와 문명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부호를 일깨워 준 만화였다. 지구에 문명이 사라진 후 한 소년이 살아가는 이 이야기를, 내 아이와 함께 읽어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생각 하나, 이 지구에 문명이 없다면 어떨까?

▲ <생존게임> 겉그림.
ⓒ 아선
우선 책의 첫 장을 넘기면 주인공인 사토루가 아무 근심 없이 친구들과 동굴 탐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곧 이어 큰 지진이 일어나고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 환경이 크게 변화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친구들은 모두 죽어 있고, 산이었던 주변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로 둘러 싸여 있다. 홀로 남은 사토는 문명의 흔적이 전혀 없는 그곳에서 어떻게 해서든 먹고 자고 살아남아야 한다. 불을 만들고, 고기를 잡고 짐승들을 피해 잘 거처를 마련하고... 제목처럼 '생존게임'이 시작된다.

이 생존게임 중간 중간 우리가 잘 몰랐던 과학 상식들이 소개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학 상식 자체가 아니다. 우리가 문명 속에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많은 지식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물이 먹을 수 있는 물인지 어떤 버섯에 독이 있고 어떤 버섯을 먹어야 살 수 있는지, 살아 있는 물고기를 먹으면 어떤 영양소가 채워지는지, 불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등.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에 대해서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원래 지식이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지혜들을 후손에게 전해주기 위해 그 체계가 이뤄진 것일 텐데, 지금은 삶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이 돼버린 경향이 강하다.

생각 둘, 세상에 너 혼자라면? 인간과 인간 사이

이후 사토루는 무인도에서 생활하는 데 어느 정도 익숙해지지만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특히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던 와중 아키코라는 여성이 뗏목을 타고 건너오게 된다. 이 때 사토루의 기쁨이란!
현대인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살아가므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인간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손님이 오면 반가워 하고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내어 주었던 우리 선조들은 많은 사람들과 자주 만나지 못했던 전통 사회에서 사람의 소중함을 저절로 체득했을 것이다.

아키코로 인해 사토루는 자신이 있는 장소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이 바다에 가라앉았음을 알게 된다. 아키코는 문명이 사라진 지구에서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다. 아키코의 죽음 후 사토는 뗏목을 타고 가족들을 찾아 나서게 된다. 역시 사람은 홀로 있지 못하는 존재일 것이다.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류하고 공감하기 위해 함께 있어야 하는 존재가 사람일 것이다.

생각 셋, 살아남은 자들이 만든 세상

폐허가 된 지구에도 간간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토루는 가족을 찾기 위한 여정에서 다양한 부류의 사람과 작은 사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식량을 빼앗기 위해 포악해진 사람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는 사람들, 이미 지구에 희망을 잃어버리고 아이와 함께 자살하는 의사, 신의 존재를 과신하여 합리적인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산다'는 것이 당연했던 세상에서 당연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을 때 인간 군상이 보이는 모습들은 사람의 존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극단의 상황에 몰린 인간들, 그런 상황 속에서 만들어진 소사회 속의 미신, 기득권, 이기심, 어리석음 등.

과연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그런 이기심속에서 얼마나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절감하면서 이기심을 적정수준에서 통제하고 함께 살기 위해 제도가 마련된 것은 아닌지 생각게 해준다. 반면 여전히 힘 있는 소수들이 별 것 아닌 기득권에 목숨 거는 모습은 씁쓸한 웃음을 짓게 한다.

생각 넷, 인간은 하나로 보면 약해, 그래서 뭉치게 되면...

흔히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동물들, 부리고 잡아먹는 대상인 동물들이지만 문명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들은 인간보다 강하다. 사토루가 곳곳에서 만나는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간을 하나의 먹잇감으로 생각했다. 그도 굶주린 개떼들에게 잡아먹힐 뻔한 순간이 있었는데 구사일생으로 그가 예전에 데리고 다니던 흰둥이라는 개가 그를 구해준다.

사실 고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은 동물들에게 좋은 먹잇감이었다. 인간들은 함께 무리지어 살면서, 맹수들에게서 보호받고 농사를 지으면서 생계를 해결했다. 사회가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맹수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것.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약탈하고 약자를 착취하는 인간들이 등장한다.

사토는 마지막 여행지에서 예전 문명과 거의 비슷한 모습을 한 곳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곳에는 무지막지한 독재자가 있었다. 마을의 시장인 그는 생산력을 거머쥐고 노동력 착취, 발언권과 생활권을 강제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불만이 가득해도 그곳을 떠나서는 문명이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공포 때문에 반항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토루는 사람들을 선동해 마을의 지도자인 시장을 내몰게 된다.

나는 이 책에 대해 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사람은 자연이란 거대한 힘 앞에서는 참 무력한 존재란다.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사회와 문명을 만들었어. 그런데 사회 속에서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어.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자신만 잘 살기 위해... 사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야. 그렇다고 사람에 대해 무조건 실망하고 문명을 거부하지는 말자.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람에게 더 맞는단다. 네가 자라서 사람들이 더불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생존게임 1

사이토 타카오 지음, 아선미디어(2000)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라는 모토가 신선했습니다. 과거와 달리 각 블로그와 게시판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시대에는, 정보의 생성자가 모든 이가 됩니다. 이로써 진정한 언론과 소통의 자유가 열렸다고 생각합니다. 또 변의 일상적인 이야기도 알고 보면 크면 크고 중요한 이야기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여성, 특히 아줌마들의 다양한 시각, 처한 현실 등에 관심이 많고, 이 바께 책이나 정치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