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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물이 떨어지는 응달 바위에 송글송글 맺힌 얼음이슬
ⓒ 김민수
@BRI@자연, 그 중에서도 들꽃에 대한 글을 자주 쓰다 보니 긴 겨울이 더 길게 느껴진다.

지난밤에 꽃이 피어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니 하루에 갔다오기에는 조금 벅찬 곳들인데 '이번 주부터는 H산에 봄꽃이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는 소식을 듣고 왕복 80km 정도면 큰 부담이 없을 듯하여 들꽃을 찾아 떠나기 위한 준비를 꼼꼼하게 했다.

산 중에서 배터리가 방전되어 낭패를 본 일들이 많았기에 예비배터리까지 챙기고 메모리카드도 여분으로 챙긴다. 딸내미의 카메라도 여분으로 집어넣고 이른 아침 출사를 나간다. 들꽃취재를 하기 위해 떠나는 이 길에 운이 좋으면 99번째 주인공만이 아니라 100번째, 101번째 주인공까지 확보해 놓을 수 있다.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이렇게 세 가지가 오늘 만나고 싶은 것들이지만 허탕치고 돌아올 수도 있다. 아침 햇살이 좋아서 사진 찍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인 듯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 꽁꽁 얼어붙은 계곡에서 단풍잎은 온 겨울을 보냈다.
ⓒ 김민수
매일 출근길에 차 한 잔으로 아침을 했는데 오늘은 휴일이라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래서인지 목적지로 가는 길에 배가 살살 아파온다. 아침 햇살이 좋을 때 만나야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으니 1분 1초라도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쉼 없이 목적지까지 내달린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들꽃 마니아들이 이미 산행을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들과 함께 가다가는 들꽃을 만나도 한참 동안 순서를 기다려야 하고, 내 순서가 되어도 마음껏 찍지를 못한다. 그들보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올라간다.

▲ 계곡물이 녹기 시작하면서 얼음속에 갇혀있던 낙엽들도 해방된다.
ⓒ 김민수
성큼성큼 걸어서일까? 산행을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넘었는데도 들꽃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달팽이 걸음으로 느릿느릿' 걸어가야 하는 길인데 먼저 들꽃을 만나겠다는 욕심이 들어와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지난해 그들을 만났던 곳에 도착해 허리를 굽히고는 천천히 걷는다. 그러나 노랑붓꽃의 싹만 푸릇푸릇 올라왔을 뿐 만나고자 했던 새끼노루귀,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은 흔적도 없다. 또 한 시간여가 지났다.

너무 급하게 나왔나 보다. 아무리 입춘이 지났다지만 이제 언 땅이 녹기 시작하는데 경기 중부지방에 봄꽃이 피었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 성급했던 듯하여 계곡을 따라 하산하기 시작한다.

▲ 얼음 아래의 물 속은 완연한 봄이다.
ⓒ 김민수
하산 길에 계곡물이 떨어지는 응달바위에서 송글송글 맺힌 얼음이슬도 만났고, 얼음 혹은 녹아 흐르는 물속에 떠있는 낙엽도 만났다. 점점 힘찬 소리를 내는 계곡물 소리, 그 소리가 커지는 만큼 봄도 점점 커질 것이다. 아쉽지만 버들강아지도 만났으니 봄오는 계곡의 풍광을 담아 돌아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한참을 계곡에 있는 바위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니 산새들의 소리와 함께 어우러져 장엄한 음악이 된다. 자연이 들려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내 주변에 펼쳐진 자연들을 바라본다.

▲ 경계사이, 마른 잎이 물 위에서 노닐고 있다.
ⓒ 김민수
온전히 겨울이던 그 곳에 봄과 겨울의 경계가 생기고, 그 경계가 생기는 순간부터 겨울은 봄을 이기지 못한다. 숲은 비어 있지만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텅 빈 숲이기에 들꽃들이 충만할 수 있는 것이다.

숲의 꽃들은 나무들이 새 옷을 입기 전에 부지런히 피어나야 한다. 숲은 그냥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채워진다. 숲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점점 높은 곳으로 봄은 찾아와 숲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게 골고루 햇살을 나누어 준다.

▲ 아침햇살에 얼음의 흔적은 모두 사라질 것 같다.
ⓒ 김민수
손끝의 따스한 기운만으로도 녹아 물이 되는 얼음, 그 물에 손을 씻으니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막 녹아내린 물을 손으로 받아 몸에 모시니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것 같다. 시원하고 맑은 물을 마셨으니 나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할 터인데도 속물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 맑은 물속에 가라앉은 지난해 낙엽의 흔적들, 그들이 있어 물 속에 살아가는 것들도 따스했을 것이다.
ⓒ 김민수
가는 계절처럼, 오는 계절처럼 그렇게 덤덤하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봄꽃이 피어난 후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물이 참 맑다. 물속에서 썩어가는 나뭇잎들이 물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뚜렷하게 보인다. 저들이 있어 물속에 살아가는 생명들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자연은 모두 고마운 존재들이다. 그저 자기들의 삶, 자기들의 본성대로 살아가지만 모두 고마운 존재들이다.

▲ 바위에서 봄을 기다리는 일엽초, 그 목마름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 김민수
바위에 붙어 자라는 일엽초를 만났다. 목이 말라 배배꼬인 몸으로 '타는 목마름'의 절정을 살아가고 있다. 자연,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한 번 싹튼 씨앗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꺾여도 다시 일어서고,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죽이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이다.

일엽초를 만나고 나니 다시 한 번 희망이 생긴다. '숲 속 어딘가에 분명히 피어난 들꽃이 있을 거야, 저 강원도 설악산에도 피었다는데 그곳보다 따스한 이 곳에 꽃이 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야.'

그러나 쉽게 보여주지 않는다. 꽃이 지천인 때에는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이렇게 귀할 때에는 마음이 선한 이들에게만 보이는가 보다 생각하며 다음 주를 기대한다. 들꽃취재(?)를 하러 나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때는 참 허전하다. 작년에 처음 서울에 와서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많은 낭패를 보았는데 올해도 그럴까 싶어 걱정도 된다. 연재기사 하나를 채워 넣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읽는 분들도 알까?

▲ 푸른 이끼위에 살포시 쉬고 있는 열매, 온 겨울을 보내고도 이렇게 붉다는 것이 신비롭다.
ⓒ 김민수
숲 속 가장 낮은 곳에서 각종 씨앗들을 품고 살아가는 이끼, 그 푸름 위에 빨간 열매가 쉬고 있다. 참 붉다. 온 겨울을 보내고도 이렇게 붉은 수가 있다니, 혼자는 외롭다고 이렇게 둘이 살포시 기대어 있다니, 이제 곧 이끼가 그들을 보듬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언젠가는 그곳에서 작은 싹이 나오겠지.

▲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너도바람꽃, 바람꽃 피어난 숲은 이제 곧 작은 풀꽃들로 채워질 것이다.
ⓒ 김민수
일엽초를 만나고 계곡의 바위들을 넘나들며 30여분을 더 배회했을 때 드디어 '너도바람꽃'을 만났다. 모두 여섯 송이, 지난해 끝물에서 만난 앳된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궁금했는데 갓 피어난 너도바람꽃을 만났다. 만나고 싶은 꽃들을 다 만나지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하다.

그의 곁에서 그를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면 계곡물을 쳐다보며 앉아있는 척 했다. 나 혼자만 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들꽃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도 워낙 꽃이 귀한 계절이다 보니 이 꽃이 단체로 들꽃 출사를 나온 이들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 피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나로 만족하기로 했다. 입춘이 지났지만 요즘 산에서 들꽃 찾기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유사하다. 그러니 내 딴에는 특종을 만난 셈이다.

이제 이렇게 꽃이 피어났으니 다음 주에는 더 많은 꽃들을 만날 수 있겠구나, 다른 꽃들 못 만나면 다시 이곳에 와 그와 눈 맞춤하면 되니까 자주 와야겠구나 생각하며 다음 출사를 계획한다.

태그:#들꽃, #풀꽃, #너도바람꽃,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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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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