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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병원 영안실에 마련된 보광의 영정사진. 위패는 2월 27일 전북 금산사에 모셨다.
ⓒ 한지연

승려 보광은 진실화해위원회에 "고문을 당해 간첩으로 조작된 억울함을 밝혀달라"는 진정을 내놓고 조사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실을 밝혀보겠다는 일념으로 검찰청에 찾아가 자신의 수사기록을 등사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뒤였다.

그래도 진실화해위원회가 나서서 조사를 하면 조그만 실마리라도 잡힐 것이라고 확신한 보광은 호소하고 또 호소하고 다녔다. 승복을 입었으면서도 세속을 떠날 수 없었던, 그 사연많고 아픔많던 보광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조사결과가 나오면 재심 신청을 할 계획이었고 재심에서 '무죄' 선고 받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보광이 25일 돌아가셨다.

오징어잡다가 나포됐더니 '반공법 위반'

@BRI@보광의 속명은 이상철이다. 강릉이 고향인 이상철씨는 14살 때 다섯 남매를 남기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생계를 위해 멸치잡이 배를 타기 시작했다. 악착같이 일을 해서 열여섯살에 기관사 보조가 되고 스무살에 기관사가 됐다.

이제 살 만하다 싶었는데, 그 다음 해 조업 중이던 오징어잡이 배가 풍랑에 길을 잃어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고 말았다. 납북어부들은 단체로 북한 여기저기를 끌려 다니며 사상교육도 받고 사회참관도 해야 했다.

천만다행으로 1년쯤 지나 7·4공동성명이 발표되고 고향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구에 내리자마자 이상철씨는 흠씬 매타작을 받고 국군과 미군에서 연달아 두달여간의 긴 조사를 받았다. 결국 북으로 나포된 것이 반공법 위반이라 하여 항소심 끝에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사이 생계를 책임졌던 맏형이 사라진뒤 4명의 동생만 남은 집은 이미 풍비박산이 나있었다. 18살 여동생은 시집을 갔고 10살 남동생은 상점에서 기거하며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6살, 4살 동생들은 남의 집에 맡겨져 있었다.

대공과 형사들이 한달이면 몇 번이고 찾아오는 통에 동생들하고 살기도 어렵고, 다시 어선을 탈 수도 없는 상황. 이씨는 고향을 떠나 경상도 거제에서 인도선 선장, 옥포조선소 시설반장으로 일했다.

"시키는 대로 인정 않으면 아이들 입양보낸다"

다시 악착같이 일한 덕에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고 동생들도 불러모아 30대 가장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그러나 납북되었다 귀환한지 10년째 되던 1983년 육군 보안대로 갑자기 연행되었다.

보안대 지하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모진 고문을 받은 그는 어느새 '귀환 이후 10년동안 지속적으로 간첩활동을 해온 간첩'이 되어있었다.

납북되었던 이후 신변에 다시 무슨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했던 이씨는 대공과 형사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유지하면서 형사들이 소개해주는 직장에서 일해 왔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선장으로 일하면서 거제 인근의 군사시설을 탐지하고 옥포조선소의 시설들을 탐지한 간첩'이 됐다.

83년 보안대로 연행될 당시 6살, 4살이던 아이들은 연행된 이후로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보안대까지 아이들을 데려와 "시키는 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을 입양보내 버리겠다"는 협박에 무너져버린 이씨는 간첩으로 기소되어 17년 형을 받고 16년 만에 출소할 수 있었다.

이씨는 출소하자 승복을 입고 출가하여 보광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승복을 입은 사람으로 세속과의 인연을 끊은 것이 마땅하지만, 진실을 밝히지 않으면 두 아이들이 '간첩 자식'으로 남는다는 생각에, 그는 고민 끝에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정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유는

▲ 스님이 생전에 살던 절집 우편함에 '보광사'라고 적혀있다.
ⓒ 한지연
그러나 지금도 자식들은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아버지 없이 '간첩 자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라 가슴에 한이 많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면서, 보광은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월 20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나는 간첩이 아니다> 편을 촬영하면서 보광은 미처 알지 못했던 가족들의 피해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면서 많이 괴로워했다.

"현아, 세월이 흐르면서 진실이 밝혀지면서 하나하나 풀어나가자. 술많이 먹지 말고 차분하게 생활해라. 아빠가 부탁한다."

휴대폰조차 꺼놓고 연락을 끊은 아들의 전화에 보광이 '아빠'의 심정으로 남긴 얘기이다. 그는 진실을 밝히면서 속세에 얽혀있는 응어리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보광이 갑자기 홀로 저승길로 떠났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가족들은 사망 원인을 알기위해 부검을 요청했다.

납북된 후 "오빠가 죽을지 모르니 굿을 해야한다"는 무당의 말에 집까지 팔아 굿을 했던 여동생은 절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오열을 했다. 큰형이 17년 형을 받자 구명운동을 열심히 했던 막내동생은 시신과 집안을 꼼꼼히 살피고 침착하게 장례를 주관했다. 함께 보안대로 연행되어 고문을 받았던 둘째 남동생은 고문후유증으로 보광이 감옥에 있는 사이 먼저 세상을 뜨고 없다.

'아버지 이상철'의 꿈, 하늘에서라도 이뤄지길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들에게 진상규명 작업은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복장이 터지더라도 허위로 작성된 사건기록을 다시 꼼꼼히 챙겨봐야 하고, 꿈 속에도 보기 싫은 고문수사관들 얼굴과 고문 순간을 다시 기억해야 하고, 유리한 증언을 해줄 누군가를 찾아다녀야 한다. 더러는 국가에 대항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가당하겠냐는 가족의 의심을 설득해야 하기도 한다. 현행 재심제도에서는 무죄를 증명하는 것이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이제 너무 늙었고 억울하게 조작된 누명을 벗기위해 다시 그런 스트레스를 피해자가 감당해야하는 상황은 끔찍하게 가혹하다. 과거 독재정권의 과거사를 규명하기 위한 포괄적이고 신속한 절차가 필요하다.

보광이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유는 왜곡된 과거사를 바로잡자 것도 아니고 본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두 아이들이 간첩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평생 벗지 못할 것이 사무치기 때문이었다. '보광'이라는 이름으로 부처님앞에 귀의한 몸이지만 '아버지 이상철'로 아이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빈소에는 생전에 보고싶어하던 아들이 상주로 앉아 보광의 가는 길을 지키고 있다. 부디, 보광의 소망이 하루속히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 한지연 기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활동가입니다.


태그:#조작간첩, #이상철, #보광스님, #고문, #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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